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립 10주년 만에 첫 후원행사를 준비 중인 배덕호 KIN 대표.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창립 10년 만에 처음하는 행사입니다.”

23일 오후 창립 10주년을 앞두고 후원의 밤 행사 준비가 한창인 서울 공덕동 소재 지구촌동포연대(KIN, Korean International Network) 사무실에서 배덕호(40) 대표는 “가장 경제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후원행사를) 하게 돼 민폐를 끼치는 것 같다”며 겸연쩍어했다.

지난 10년간 일본과 중국, 최근 러시아 사할린까지 세계 도처에 뿌리내린 재외동포들의 삶터를 누비며 활동해온 덕에 이번 10주년 행사에도 일본 우토로마을 주민회 김교일 회장과 러시아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협회 이수진 회장이 직접 참석해 현지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일본 에다가와 민족학교에서는 영상편지로 인사를 대신할 계획이다.

배덕호 대표는 오는 27일 오후 7시 서울YWCA에서 개최하는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에 대해 “KIN을 옆에서 많이 후원해주고 도와주셨던 분들과 같이 지난 10년 동안 KIN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구상하고 같이 결의를 다지는 자리”라고 말했다.

▲ 재외동포 활동은 '영원한 공부길'이라는 배덕호 대표.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KIN은 그간 민간단체로서는 드물게 재외동포 문제에 천착해왔고, 특히 재일 조선인과 중국 동포, 구 소련 동포 문제 등 우리 사회에서는 금기시되던 영역을 다루어왔다. 모두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역사성을 가진 문제이자 남북분단 상황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속한 동포들의 문제라는 어렵고도 민감한 사안들이었던 것.

배덕호 대표는 “해외동포 문제가 남북문제이기도 하고, 식민지 강점기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분단으로 이어지고, 해외동포들이 다 역사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며 “어렵고 소외된 지역도 있겠지만 오랜 역사동안 새로운 희망의 씨앗들을 품고 4세, 5세까지 있는 지역들이 많다”고 말했다.

출범 당시 ‘지구촌동포청년연대’ 명칭에서 이제는 ‘청년’을 빼야할 만큼 활동의 연륜을 쌓았지만 배덕호 대표는 “아직 너무 모르는 게 많은 것 같고, 해외동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많은 배움의 길이구나,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며 ‘영원한 공부길’을 걷는 자세를 견지했다. 또한 “그동안 부끄러웠고, 했어야 할 것을 최소한으로 했다는 평가로 자족하고 싶다”고 몸을 낮췄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재일 조선인 문제를 본격 제기해 우토로 마을과 에다가와 조선학교 문제를 우리 사회에 이슈화시키는데 일조했고, 재중동포들의 법적 지위문제를 제기해 재외동포법 개정을 이끌어내는데 앞장서기도 했던 KIN의 지난 10년의 활동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배덕호 대표는 “현장까지 한 번 찾아가기도 굉장히 힘들다”는 사할린 지역의 일제시대 강제동원된 한인 1세대에 대해 “실태조사부터 지원이 필요하다”며 “강제동원 70년의 희노애락들이 다 정리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 3만여 사할린 동포 관련 새로운 활동에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10년 동안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활동을 진행해 왔다”는 그의 고백은 재외동포의 쓰라린 역사를 도외시하고 마음의 빗장을 지른 채 동 시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가 곱씹어 보아야 할 대목일 것이다.

다음은 23일 배덕호 대표와 나눈 인터뷰 내용 전문이다.

“10년 동안 부끄러운 마음으로 활동해 왔다”

▲ 23일 오후 서울 공덕동 KIN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통일뉴스 : 창립 10주년을 축하한다. 10주년을 맞는 소감은?

■ 배덕호 대표 : 1999년 2월 창립했는데, 올해 10주년을 맞았다. 사실 바람처럼 10년이 지나가서 생각해보면 이룬 것보다 새로 해야 되는 과제들이 많다.

10년 동안도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 활동을 진행해 왔는데, 반성도 많이 되고, 앞으로 또 10년이 지난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까 고민이 된다.

□ KIN 시작 계기는?

■ 그때 당시도 시민사회단체들 간의 국제연대 이야기가 많았다. 국제연대 활동가들이 동포청년 한국사회 체험 프로그램 활성화를 위한 모임을 갖고 해외동포의 역사, 이주사, 현황 등에 관해 창립 전후로 포럼을 20차례 정도 진행했다.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여 했다.

