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세계항공사상 유례없는 속전속결의 사후처리

1. 수사발표 이전, 사고발생 단 한 달 만에 보상금 합의에 이어 사망처리까지


1-1. KAL858기 사건의 처리에 있어서 한국 당국이 보여준 행동은 세계항공사고 역사 및 세계항공테러사건 역사에 유일무이한 속전속결의 과정이었음.

▷ 항공기 폭파테러사건에 있어 범인이 사건발생 불과 48시간 만에 체포된 사례는 초유의 일임. 일반적으로 용의자를 확정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음.

▷ 이 점에 있어서 한국 정보당국의 수준은 CIA로 하여금 저 발치에 머물게 하였고, 대한항공은 일개 항공사 수준을 초월하는 가히 국가수준의 정보운용능력을 보여주었음.

1-2. 항공사고 조사의 ABC라는 블랙박스 회수에 대한 정부수색단의 미온적 태도는 물론이고, 수색 단 10일 만의 정부 공식수색단의 철수는 현재 세계적인 기록이 되어 있음.

▷ 어찌된 일인지 한국당국은 블랙박스 회수장비조차 동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애초부터 블랙박스 회수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반증임.

▷ 블랙박스 회수 장비를 동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당시 한 언론의 보도는 “블랙박스 수거를 위해선 수중공명위치탐지기가 있어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엔 없어 미국 보잉사로부터 빌려올 계획을 세웠으나, 추락예상지역이 1백마일 이상인데 비해 발신음은 반경 2마일 밖에 전달되지 않아 포기했다”라는 것임. (동아일보1987.12.5자, 3면)

▲ 블랙박스 탐지 포기 -동아일보 [자료사진 - 서현우]

▷ 블랙박스의 신호음 발신기간만도 무려 한 달인데, 단 10일 만에 정부공식수색단을 철수시킨 정부가 블랙박스 발신음 반경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국민대중을 우롱하는 행위임.

▷ 그것도 수색 10일 중 7일을 육상수색에 허비하다, 실제 해상수색은 고작 3일간이었음.

1-3. 사건발생 단 7일 만에 KAL사고대책위는 공중폭파에 의한 탑승객 전원 사망으로 간주하며 현지 희생자 위령제에 대해 언급함. (MBC뉴스데스크1987.12.5자)

<한편 탑승자 가족대표들과 대한항공 측은 오늘도 일련의 접촉을 통해서 가족대표 등을 현지에 파견하는 문제와 현지에서 의 위령제 거행, 그리고 88체육관에 마련된 분향소 운영 문제 등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협의를 통해 탑승자 가족 당 2명씩을 사고확인 후 현지에 보내기로 합의한 가족들은 이에 따라서
관련서류와 사진을 준비하는 등 출국 대비에 필요한 수속을 밟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고대책본부에서 MBC뉴스 김세용입니다. - MBC뉴스데스크>


▷ 김현희의 신병인수와 동시에 최광수 외무장관은 ‘공중폭파 및 테러’라 규정하며 “응징할 것, 국제적으로 응징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론에 다짐함. (MBC뉴스데스크1987.12.15자)
- 최광수 외무 장관은 이듬해 2월 출범한 노태우 신정부의 초대 외무장관으로 유임됨.

▷ 김현희 신병인수 4일 뒤 정부사고수습대책위는 공식적으로 ‘공중폭발로 인한 전원사망’이라 결론지었는데, 그 근거는 1987.12.13.에 안다만 해상에서 수거되어 4일 뒤 한국으로 인도된 구명보트의 공기주입 수동펌프의 파손이었음. (MBC뉴스데스크1987.12.19자)
- 이후 국과수 감정결과, “압축과 마모로 인한 파손이며 아무런 폭파흔적이 없다”는 결론으로 부인됨.

▷ 사건 발생 불과 한 달 만인 1987.12.31 법무부는 탑승자 전원을 사망 처리했는데 법적으로 실종자일 경우 유예기간 1년이 경과되어야 하나, 정부당국은 실종이 아니라 사망으로 간주함. (MBC뉴스데스크1987.12.31자)
- 시신 확인 절차도 없이 법적으로 규정된 실종 유예기간을 어기면서까지 졸속처리한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으로 남음.

▷ 위 같은 날인 1987.12.31 KAL사고대책위는 희생자 가족과의 제18차 보상협의회에서 보상금 문제를 합의 타결함. 보상금액은 희생자 1인당 총8천5백만 원임. (MBC뉴스데스크1987.12.31자)

<KAL기 희생자 보상 문제 타결
● 기자: 대한항공과 KAL858기 탑승자 가족 대표들은 제18차 보상협의회에서 대한항공 측이 7,900만 원의 보상금과 600만원의 장례비, 유자녀들의 학자금을 일률 지급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또 합동위령제는 다음 달 8일 새마을 중앙 본부에 있는 88체육관에서 거행하며 진혼단은 희망자에 한해서 다음 달 9일에 파견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인용 기자) - MBC뉴스데스크>


▷ 이는 대한항공 측이 ‘법적 처리’ 운운하며 희생자 가족들을 압박하여 한 달 사이 무려 18차례나 협의를 진행한 끝에 이루어진 속전속결의 결과임.

