평양연극영화대학교 출신으로 북에서 영화배우를 하였다는 탈북자 김혜영의 증언을 기록한 자료를 보면서 북한영화에 대하여 공부했던 필자는 일단 의문점이 생겼다.

하지만 거의 모든 남쪽 국민들이 북의 영화에 대하여 어떠한 정보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 증언을 하는 사람이 북에서 영화배우를 하였다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증언에 대하여 신뢰를 보낼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의 증언에서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을 확인보고자 나름대로 관련 자료를 좀 더 깊이 검토하여 보았다.

먼저 탈북자 김혜영이 자기 신상과 북의 영화에 대하여 증언한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이무철, 1999)

영화배우 출신 탈북자 김혜영의 증언

▲ 영화배우 출신 탈북자 유혜영. [자료사진 - 유영호]
첫째, “’1호 배우’는 김일성과 김정일 등 김일성 가족을 형상화한 배우들을 말한다. 그들은 이 배역 외에 다른 역할을 맡을 수 없다. 그렇지만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둘째, 자신은 대학 2학년 때부터 대학 내 '청소년창작단'이 만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는 <여의사>, <산울림>, <다시 돌아온 초소장> 등 3편”이다.

셋째, 북에서는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선망의 대상이기에 때문에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는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에서는 학생들이 선발되지 않는다.”

넷째, 자신은 7살 때 ‘전국유치원어린이축전’에 나갔는데 당시 김일성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 눈에 띄어 17살까지 통상 남쪽에서 말하는 ‘기쁨조’가 되기 위한 특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거기서 자신은 남쪽에도 많이 알려진 북의 가수 전혜영(휘파람 등을 부른 가수)과 함께 최종 결심까지 올라갔지만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들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이 1등을 하고도 뽑히지 못하였다고 한다. 또 1992년에도 또 한번 기쁨조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또 탈락되어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위의 탈북자 김혜영의 증언에서 필자가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네 번째 항목으로 그가 ‘기쁨조’에 지망했다가 탈락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증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 판가름할 수 있는 곳은 개인은 물론 대한민국 어느 국가기관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개의 증언에 대하여서는 영화에 관한 것이라 나름대로 자료 등을 조사해보면 확인 및 추론이 가능하다.

첫 번째, ‘1호 배우’라고 불린다는 김일성 주석의 가족을 형상한 배우들이 다른 배역을 맡을 수 없으며,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는 그의 증언은 거짓이다.

▲ 예술영화 <두만강 기슭에서>(2003)에 등장하는 김정숙.김일성의 배역을 맡은 두 배우들의 이름.
이 영화는 김정숙 85돌 기념으로 제작된 것으로 그 내용은 조선혁명군의 조국진출을 앞두고 엄혹한 정세에 김정숙이 적구에 내려가 조선인 경찰을 교양개조하고 또 대담하게 적지휘부 습격전투를 전개하여 사령관인 김일성이 주도하는 사지봉회의를 무사히 치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자료사진 - 유영호]

▲ 예술영화 <푸른 소나무>(1984)에서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할머니 리보익 등 그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들의 이름.
이 영화는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이 1930년대 숭실학교에서부터 시작한 학생운동활동과 그 이후 조선국민회 창건에 이르는 반일혁명 투쟁기를 그린 영화이다. [자료사진 - 유영호]

위의 영화 <두만강 기슭에서>(2003), <푸른 소나무>(1984)에서 보여지는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 배역을 맡은 배우들은 통상의 배우들과 다름이 없으며, 각기 그 이름 앞에 인민배우, 공훈배우 등 그 지위를 달리함을 알 수 있다.

또 <푸른 소나무>(1984)에서 각각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과 할머니 리보익의 배역을 맡은 김선남과 리순정은 이런 김일성 주석의 가계와 관련된 영화 이외에도 여러 편의 영화에 많이 출연하고 있다.

참고로 북한영화에서는 통상 김일성, 김정숙의 이름은 표기하지 않고 위의 사진에서처럼 그 배역을 맡은 사람의 이름만 노출된다. 또는 아예 배역을 맡은 영화배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두 번째, 탈북자 김혜영이 주연으로 출연하였다는 <여의사>, <산울림>, <다시 돌아온 초소장> 등 3편의 영화는 필자가 확인할 수 없었다.

