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표지.
지난 7일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 원장 손석춘)'에서 『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을 출간했다. 책에서는 1997년 이후(또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한국사회 변화를 소개하고 각계각층의 처지에 대해 실증적으로 분석해 놓고 있다. 아래에서는 위 책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과 의의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지적해 보겠다.

1987년과 2007년

1980년대 중후반 진보진영의 주요 화두는 주로 분단의 시원과 미국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화하는 과정, 미국 특히 주한미군이 가진 지위와 역할 등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1980년대 중후반의 진보진영의 새로운 문제의식은 소박한(?) 민주화운동에 머물러 있던 운동을 분단과 통일, 종속과 자주의 문제를 포괄하는 새로운 차원의 변혁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여기서 비롯된 진보진영의 유력한 세력이 세칭 '자민통'으로, 자민통 진영은 이후 자주통일운동을 주도하며 진보운동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위 책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정보화사회(지식기반사회)와 신자유주의를 중심으로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구체적인 통계와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소개한다.

요약하자면 한국사회는 외국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최신의 주주자본주의로 변모했으며 그 영향 아래 노동자화.도시화.금융화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하여 구체적으로 노동자, 농민, 대학생, 소상인의 삶과 처지에 대해 분석한다.(이 책의 핵심이 이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여성과 세대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점인데 세대의 문제는 우석훈씨가『88만원세대』에서 다룬 바 있다)

필자는 위 분석에 대해 거의 동의한다. 새사연의 문제의식은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 사실의 문제이다. 문제는 후발 주자에 가까운 새사연에서 이런 작업을 진행할 정도로 기존의 진보진영이 게으르거나(자민통) 사변적인 논쟁(주로 강단 좌파)에 휩싸여 있었던 점이다. 그런 면에서 새사연의 작업은 늦었지만 우리 운동의 귀중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다.

실천적인 함의

2007년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분석은 2007년 대선에 이르는 시기 운동 진영의 실천이 어떤 결함을 갖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주주자본주의가 인력배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에 따라 대기업은 고용을 축소했다. 특히 신규 사원 채용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처한 어려움과 비정규직 운동의 중요성을 잘 설명해 준다.

2002~2007년 농민운동이 벌인 대규모 서울 상경투쟁은 농민.농촌의 해체 과정과 잘 맞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전농이 농업과 농민의 문제를 계급.계층적 요구가 아니라 전국민적 성격의 운동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통일운동 중심의 학생운동이 대학생들의 처지와 어떻게 괴리되어 있는가, 대도시 소상인들이 왜 상인카드 수수료 운동에 대규모로 동참하고 있는가, 최근 중소기업인들이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하고 있는가의 문제 또한 위 책에서 밝힌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책은 2008년 이후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는 진보진영의 소중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90년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가 진보진영의 대중적 교재였다면 이 책은 2008년 이후 한국사회운동의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무엇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는가?

위 책의 출간을 지켜보면서 필자가 갖고 있는 의문은 왜 2006년 출범한 새사연이 이런 작업을 주도할 수 있었는가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왜 기라성 같은 기존 진보진영이 이런 작업을 하지 못했는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주로 자민통 진영을 중심으로 이에 대해 나름대로 언급해 보겠다.

첫째. 학습을 경시하는 풍토 특히 자기 머리로 사고하는 관점의 약화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화한 반면 운동진영은 이를 추적하는 노력을 경시하고 단순 행동주의로 빠져 들었다. 이를 부채질한 것인 교과서적인 문헌에 대한 집착(?)이다.

반면 2006년 설립된 새사연은 불과 1~2년 사이에 놀라온 연구 성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새사연이 2006년에 펴낸 첫 번째 책 『새로운 사회를 여는 상상력』이 다소 서툰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면 불과 1년 남짓한 시간에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는 사상과 지식에 대한 열정과 자기 머리로 사고하려는 기풍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둘째. 써클구조와 사상적 경직성의 문제이다.