그러나 다 막혀있었다. 구소련, 중국 동포도 마찬가지고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도 해외동포 청년들 프로그램들이 많이 필요할 것 같다.

□ 단체 명칭이 ‘지구촌동포청년연대’에서 2006년 ‘청년’이 빠졌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 그냥 단순했다. 우린 청년이 아니다. 시작은 청년시기인 20대 중반이후부터 했지만 어느덧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활동들이 강제동원 세대 문제들을 해야 하고 우리사회도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 적다. 단체이름이 너무 길기도 하고.

□ 10년간 여러 재외동포 관련 활동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 해외동포들의 역사적 현장 활동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한국에서 활동한다기 보다는 해외동포의 역사,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현장 하나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재일조선인 마을 우토로의 할아버지 할머니 표정이라든지,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학교, 특히 지난해에는 한국 사회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사할린 한인동포사회를 제5회 재외동포NGO대회를 통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계기를 가졌다.

일본은 가까워서 접근성이라도 있지만 사할린은 비포장 도로 7,8시간을 달려야지 강제동원된 1세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조건이어서, 특히나 현장에서 말씀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가슴에 많이 남는다.

□ KIN이 10년을 맞았는데, NGO 단체로서 생명력을 갖고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을텐데 운영현황은?

■ 별로 크지도 않은 단체고, 기본적으로 10년동안 보통 1,2명 많을 때는 2,3명 간사들이 있고, 기본적인 역할들을 하지만, 운영위원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중요한 캠페인이나 활동을 하나씩 맡아서 네트워크 식으로 활동해왔다.

우토르의 경우도 운영위원 한 사람이 대외적인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대외활동을 꾸렸고, 에다가와 활동도 마찬가지다. 운영위원들의 힘이 컸다고 생각한다. 잘 안 알려졌는데, 늘상 하는 간사들의 몫보다는 운영위원 한사람 한사람의 힘과 애정, 현장과 어떻게 연결시켜 낼까하는 고민들이 굉장히 큰 힘이 됐다.

창립 멤버중 상근자는 제가 유일하고 다들 공부하러 나가고 그랬다. 지금은 최준혁 사무국장과 이은영 간사와 함께 3명이 상근하고 있고, 운영위원들 중에 김종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홍보팀장과 황의중 성동여실 교사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해왔다.

개정 재외동포법 “일부에게만 특혜”

▲ 1999년 평등한 재외동포법 제정 캠페인 당시의 활동 모습. [사진제공 - KIN]
□ 우리 사회에서 재외동포에 대한 인식이 10년 전에 비해 많은 진전이 있었나?

■ 그동안 10년 세월이 흐름만큼 우리 사회가 관심 갖기 힘들고, 애정 갖기 힘든 여러 가지 재외동포의 역사라든지 현장문제가 비교적 알려진 것 같다.

정부 차원에서도 그렇고 재외동포의 중요성들이 점점 부각되고 있는 것 같고, 국회 차원에서 법제도와 정책의 중요성도 과거보다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들이 그만큼 많은 것 같다. 재외동포 문제가 단순히 분단된 나라에서 남쪽의 문제뿐만 아니라 분단국, 남북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현장문제를 풀 때도 마찬가지로 그런 문제들이 점점 고민되고 있다.

□ 재외동포법과 시행령, 시행규칙이 있는데, 2008년 3월에 최종 개정이 이루어졌나?

■ 재외동포법은 1999년에 제정됐고, 2004년 2월에 개정됐다. 재외동포법 개정도 처음에는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이전에 해외로 내몰렸던 동포들은 법 혜택의 대상도 안 됐는데, 재외동포들 특히 당사자인 중국동포들의 힘으로 오랜 기간 많은 활동을 통해 바꿨다.

한국사회에 들어온 중국동포들이 고국에 의해서 불법체류자로 내몰리고 온갖 서러움을 많이 당했는데, 2003년도 11월 15일부터 90일간 중국동포들이 종로 5가에서 본인들의 고유한 민족적 권리로서 자유왕래 문제를 거론을 시작했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90일 농성을 하면서 결국 법을 바꿔낸 원동력이 됐다. 그때 참 기뻤다.