북에서 평양연극영화대학의 '청소년창작단'이라고 하는 위치는 다른 창작단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우수한 실력을 갖고 있으며, 이 창작단에서 제작되는 영화는 다른 창작단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조선예술』, 『조선영화』 등 영화관련 서적에 대부분 기록이 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김혜영이 증언하는 위 3편의 영화는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참고로 우리 남쪽 사회에서도 많이 알려진 북의 예술영화가운데 <도시처녀 시집와요>(1993), <노래여 너와 함께>(1996) 등이 김혜영이 활동했다는 '청소년창작단'에서 만들어진 영화이다. 청소년창작단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좀 더 자세히 논하기로 하겠다.

세 번째,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는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에서는 학생들이 선발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하여 필자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대학 학생들의 출신성분 및 가정형편에 대하여서 통계화된 정보를 구할 수는 없지만 이곳 출신 영화인들의 이력을 보면 위의 주장에 쉽게 납득할 수가 없다.

▲ 북한 유명 배우들. 왼쪽부터 홍영희, 김룡린, 김정화.  
인민배우 홍영희. 선반공 출신으로 인민배우에 오른 홍영희. 그가 처음 출연한 영화 <꽃파는 처녀>(1972), 꽃파는 처녀는 현재 북의 1원짜리 지폐의 모델이다.
인민배우 김룡린. 탄광 굴진공 및 벌목공 출신의 인민배우 김룡린. 그는 <이름없는영웅들>(1979~1980)의 주인공 유림으로 출연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다.
인민배우 김정화. 운전수 양성교육을 받다 영화의 길에 나선 인민배우 김정화, <이름없는영웅들>(1979~1980)의 여주인공 순희로 출연했다. [자료사진 - 유영호]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김일성 주석 원작의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1972)에서 주인공 역을 한 인민배우 홍영희는 당시 16살의 선반공 출신이었으며, 그 뒤 1972년에 김혜영이 다녔다는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입학하였다.

또 <이름없는 영웅들>(1979~1980, 20부작)의 주인공 ‘유림’으로 유명한 인민배우 김룡린은 경성탄광 굴진공, 경성임산사업소 벌목공 등의 경력으로 평양연극영화대학에 입학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순희로 나오는 인민배우 김정화 역시 청진고등운수학교에서 운전수 양성교육을 받다가 1973년 평양연극영화대학을 입학하여 그 뒤 유명배우가 되었다.(이들 신상에 관한 정보는 코리아콘텐츠랩(www.kclab.com)에서 제공하는 ‘북한인명사전’을 이용한 것임)

북한영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필자가 예로 든 홍영희, 김룡린, 김정화라는 영화배우를 모를 리 없을 만큼 북에서는 그 지위와 유명세가 대단한 배우들이다. 이러한 사례로 미루어 보아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에서는 학생들이 선발되지 않는다”는 김혜영의 증언에 대하여 필자는 부정적 견해를 표하고자 한다.
한편,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이란 언급은 논리모순이 아닌가를 생각해 본다. 북은 사회주의국가로서 ‘온 인민의 노동계급화’를 구호로 채택할 만큼 노동계급을 중시하는데 '노동계급=최하층'이라는 그의 생각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다.

아마도 그는 북이 겉으로는 온 인민의 노동계급화를 외치지만 그곳 역시 자본주의 계급사회와 아무런 차이 없이 노동자를 천시하고 있다는 것을 남쪽에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위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현실은 그의 증언과 다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가요 <휘파람>, 과연 금지곡일까?

▲ 가수 인민배우 전혜영. [자료사진 - 유영호]
위에서 탈북자 김혜영이 자신과 함께 ‘기쁨조’에 최종 심의까지 함께 올라갔다는 북쪽 가수 ‘전혜영’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기회에 그가 부른 유명한 북쪽 가요 <휘파람>(1991)에 대하여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휘파람>은 1991년 보천보 전자악단에서 창작한 노래이며, 혁명시인 조기천 작사, 리종오 작곡의 노래로 악단 소속 가수 전혜영이 불러 남쪽에도 꽤 많이 알려진 노래이다. 최근에는 이 노래가 남쪽 핸드폰 컬러링으로도 서비스 되고 있으니 아마도 북의 노래가운데 <반갑습니다> 다음으로 많이 알려진 노래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북은 『문학예술사전』에서 가요 <휘파람>에 대하여 “우리 당의 품속에서 행복하게 자라나는 로동청년들의 애정세계를 노래한 생활적이며 대중적인 통속가요”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가사에서는 조국건설을 위한 생산경쟁에서 혁신자의 영예를 안고 사랑을 더욱 꽃피우려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고상한 사상감정과 그 생활을 생동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문학예술사전, 1993)

