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협상의지 불구, ‘유씨 문제’ 쟁점화로 무산

지난 4월 21일 첫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 북측이 제기한 개성공단 특혜조치 재검토 등을 위한 후속 접촉이 남측 당국이 ‘유씨 문제’를 쟁점화 하면서 성사되지 못해 남북관계 경색이 더욱 강화되는 형국이다.

개성공단 관리기관인 북측 중앙지도개발총국은 지난 4일 통지문을 보내와 6일 개성공단 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서 남북 당국간 후속접촉을 갖자고 제의하는 등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내비쳤다.

남측 당국이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통해 이같은 제의를 물리치고 15일 유씨 문제를 포함한 ‘실무회담’을 갖자고 8일 역제의하자, 북측은 소관사항이 아닌 유씨 문제를 제외하고 일정을 앞당겨 12일 접촉을 갖자고 역시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그러나 남측 당국은 북측에 의해 40여일 째 조사를 받고 있는 현대아산 직원 유 모씨 문제를 ‘개성공단 관련 근본 문제’로 규정하고 11일 유씨 문제를 포함한 실무회담을 이전 남측의 제안대로 15일 개최하자고 재확인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간 사전 협의를 타개하기 위해 12일 남측 당국자가 개성공단으로 가서 첫 대면 실무협의를 가졌지만 역시 양측의 입장차만 확인했으며, 이 자리에서 북측은 상당한 ‘분노’를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오전 실무협의 분위기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12일날 하자. 빨리 올라와라. 만약 이렇게 협조가 안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겠다. 우리 식대로 발표하겠다. 그러한 톤의 이야기 하는 것 같다”고 심각한 상황임을 알렸다.

통상의 경우 이 정도의 분위기라면 북측은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발표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북측은 이후 침묵으로 일관했고, 14일 남측은 실무회담 대표단 명단까지 보내며 15일 회담을 추진했지만 북측은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우리 정부는 15일 오전 내주 초 실무회담을 갖자고 다시 북측에 제안해둔 상황이지만 성사 여부는 아직 미지수이다.

아쉬운 건 북측? 대국민 설득용 시간끌기

15일 통일부 김호년 대변인은 “우리의 의제에 관한 기본입장은 지난번 실무접촉, 의견교환 과정에서 충분히 제기가 됐기 때문에 앞으로는 만나서 이야기를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라고 말해 ‘유씨 문제’를 북측에서 의제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다음주 초 북측이 응한다면 회담에 임해 의제화를 시도한다는 입장임을 시사했다.

결국 정부가 유씨 문제 의제화를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는 대국민 설득용 언론플레이를 편 다음 북측과 마주앉겠다는 구상임을 시인한 셈이다.

지난 4월 21일 첫 접촉 당시 장소와 대표단 명단을 문제삼아 시간을 끌며 유씨 문제 의제화를 시도하다 결국 밤 늦게서야 북측 통지를 받았던 사례와 패턴이 유사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북측의 심기가 토라져 15일 접촉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주 초 접촉에도 나설지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유씨 문제라는 명분을 쫒느라 현 정부 들어 처음으로 마련된 당국간 대화의 장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진 것.

그러나 우리 정부가 이처럼 ‘배짱’있게 유씨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시간을 끌 수 있었던 것은 후속 접촉의 의제가 북측의 필요에 의해 제기된 경제문제라는 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3일 통일부 관계자는 “남측 당국을 북에서 오라고 한 것은 토지 임금 문제는 북한 입장이고 우리의 입장은 국민의 안전(유씨 문제)과 3통(통행.통신.통관) 인프라 문제다”며 “회담에 임하는 기본입장은 근로자의 안전문제”라고 못 박고 “개성공단 운영 문제는 정부도 일정부분 회담해야할 부분 있지만 기업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후속 접촉은 북측의 필요성 때문에 제의된 것이니만큼 우리는 급할 것 없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의 주장을 최대한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해 본 뒤 응해도 손해볼 것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숲을 못 보는 정책판단.. 솔직할 용기 필요

북측이 유 모씨를 40여일이 지나도록 접견권을 보장하지 않고 향후 조사일정마저 통보하지 않은 점은 남북간 합의서 해석을 떠나 인도적 견지에서 당연히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정부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북측이 의욕을 갖고 첫 당국간 후속 접촉 내지는 실무회담을 추진하자고 하는 상황에서 유씨 문제 만으로 2주일 가까운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나올 수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북측이 연일 미국 정부와 남측 당국을 향해 강경한 성토에 나서 한반도 정세가 얼어붙고 있는 마당에 절묘하게 마련된 대화의 기회를 ‘작은 전술적 승리’에 집착해 큰 그림을 놓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주목할 만하다.

당국간 관계 경색을 이유로 민간단체의 방북을 사실상 차단하고,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물품의 반출까지 막는 것이나 대북 지원단체들의 협력기금 의결을 늦추는 식의 정책 구사는 의도적인 대북 도발이나 전형적인 대북 아마츄어리즘의 발로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다.

정부는 기자단에게 엠바고(보도 유예)를 통해 협상과정에 대해 양해를 구했듯이 이제는 국민들을 상대로 ‘유씨 문제에 최선을 다했지만 북측이 응하지 않는 만큼 일단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가기 위해 조건없이 실무회담에 나서겠다’고 솔직히 밝히는 용기가 필요한 때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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