중국동포들의 힘으로 48년 8.15 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에 나간 분들도 해외동포법의 혜택을 받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도 많이 있다. 정작 그분들은 혜택을 못보고 있고, 유학생이라든지 한국에 투자한 사업가들만 혜택을 보고 있다. 앞으로 개정해야할 부분이 많다.

□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지위에 관한 법률’이 2008년 3월에 일부개정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2004년 법 그대로인가?

■ 하위 법령 몇 개 바꿔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포함이 안돼 있다. 국적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는 다 포함된 것처럼 보이는데, 법 자체에서도 재일동포 중에서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빠져있다. 앞으로 개정 과제다.

또 하나는 시행령으로 보면 중국동포들 구 소련 동포들이 F4 체류자격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차별적으로 연구자나 한국에 투자한 소수만 특혜를 주고 있는 상황이다.

재일 조선학교 “한국정부는 뭘 했는지”

▲ KIN은 폐교 위기에 처한 일본 도쿄 소재 에다가와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했다. 
[사진제공 - KIN(임재현)]
□ KIN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우토로나 에다가와 문제 등 재일동포 관련 활동인 것 같다. 실제로 10년 전에 비해 재일동포 문제와 관련해 진전이 있었나?

■ 이전에도 사실은 정부 당국자들이랑 정책문제, 재일동포 문제, 구소련 지역 동포 문제, 중국 동포 문제를 늘 거론하고 부딪히는 부분이 많은데, 아마 재일 조선인 관련 부분은 많은 현장에서도 이야기하고 있고, 포인트라 하면 65년 한.일협정이 미완의 문제로 남아있다.

물론 현장에서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자랑스럽게 일본 전역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정작 관심 가지고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또 우리 사회는 어떤 기반 위에서 지금 이런 정도라도 먹고 살고 있는가. 어떤 일말의 책임감은 없는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늘 질문을 던지곤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재일 조선인에 대한 시각은 여전히 협소했던 것 같고, 그들과의 충분한 대화라든지 120만 재일 조선인이 일본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가까이 있기 때문에 더 모른다는 생각이 있다.

점차 인식이나 역사에 대해서 기반을 넓혀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굉장히 많은 것 같다. 미래의 과제도 있는 것 같고.

□ 우토로 마을이나 에다가와 민족학교는 어느 정도 성과적인 활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나?

■ 저희가 에다가와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은 조선학교에 대한 한국사회의 편협한 인식을 굉장히 부끄럽게 생각했다. 일본 전역에 걸쳐 해방이후에도 수십년동안 일본정부의 한푼 도움없이 전역에서 조선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한국정부는 뭘 했는지, 우리사회는 그 역사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지, 말하자면 진솔한 동포애라도 있는지.

저는 모르기 때문에 편협한 시각이 생긴다고 생각하는데, 전국적으로 에다가와 조선학교 살리기 캠페인을 하면서도 한국에 많은 양심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아이들 60명이 다니는 학교지만 그 학교 현장을 빼앗기지 않고 도쿄도로부터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 KIN은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삶의 터전인 우토로 마을을 살리기 위한 활동에 함께 했다. [사진제공 - KIN(연합뉴스)]
□ 활동을 하다보면 남측 사회에서는 남북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색깔이 좀 이상한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총련이나 민족학교 쪽에서는 ‘진심이 무엇인지, 또다른 바람이 들어오는 건 아닌지’ 경계심이 있었을텐데, 어땠나?

■ 우토로나 에다가와 활동은 우리 사회가 부족한 부분들이 뭔가를 고민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캠페인을 시작했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다.

현장의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고, 다만 우리사회가 그동안 커튼을 쳐왔던 부분들을 서로 솔직하게, 진심으로 다가가려 노력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반향들이 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역사가 6,70년된 학교문제라든지 우토로 문제라든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앞으로도 저희가 더 오랜 기간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토로나 에다가와 캠페인이 3,4년 간에 걸쳐서 성과를 냈다는 평가는 있지만 그게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부끄러웠고, 했어야 할 것을 최소한으로 했다는 평가로 자족하고 싶다.

□ 흔히 일본의 민족학교는 남측 사회에는 조금 벽이 있을 법한데, 벽이나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았나?

■ 학교마다 다를텐데, 요즘은 대부분 한국적, 조선적 가릴 것 없이 아이들이 공통으로 우리 말글을 배우고 역사를 배우려면 조선학교를 가야 배울 수 있다.