이리하여 <휘파람>은 “우리 시대 청년들의 아름답고 고상한 정신세계를 지극히 소박하고 생활적인 시어를 밝고 발랄한 곡에 맞추어 생동하게 형상한 것으로 하여 나오자마자 청년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널리 불리여지고 있는 명곡으로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리석순, 1990)

▲ <휘파람> 악보. [자료사진 - 유영호]

그런데 이처럼 소개된 북의 가요 <휘파람>에 대하여 남쪽에 전혀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 1992년 6월 4일 남쪽 언론에서는 북쪽 소식을 전하는 기사에서 “이 노래가 혁명성이 없어 민심을 동요시키고 사상해이를 초래하여 인민들을 바보로 만들 뿐만 아니라 조직의 기강과 규율을 깨고 있다”는 이유로 북에서 금지되었다고 보도하였다.

▲ 북에서 생활가요 <휘파람>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는 1992년 6월 6일자 <조선일보> 보도기사. 젊은이들의 사상적 해이를 이유로 김정일 위원장이 전 행정기관에 금지시키도록 지시하였다고 전한다. [자료사진 - 유영호]

물론 이러한 보도기사는 당시 <내외통신>의 6월 4일자 798호 기사에 근거하여 여러 언론사들이 보도한 것이었지만 명백한 오보였다.(신진화, 1992)

왜냐하면 <휘파람>이란 가요가 북에서 금지되었다는 오보가 나간 뒤에도 북의 <평양신문> 6월 19일자에서는 TV노래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곳에 <휘파람>이 들어있었을 뿐만 아니라, 1993년 제작된 북의 예술영화 <대동강에서 만난 사람들>(2부작)에서 주인공인 홀아비 강선달은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많은 승객들 앞에서 <휘파람>을 부르며, 자신의 노래 뒤에 승객 가운데 유치원 원장 조복금 할머니를 불러내어 노래시키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두 노인은 서로를 사랑하는 계기가 되고, 이후 이 두 노인을 사이에 두고 재혼 이야기가 자식들과 함께 벌어지는 즐거운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노인들의 재혼문제를 소재로 삼은 예술영화 <대동강에서 만난 사람들>(1993)에서 유람선장 강선달(인민배우 김룡린)이 남쪽에서는 금지곡으로 보도된 노래 <휘파람>을 승객들 앞에서 부르는 모습(좌)과 승객으로서 강선달 선장의 요청으로 불려 나와 손풍금을 켜며 노래하는 조복금(공훈배우 한길명) 유치원장. [자료사진 - 유영호]

이처럼 <휘파람>에 관한 남쪽의 보도가 오보임이 밝혀졌음에도 그 뒤 어느 언론사도 이 선정적인 보도가 명백한 오보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처음 잘 못 보도된 기사를 근거로 오히려 더욱 그러한 오보를 확대하고 있는 상황이다.(<조선일보>, 1992.10.15자, 2005.11.21자 등의 신문)

남쪽 사회에서 그 동안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던 언론은 그렇다 치고, 이러한 오보가 나간 뒤에도 북에서는 계속 <휘파람>이 방송되자 북한영화 연구자들의 글 속에서는 ‘90년대 초반’ 또는 ‘한 때’ 금지되었던 노래라는 식으로 그러한 오보는 수정되지 않은 채 변형되어 그대로 연구자료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이명자, 2007)

<참고문헌>

『문학예술사전』(평양 사회과학출판사:1993)
코리아콘텐츠랩(www.kclab.co.kr) ‘북한인물사전’
이무철, 「탈북인사대담 32 - 전 북한 영화배우 김혜영」, 『통일한국』(평화문제연구소:1999.2),
리석순, 「휘파람」, 『문화어학습』,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1990.3)
신진화, 「금지된 곡 ‘휘파람’은 오보였다」,『월간 사회평론』, 92권, 8호, 54p
이명자,『북한영화사』(커뮤니케이션북스:2007),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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