인맥에 기초한 써클구조가 사상적 개방성, 다양한 주장에 대한 소통 구조를 가로막고 폐쇄적인 지적 풍토를 만연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조금만 생각이 달라도 개량주의니 수정주의니 하며 백안시하는 소아적 풍토가 결합하여 문제를 악화시켰다.

셋째는 현실에 기초하여 미래를 지향하는 태도가 약한 것이 문제이다.

자민통 진영의 이론체계는 지금의 현실을 있게 한 과거에 착목하는 경향이 있다. 사고의 구조가 ‘현재→사고’로 짜여있는 것이다. 이는 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의 뿌리를 파헤쳐야 했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진보는 언제나 과거보다는 현재 그리고 현재보다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이다. 새사연의 성과는 과거가 아니라 한국사회 현실 중에서도 금융, 고용과 같은 최신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민통 주류 집단의 구조적인 비대중성이다.

사실 새사연의 문제의식은 2008년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 모습이다. 펀드, 해외 여행, 영어 연수, 청년실업과 소상인의 문제 등은 그냥 2008년을 살아가는 생활인의 모습 그 자체이다. 반면 자민통의 일부는 대중과의 연계 고리가 취약한 채 1980년대 중반의 관념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1930년대 만주이야기를 뛰어 넘을 때가 되었다.

이후 과제와 토론 지점

이 책의 핵심은 2007년 한국사회의 실상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소개하는 것이지만 몇 가지 의미있는 과제와 토론지점을 제출해 놓고 있다.

첫째는 지식기반사회와 신자유주의가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보다 근본적인 대안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항적 주체가 아닌 대안적 주체, '87년 체제'의 질적 발전이 아니라 '97년 체제'의 혁파, 자본가 중심의 지식노동이 아니라 노동자 중심의 지능노동 등 흥미있는 토론 지점이 곳곳에 숨어 있다.

둘째는 이후 대안 의제와 관련하여 고용, 금융, 정치개혁, 재벌, 중소기업, 농업, 교육, 부동산, 보건, 통일 등 10가지 문제를 과제로 적시하고 있는 바 이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대한다.

필자가 제기하고 싶은 것은,

첫째. 1980년대 중후반 자민통 진영의 연구성과와 새사연의 연구성과를 어떻게 발전적으로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위 책에서도 “한국의 사회경제가 신자유주의로 전환된 후, 그 이전과 비교하여 한미관계가 어떠한 이해관계로 변동되었는지 검토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분석하고 이와 관련하여 전통적인 정치군사적 이해관계의 변화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방식의 분석자료를 찾을 수는 없었다”(위 책 415쪽에서)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시민이나 유권자 분석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담론이 필요하다고 제창하고 있다.(3.7 출판기념회에서 한 손석춘 원장의 강연) 이는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그런데 그와 함께 민중이 딛고 서야할 정치적 범주.주체의 문제도 동시에 검토되어야 하지 않을까? 근대 국민국가를 구성하는 정치적 원리가 자유주의인가 사민주의인가 그리고 이를 실현할 주체는 시민인가 민중인가 그리고 국민국가와 민중은 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등등. 이런 차원에서 보면 민중담론의 복원과 함께 세계화된 세계 속에서 국민국가, 민족, 범지역적 공동체 등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구 좌파'

'수구 좌파'라는 말이 있다. 모욕적인 말이긴 하지만 필자는 위 표현에 대해 부분적으로 동의한다. 최근의 자민통 진영은 생각과 행동은 좌파적이지만 사고방식이나 발상은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색채가 있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점, 통계.실증적인 자료와 현실에 둔감한 점, 변화와 새것에 대한 탐구심이 고갈된 점, 사상에 대한 경직된 태도 등이 그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사연의 이번 성과물은 신선하고 새로운 것이다. 모든 관념과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살아있는 현실이다. 새사연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를 뛰어 넘는 제 2의 사상혁명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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