2002년도에 가봤는데, 과거에는 그분들이 오히려 한국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에 조선학교 역사를 알아줬으면 좋겠지만 한국에 돌아오면 국가보안법이라든지 여러 가지 동포사회와 한국사회를 긴밀하게 소통하지 못하게 하는 구조들이 걱정스러워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거나 어려운 현실에 대해 같이하자는 얘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저희들이야 어려운 문제들은 없었다. 현장 가면 어떻게든 잘 보여주려고 하고 많은 애정들을 보여주시고, 그렇게 했다.

□ 남쪽에서 온 단체들에 대한 신뢰가 쉽지 않았을텐데, 초기에 어떻게 신뢰를 쌓았나?

■ 직접적이기 보다는 늘 조선학교 관련해서도 양심있는 일본단체들이 있다. 일본단체, 한국 동포관련 단체, 조선학교 관계자 늘 이렇게 3두 마차로 문제를 풀어나갔던 방식이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에다가와 학교는 일본 변호사들도 양심적으로 오랜 동안 활동해왔고 거기에 동포 변호사들, 학교 현장관계자들, 이런 분들의 호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도 알게 됐다. 그다지 큰 어려운 점은 없었다.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70년 역사 정리해야”

▲ KIN은 지난해 제5차 재외동포 NGO대회를 사할린에서 개최해 사할린 한인 1세들의 문제를 본격 제기했다. [사진제공 - KIN(임재현)]

□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고, ‘사할린 한인 강제동원 역사기념관’ 건립을 제안했는데, 잘 진행되고 있나?

■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고 사할린도 6,7만명의 과거 일제강점기 때 강제동원된 문제이다. 현장까지 한 번 찾아가기도 굉장히 힘들다. 현장을 가보면 남사할린 북위 50도 이남에 수백킬로에 걸쳐서 강제동원된 1세 분들과 후손들이 곳곳에서 살고 있는 상황이다.

사실은 일본정부 책임이긴 하지만 6,70년 동안 한국에서도 그분들에 대해서 한 게 뭐가 있는지 참 현장을 가보니까 부끄럽고 이분들의 한이 쌓이고 쌓여서 70년 가까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의 책임이라하고 책임을 못 지겠다는 형국이고, 그동안 1세대들은 한.소 수교가 1990년에 됐기 때문에 고향땅도 밟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사실 재일동포들 보다 구조적으로는 이산의 아픔을 더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분들인데 그동안 그분들의 한을 어디 호소할 데도 없었고, 그 강제동원의 역사에 대해서 배상받을 수 있는 구조도 다 막혀있다.

현장에서 1세들이 다 돌아가시면 더 이상 그 역사가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저희들이 가서 보건데 빨리 일본정부와 소송해 배상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일이 많이 걸리는 문제이지만 현장의 과거 강제동원 70년의 역사를 잘 정리해야 한다.

후손들이 관심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 새로운 세대들이 생겨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내려면 크든 작든 강제동원 70년의 역사를 정리해야 한다.

거기도 조선학교도 있었고, 우리를 김치 담아먹는 풍습도 있고, 쌀밥해서 먹는 것 좋아하시고, 요즘은 러시아인들도 한인들 문화에 익숙해서 오히려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다.

강제동원 70년의 희노애락들이 다 정리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년 지나면 이 흔적들이 다 없어지기 때문에 저희들이 해야 할 부분이라고 절감한다.

□ 재중동포들의 입국 현황과 방문취업제의 문제점은?

■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해외동포를 같은 내국인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원래는 같은 역사를 공유했고, 같은 이웃집에 있었던 분들이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쳐 분단되고 하니까 어느덧 이방인으로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까 경제가 어려우면 다시 출입국을 제한한다든지 또 예컨대 중국동포들이 국내 들어와서 돈벌어서 자식들 교육비로 보내려고 어려운 3D 업종에 종사해서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신데, 한국 경제가 어려우면 얼마든지 출입국이라든지 취업을 금지시킬 수 있는 대상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재외동포법이 개정돼서 H2 비자로 와서 취업도 자유롭게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가 이들이 누구라는 것, 우리사회에 얼마든지 들어와서 내국인과 같은 권리를 행사해야 되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것 같고, 특히나 더 고국에서 관심을 기울여야할 사람들은 배제된 것 같다.