▷ 1988.1.8 합동위령제 개최, 또 다음날 안다만해상 희생자 기상진혼제 개최함. (MBC뉴스데스크1988.1.8~1.9자)
- 사고기 동체 잔해도 아닌 고작 장비품인 구명보트 하나만 수거한 해상에서 진행함.


2. 세계 항공테러사건의 빛나는 금자탑

2-1. 1988.1.15 안기부는 KAL858기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함. 수사의 결론은 “북한 김정일의 지령에 따라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의 특수공작원 김현희, 김승일에 의해 실행된 공중폭파사건”이라 함.

▷ 이 역시 항공테러 사건으로서 그 유례가 없는 이른 시기의 수사발표이자, 국제민간항공에 관한 협약인 ‘시카고조약’ 26조를 명백히 위반한 일임. (최홍옥 전 건교부 항공조사국 국장의 2005.11.8 ‘국회귀빈식당 토론회’ 증언)

▷ ‘시카고조약’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규정한 사고조사 관할 국가의 사고조사보고서 제출이 선행되어야 함. 이 사건의 경우 당시 버마(현 미얀마)가 사고조사보고서 제출의 의무를 지닌 국가로서 응당 ‘버마 사고조사보고서’의 결론이 선행되어야 했음.

▷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 시점(1988.1.15)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참가신청 마감일을 불과 2일 남겨둔 날이었음. 이는 김현희의 서울 이송 시점이 대통령 선거일 하루 전이었던 사실과 놀랍게 대비됨.

▷ 당시 비동맹세계에서의 북한의 위상과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공동올림픽이란 강한 명분으로 인해 마지막까지 참가를 주저하고 있던 당시 미수교 국가이자, 전통적 친북국가인 베트남, 마다카스카르, 체코슬로바키아, 탄자니아, 시리아의 참가신청이 수사발표 직후 2일 동안에 이루어짐.
- 올림픽 참가신청 마감일인 1988.1.17은 앞서 한 차례에 걸쳐 50일이 연장된 날짜임.

2-2. 당시 버마가 ‘사고조사보고서’를 ICAO에 제출한 시점인 1988.3.17은 사고발생 불과 1백여 일이 갓 지난 시점으로 매우 이례적으로 빠른 것이었음.

▷ 지난 2002.4.15 부산 김해공항에 착륙을 시도하다, 조종사 과실로 야산에 추락한 중국민항기 사고의 경우는 최종보고서가 나온 시기가 무려 3년이 지난 2005.5.6이었는데 그제야 항공사 측과 피해자 측 사이의 보상협의를 시작할 수 있었음.

▷ 더하여 버마의 ‘사고조사보고서’ 작성엔 한국당국이 개입한 증거가 존재함.
- 이는 ‘버마 보고서 검토’에서 따로 논함.

3. ‘사고조사보고서’ 제출 전의 테러지원국 지정

3-1. 미국은 안기부 수사발표 불과 5일 만인 1988.1.20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함.

▷ 미국에 의한 북한의 테러지원국 지정은 실로 전광석화 같이 이루어진 일이지만, 당시 버마당국의 ‘사고조사보고서’가 제출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이 역시 국제조약 상 문제를 안고 있음.

▷ 이처럼 KAL858기 사건은 사건 발생 단 1백여 일 만에 수사발표와 보상합의, 희생자 사망처리, ICAO에 ‘사고조사보고서’ 제출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처리됨.

4. 기소에서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일사천리

4-1. 앞서 본 유례가 없는 빠른 사후처리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예외만이 그 반대양상을 보였는데, 그것은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 김현희의 기소문제였음. 김현희가 기소되기까지의 과정은 이상하리만치 더뎠을 뿐만 아니라, 법절차와 법집행 모두에 있어 매우 기이한 상황을 낳음.

▷ 어찌된 일인지 김현희는 안기부수사발표 이후 불구속 상태에서 1년이 지나서야 기소되어 사건발생 1년 4개월만인 1989.3.7에서야 1차 공판이 진행되었음. (조선일보1989.3.7자 19면)

▲ 조선일보1989.3.7자 [자료사진 - 서현우]

▷ 그 과정에 김현희는 각종 언론매체에 의해 대중적 스타로 떠올랐는가 하면, 이를 바탕으로 불기소 처분설이 언론에 나돌기도 했음.
- 아마 희생자가족들의 핏발서린 시선이 없었더라면 불기소 처분이 이루어졌을 지도 모름.

▲ ‘스타 김현희’ 관련 보도 -세계여성1994.6월호 [자료사진 - 서현우]

4-2. 김현희에 대한 재판은 사건의 비중에 비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심 공판은 단 3차례의 심리만을 거쳐 사형선고를, 2심 공판은 단 1차례의 심리 만에 역시 사형선고를, 마지막 상고심은 1심 재판이 시작된 지 불과 1년 만인 1990.3.27에 사형확정으로 끝을 맺음.
- 이는 당시로선 매우 신속한 진행이었음.

