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철 기(동국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미국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대화 재개를 선언했지만 예상했던 대로이다. 북한과 진심으로 대화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북한에 대화 제의를 하면서 당근을 내밀기는 했지만 북한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썩은 당근`을 내놓고 받을 것을 강요하고 있는 꼴이다.  남북관계의 진전을 일정 수준에서 억제하고 한국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어느 정도 제동을 거는 정책으로 나가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부시의 북한 재래식 군축 협상조건은 `썩은 당근` 제시

특히 북한의 재래식 군축과 전방배치 북한군의 후방이동을 새로운 협상조건으로 내놓았다. 이는 사실상 북한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한반도 재래식 군축문제를 왜 미국이 나서서 북한과 협상해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는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대체 미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국제적으로 부각시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MD계획 등의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군축을 포함해 군사적 문제에 대한 협상이 남북의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는 주한미군 철수 내지는 변화에 대한 대응적인 측면이다. 
 
그 가운데서도 주한미군문제와 연관시키고 있는 대목이 특히 관심을 끈다. 이것은 그동안 미국이 검토해온 주한미군 개편 계획과 관련시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의 연구소들과 펜타콘에서 아시아 주둔 미군의 개편에 대해 연구해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공개된 `랜드연구소`의 보고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보고서는 "한반도의 화해기류가 진전될 경우 주한미군 2사단 병력의 일부를 철수하고, 오산과 군산 공군기지 가운데 한곳을 폐쇄할 준비를 해야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작년 9월 29일자 <워싱턴 타임즈>도 비슷한 보도를 한 바 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의 감축 내지는 철수를 검토하는 연구를 미 국방부와 태평양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향후 5년 안에 "아시아 주둔 미군의 구성에 관한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 아시아 지역내 미 군사력에 손실을 초래하지 않는 범위에서, 전함과 공군력, 신속배치지상군을 활용하는 방향에서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을 감축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연구는 주한미군 제2사단과 오키나와 주둔 미 제3해병대의 철수와 재배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새롭거나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북한 핵문제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주한미군은 극소수만 남겨 놓은 채 대부분 철수했어야 한다. 미국은 1990년대 초 [동아시아전략구상(EASI)] 보고서에 따라 주한미군의 3단계 감축안을 밝힌 바 있다. 1989년 7월 미 상원에서 통과된 [넌 워너(Nunn Warner) 수정안]이 배경이 된 이 3단계 감축안은 1단계에 따라 7천명의 주한미군이 감축된 채, 북한 핵문제를 빌미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 계획안대로라면 2000년에는 주한미군이 상징적인 수준만 남긴 채 철수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주한미군의 감축 내지 철수는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주한미군 제2사단의 감축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첨단장비의 추가 도입과 해공군력의 강화로 주한미군의 전체전력은 오히려 증강될 가능성이 있다. 주한미군 감축안에는 이 조건이 항상 밑에 깔려 있다. 이것이 문제다.
 
이러한 협상을 북한이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재래식 군비의 감축과 전진배치 군사력의 후방 이동은 북한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북한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소리와 똑같다. 북한이 전력을 전진배치 시키고 있는 것은 한미연합군의 공세적 전략에 대한 대응적인 측면이 크다. 제공권과 후방지원능력이 절대 열세인 북한으로서는 군사력을 가능한 한 전진배치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 미군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군을 한미연합군과 밀착시켜 배치해야 한다.
 
더구나 미국의 북한 재래식 무기 감축 요구는 이율배반적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F-15전투기 40대를 도입하는 F-X계획을 비롯해 대규모 무기구매를 강요하고 있다. 한국은 금년부터 2006년까지 `중기국방5개년계획` 기간동안 무려 34조 5,103억원을 무기구매에 쏟아 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주한미군 감축은 남북한 군축을 위한 전제 조건일 뿐
 
북한의 재래식 군축을 협상주제로 삼겠다는 미국의 요구는 일종의 `물귀신 작전`으로도 보인다. 미국의 군사전략 변경으로 주한미군의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북한을 끌고 들어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주한미군문제가 급속히 진전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문턱(threshold)`을 만들어 놓으려는 의도로도 해석된다.   
 
북한의 재래식 군축과 전진배치 군사력의 후방이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주한미군의 일부 감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한반도 전체의 군사력을 감축하는 차원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질 문제다. 남북한의 전체적인 군축협상이 이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남북한이 협상주체가 되어야 한다. 또 북한의 안전보장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고는 북한이 군축협상에 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성격 변화는 남북한 군축과 교환할 협상카드가 아니다. 남북한 군축이 이루어지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이다. 주한미군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남북한의 균형군축은 불가능하다. 군사력이 한국에 뒤쳐지고 있는 상황에다, 여기에 더하여 막강한 전력을 보유한 미군이 남쪽에 버티고 있고 유사시 수십만의 증원군이 언제라도 동원될 수 있는 군사력의 심한 불균형 상태에서는 북한이 군축협상에 응할 리가 없다.


<약력>
 
57년 인천 출생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경실련 통일협회 이사
한국동남아학회 섭외이사
국회 평화통일포럼 자문교수
통일교육협의회 이사
KBS 객원해설위원
[화해와 전진 포럼] 창립발기인 및 운영위원

<저서>

{동국아군축론}
{21세기 국제관계와 한반도}(공저)
{현대지역정치론}(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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