한국에 투자를 한다든지 공부를 하러 온 사람들은 F4 비자, 재외동포 체류자격을 주고 있다. 그런데 소위 3D 업종, 중국에서 농사짓는 분들에게는 차별적으로 H2 비자를 주고 있다. 이것은 정부에서 잘못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정 살기 힘들면 똑같이 제한하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은 재외동포, 가난하거나 힘없는 사람은 외국인, 서로 이렇게 구분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이 정부도 그런 것 같다. 이것은 새로운 차별이라고 할까. 재외동포 사회에도 차별을 양산할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외동포 참정권, “전 세계적 웃음거리.. 부끄럽다”
“사할린 할머니 김치맛 잊을 수 없다”

▲ 배덕호 대표는 재외동포 참정권 문제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고 재외동포재단의 역할도 필요할 것 같다. 활동해오면서 정부와의 관계 재외동포재단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 재외동포재단은 어차피 외교부의 재외동포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곳은 아니고 스스로도 밝히듯이 특수한 민간재단이다. 뭐 하나 현장문제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풀어낼 힘이 없다. 특히 재외동포 정책은 외교부가 실행은 재외동포재단이 이런 이원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

저희들이 10년 동안 재외동포법 문제라든지 각종 현장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가장 일차적으로 설득하고, 오히려 목소리를 크게 높여할 대상이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였다.

그래서 민관이 협력해서 풀어야 할 사항들이 해외 도처에 널려 있는데, 정부가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예산을 투입해서 정책을 잘 만들어서 끈기 있게 밀고나가도 어려운 판인데, 사실 10년 동안 활동을 하다보니까 아예 그런 구조가 정부 내에 없다는 것이 좀 아쉽다.

법제 관련해서 재외동포 문제는 특수한 문제고 일개 외교부가 풀어나가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독립해서 재외동포 법제도 만들고, 정책도 좀 일관되고 장기적으로 풀 수 있는 구조를 요구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새로운 구조, 재외동포처 같은 것이 필요하다.

□ 재외동포 투표권 부여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은?

■ 투표권 문제는 헌법재판소에서 2007년 판정이 나와서 국회에서는 법제화 하지 않을 수 없고, 지금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저희는 원칙적으로는 남북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이고 그런 상태에서, 남쪽에 투표권을 준다든지 북쪽에 투표권을 준다든지 이런 행위 자체가 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것 같다.

전 세계에 유래를 찾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그만큼 분단의 역사가 길기도 했고, 참정권이란 말이 정치권이라든지 미주동포라든지 이런 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데, 그런 애정보다도 더 귀기울여야 하는 문제가 많은데,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 현재 국내에 재외동포 관련 단체들의 움직은 활발한지? 연대 현황은?

■ 아직 힘이 미약한 것 같다. 해외동포 관련 연구하는 집단들은 과거보다 좀 많아진 것 같다. 재외동포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자라든지 연구소는 많은 것 같은데 정작 현장에 있는 재외동포들 특히 어려운 지역에 있는 분들의 문제를 어느 하나를 집중적으로 해서 같이 소통하면서 풀어가는 단체는 소수인 것 같다. 여전히 활성화할 부분인 것 같다.

□ 아무래도 해외 현장을 직접 둘러보면 느낌이나 감동이 남다를텐데.

■ 사실 현장을 많이 못 갔다. 늘 가는 데만 가니까. 사할린은 그 자체가 갈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고, 서구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곳과는 출입국 하기도 다르고, 규모있는 행사를 치르기도 힘들다.

뽀로나이스크라고 남사할린 비행기 내리는 데서 7,8시간 가는 곳에 있는데, 거기서 할머니가 담은 김치를 한번 먹어 봤는데, 제가 저희 고향에서 먹는 김치보다 더 맛있어서 굉장히 놀랐다. 이렇게 맛있는 김치를 그분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 김치맛 잊을 수가 없다. 한국 김치보다 훨씬 맛있었다. 꼭 한국에 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 KIN도 단체로서 운영이 쉽지 않았을텐데. 10년간 월급이라도 제대로 받았는지 걱정이다. 운영은 잘 되고 있나?

■ 운영은 힘들고 기본적으로는 후원금으로 운영한다. 운영위원들이 돈을 안받고 활동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인력과 사무실 운영비, 활동비가 필요한데 후원회원을 많이 가입시켜서 하는데 그것 가지고는 모자라고 사실 빚을 내야 될 때도 있다.