▲ 불구속 재판에 대한 KAL가족회의 항의를 보도함 [자료사진 - 서현우]
▲ ‘김현희 사형확정’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그런데 놀랍게도 대법원 사형확정을 거친 김현희는 확정판결 불과 보름만인 1990.4.12에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형 집행정지를 받는데, 단계적 감형도 아닌 전적인 형 집행정지는 한국은 물론,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일일 것임.

▲ ‘김현희 특별사면’ 언론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 정부당국이 내세운 사면의 이유는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고, 김현희는 사면과 함께 당시 안기부 촉탁직원으로 채용됨.

▷ 무엇보다 더 놀라운 일은 이 과정에서, 즉 1심 선고에도, 2심 선고에도, 확정판결 이후에도 김현희는 단 하루도 구속수감을 겪지 않았다는 점임.
- 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로 법질서를 유린한 행위임.

5. 사면을 전제로 하여 법정에 선 항공기폭파테러범

5-1. 국정원자료1989.2.3자 ‘김현희 공판대책’에 의하면, “무기징역 이하의 형을 선고토록 하여 확정판결과 동시에 형 집행정지로 구제활용 할 계획”이었음이 확인됨. (국정원자료No.47, 131쪽-국정원종합보고서544쪽)

▲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 공판대책’에 의해 구제계획을 마련해둠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안기부 주도 하에 정부기관이 총동원되다시피 한 김현희 구제 활용 대책 -국정원종합보고서 [자료사진 - 서현우]

▷ 이로서 1차 공판도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면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는바, 이는 명백히 사법권 침해에 해당함.

▷ 대법원 확정판결(1991.3.27)과 이틀 뒤의 법무장관 사면 상신에 이어 약 2주일 후의 국무회의 심의 및 대통령 재가는 결국 안기부 시나리오에 따른 ‘눈 가리고 아웅’이었음.

5-2. 당시 1, 2심 재판부는 일부 희생자 가족에 의한 안기부수사발표내용의 의문점 제기와 물증요구를 법정소란이란 이유를 들어 희생자 가족들의 방청을 제한함.

▷ 방청석의 대부분은 공안관계자로 채워졌음.

▲ 방청객의 제한을 예고한 재판준비 보도 [자료사진 - 서현우]

5-3. 김현희는 1심 2차 공판에서 외국어 실력을 확인받기 위해 증인으로 참석한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관의 통역으로 신문에 응함.

▷ 김현희는 법정에서 일본어, 중국 보통어, 광동어엔 능통하지만 영어는 조금밖에 구사하지 못한다고 진술함. (재판기록316쪽)

▷ 그런데 영어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광동어에 의한 법정신문은 없었음.

▷ 당시 중국어 통역을 맡았던 난신곤 화교협회 부회장은 “김현희가 사용한 중국어는 보통어인 북경어뿐”이었다고 증언함. (MBC뉴스데스크1989.3.21자)

▷ 또 재판을 방청한 조용은 당시 NHK방송 기자는 “김현희의 일본어는 구어체가 아니라, 문어체였다”고 증언함. (MBC뉴스데스크1989.3.21자)

▷ 당시까지 김현희는 일본어를 10여 년 간 학습했으며, 특히 7년8개월간의 집중적인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음.

<앵커: 정상하 부장 판사는 오늘 재판에서 김현희의 어학 능력을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을 내세워 가족 사항과 폭파 경위 등에 대해서 직접 물어봤습니다.

● 난신곤 (화교협회 부회장): 광동어가 아니라 표준어를 사용했습니다. 잘 하는 편입니다.

● 조용은 (일본 NHK 기자): 굉장히 잘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전공으로 배운 일본어이기 때문에 말하는 투가 표준말은 표준말인데 회화체가 아니고, 문어체로 대답을 했습니다. - MBC뉴스데스크>



6. 가족회와 법정에서의 참회와 반성, 다짐을 무시한 김현희의 현 상황

6-1. 김현희는 사면 후 공무원, 회사, 사회단체 등 전국에 걸쳐 왕성한 반공강연 활동을 하다,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직후 (10일 후) 전격 결혼과 함께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잠적함.

6-2. 김현희는 잠적하기 직전, 결혼을 5일여 앞둔 1997.12.23 KAL858가족회에 “평생을 희생자 가족과 함께 서로 도우며 살아가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남김.

▲ 김현희의 KAL858가족회에 대한 각서 [자료사진 - 서현우]

▷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 KAL858가족회는 김현희와의 단 한 번의 만남도 가지지 못함.

6-3. 김현희는 여러 진술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건의 진상을 바로 알리는데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함.

▷ 1997년 말 잠적 이후 10여 년간이나 진상규명을 피해 숨어 지내던 김현희는 최근 보수언론의 막후에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는데 정작 역사의 증인으로서의 책임과 의무엔 침묵하고 있음.

▷ 특히 2003년 이후 KAL858기 사건에 대해 광범위한 의혹이 제기되고 국가기관이 이 사건 재조사에 나섰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김현희는 진상규명을 극력 회피해 왔음.

▲ 법정에 제출된 김현희의 반성문 [자료사진 - 서현우]
▲ 김현희의 참회 -김현희 자필진술서 [자료사진 - 서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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