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출신 장기수 정관호(82) 선생의 시와 사진으로 된 연재물을 싣는다. 시와 사진의 주제는 풀과 나무다. 선생에 의하면 그 풀과 나무는 “그저 우리 생활주변에서 늘 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풀이요 나무들”이다.
6.25한국전쟁 당시 재산기관지 <전남 노동신문>의 주필이었던 선생이 이념이나 주장이 아닌 시와 사진을 통해 나타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통한 민족사랑, 민중사랑이 어떻게 표현될까? ‘풀 친구 나무 친구’ 연재는 매주 화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풀 친구 나무 친구> 연재를 시작하면서
나는 식물학자도 아니요, 그 분야의 깊은 연구가도 아니다. 다만 그 식물군이 오래고 오랜 동안 우리 주위에,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다는 깨우침에 끌려들어 그에 다가갔을 뿐인 아마추어다.
까마득한 옛날, 우리네 조상들이 이 땅에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훨씬 이전부터 널리 뿌리내리고 살았을 그들. 우리네 할아버님들이 그것으로 먹고 입고 움집을 엮었을 그 풀과 나무들.
“으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마치 모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짐짓 눈감고 살았구나.”
때늦은 후회가 일었다. 그래서 작심하고 풀밭과 숲속을 헤가르며 다녔고, 식물원 표본밭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눈높이와 발부리에 다가드는 그들 사이의 차이를 눈여겨보면서,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저것은 다른 또 그것과는 어떤 관계인가. 세심히 그 표정을 읽으면서 적고, 그리고, 사진 찍었다. 이름을 외는 일부터가 어려웠고, 시일이 지나 갈래가 복잡해지면서는 힘에 부쳤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덧 그들과는 트고 지내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내가 지그시 바라보면 그쪽에서도 화답하는 교감의 세계. 그것을 실감하는 일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 주고받음의 회로를 나는 글로 옮겨보았다. 테마 시집 <풀 친구 나무 친구>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1999년). 내가 하고자하는 딴 일에 등을 떠밀려서 그 재미있는 작업을 더 계속하지는 못했다.
이제 들풀과 숲나무에 대한 인식들이 웬만큼 높아진 현실에서 좀 색 바랜 느낌이 들지만, 키워온 자식 드러내는 심정으로 하나씩 소개하기로 한다.
실지로 원산지에 가보지 못한 고산식물이나 특수식물은 논외로 한다. 그저 우리 생활주변에서 늘 보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풀이요 나무들이다. <풀 친구 나무 친구>를 중심으로, 그밖의 시집에 담았던 것 가운데서 추려 뽑겠다. 되도록 사진과 글과 계절의 추이가 맞물리도록 유념하겠다. / 정관호
▲ 흰꽃 수련 [사진-정관호]
수 련
물 밖으로 팔다리를 뻗고 떠서 긴 여름 시원한 물놀이
그러다가 예고도 없이 여기 한 송이 저기 한 송이 희고 붉은 꽃을 내뿜는다
지키고 있으면 볼 수 있을까 망울이 수면 위로 솟아올라 꽃이파리 양산 펼치는 순간을
한낮 조용히 해받이를 하다가 이슥히 해가 기울면 열었던 꽃이파리 끌어다 접고 소롯이 잠자리에 든다*
늦여름이면 더 일찍 잠을 깨어 잠자리와 벗놀이를 하다가 차츰 여물이 들면서 몸이 무거워져 천천히 물 아래로 깊이 잦아든다
백내장으로 가려지는 눈을 비비며 꽃이 문을 여닫는 소리를 한평생 색깔로 쫓은 화가 모네
꼭 그가 아니더라도 수련이 피는 연못 가에 앉으면 마음 안녘 깊은 갈피에 차곡차곡 쌓이는 꽃잎이 있다.
* 그래서 한자로는 수련(睡蓮)이라고 쓴다.
▲ 붉은꽃 수련 [사진-정관호]
저자 소개
1925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남. 원산교원대학 교원으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으로 전라남도 강진에 내려왔다가 후퇴하지 못하고 빨치산 대열에 가담. 6.25전쟁 당시 재산기관지 ‘전남 노동신문’ 주필 역임. 1954년 4월 전남 백운산에서 생포되어 형을 삶.
저서로는 음악 오디오 에세이집 『영원의 소리 하늘의 소리』,『소리의 고향』이 있고, 시집들 『꽃 되고 바람 되어』,『남대천 연어』,『풀친구 나무친구』,『한재』,『아구사리 연가』, 역사서『전남유격투쟁사』, 장편소설 『남도빨치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역편저가 다수 있다.
늘 가까이서 보고 있던 풀과 나무들에 대한 연재를 한다니 반갑고 또한 그것이 장기수선생님이신 정관호 선생님의 시를 바탕으로 한것이라니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통일관련뉴스를 중심으로 다루는 통일뉴스가 따듯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기사들을 쓰고있다는것을 새삼확인하는것 같아 기쁜 마음입니다. 통일뉴스의 발전과 정관호 선생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다시한번 연재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