현장방문할 때도, 우토로 갈 때도 우리가 어디 정부 돈을 받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뜻에 동참해주신 분들이 후원을 한다든지 아니면 본인이 돈을 만들어서 간다든지 이래야 하는 과정인데, 어렵다. 다른 단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재외동포 역사, “영원한 공부길”
후원의 밤, “10년 만에 처음하는 행사”


▲ 배덕호 대표는 오는 27일 창립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를 "10년 동안 KIN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구상하고 같이 결의를 다지는 자리"라고 말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 어려운 조건에서 10년간 활동해왔는데 개인적 소회는?

■ 아직 너무 모르는 게 많은 것 같고, 늘 하는 말이지만 해외동포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많은 배움의 길이구나,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든다. 알았다고 얘기한 순간 모르는 게 너무나 많고, 시간이 지나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많이 있는 것 같고, 영원한 공부길인 것 같다.

일 하면서 해외동포 문제가 남북문제이기도 하고, 식민지 강점기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분단으로 이어지고, 해외동포들이 다 역사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좀 어려운 지역도 있지만 힘들지만 잘 헤쳐온 지역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제대로 이해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 같다. 어렵고 소외된 지역도 있겠지만 오랜 역사동안 새로운 희망의 씨앗들을 품고 4세, 5세까지 있는 지역들이 많다.

다만 저희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사회는 그동안에 뭐 했느냐는 것이다. 사실은 지원의 대상이 아니고 벌써부터 관심을 갖고 서로 상부상조해야 되는 분들인데, 우리는 필요할 때는 동포라고 이야기하고, 우리가 힘들 때는 정작 나몰라라 했다.

□ 이번 후원의밤 행사는 어떤 식으로 치러지나?

■ 창립 10년 만에 처음하는 행사다. 같이 고생한 여러 시민들도 있고, 동포들도 있고, 관련단체들도 많고, 특히 관심을 가져준 언론들도 많다. 그동안 우토로, 에다가와, 재외동포법 재정운동, 또 앞으로 사할린 문제까지 고생하신 분들, 고생해야 될 분들 모시고 그간의 활동들을 나누자는 의미가 있다.

10년 활동해오면서도 그런 행사들을 못했다. 늘 시간에 쪼들리고 일하다 보니까 그런 기획도 한번 못했다. 가장 경제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하게 돼 민폐를 끼치는 것 같기는 하다.

□ 후원의 밤 프로그램 중 특색있는 것은?

■ 모두가 하이라이트겠지만, 우토로 마을 주민회 김교일 회장님과 사할린주 한인이산가족협회 이수진 회장님이 직접 참석한다. 우토로도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어서 관련 말씀을 해주실 것이고, 마찬가지로 사할린 한인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해주실 것이다. 에다가와에서는 오기가 쉽지 않아 영상편지로 인사를 대신한다.

이게 문화공연과 같이 연결돼서 진행될 것이다. 노래와 시와 이야기가 있는 문화 공연으로 계획하고 있다. 가수 이지상 씨와 노래패 우리나라 공연이 있다. 그간 활동을 담은 사진전시도 있고 후원의 밤이니 만큼 후원금을 받는다.

이번에는 KIN과 같이 KIN을 옆에서 많이 후원해주고 도와주셨던 분들과 같이 지난 10년 동안 KIN이 걸어왔던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구상하고 같이 결의를 다지는 자리이다.

그 중에서도 사할린 한인들의 역사회고, 희망을 찾는 사할린 희망캠페인에 대한 시작을 알리는 자리이다. 사할린 한인들이 영주귀국을 하고 있지만 사할린 잔류 1세들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지원이 필요하다.

앞으로 사할린 캠페인이 큰 캠페인이어서, 준비하는 것은 일본 소송하는 것이 있고, 사할린한인지원특별법 만들어야 하고, 기념관 건설 문제도 있고, 잔류 한인1세 지원 문제 등 몇 개 카테고리가 있는데, 아직 시작을 못하고 있다. 활동가가 더 필요하다.

사실 사할린을 먼저 하려고 했다. 10년 전부터 공부할 때 중요한 이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가까이 있는 문제 중심으로 하다 보니까 맘을 끌면서도 못한 것이다. 한계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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