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와 함께 운동은 대단히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다. 운동은 해당 정세의 사회경제적 조건, 대중의 심리 상태를 투명하게 반영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운동을 둘러 싼 주변 정세를 민감하고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주로 지난 20년의 기간 동안 대학생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학생운동 진영의 대응에 대해 평가해 보고자 한다.
85~89년 학생운동의 전성기
84년 전두환 정권이 일시적인 유화정책을 펴자 순교자적인 저항을 하던 학생운동은 대도약하기 시작했다. 85년 미 문화원 점거, 87년 6월항쟁, 89년 임수경 학생의 방북 등 학생운동은 불과 4~5년 사이에 한국사회의 모든 금기를 뛰어 넘어 학생운동을 그야말로 ‘구국의 강철대오’로 발전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첫째, 86~89년 한국경제가 호황이었다는 점과 둘째, 중산층의 성장과 군부독재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80년대 중반 이전 수출은 대부분 저임금에 기초한 출혈수출이었다. 86~89년 3저호황을 배경으로 현대.삼성.대우 등 대자본이 성장하며 경제적 이익을 실현했고 그 이익의 일부가 국내로 흘러들었다. 이를 계기로 성장한 중산층은 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에 대한 환멸을 공공연히 표출하였다.
80년대 중후반 학생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중간층의 민주화 욕구, 민중의 억눌린 삶을 대변하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96~97년 학생운동의 갈림길
96~97년 대학생운동은 96년 연대항쟁, 97년 한총련 출범식을 거치며 커다란 좌절에 직면한다. 이로부터 한국변혁운동의 선봉대였던 학생운동은 이적의 굴레에 묶여 침체와 퇴보의 길을 걷게 된다.
연대항쟁과 한총련 출범식에 대한 평가가 오늘의 주제는 아니다. 필자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96~97년 학생들의 저항이 밑으로부터 변화하고 있는 대학생 및 한국사회의 흐름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96~97년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운동진영의 기조는 89년 이후 한국학생운동의 주류로 떠오른 민족자주.연북 노선에 기초한 조국통일운동이었다. 그리고 85~89년 학생운동 전성기에 형성된 대중적 지반은 96~97년까지도 공고히 유지되고 있었다.
반면 92년 인테넷 보급, 서태지의 등장, 93년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세계화, 학부제 도입과 신규 대학의 난립 등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 중심의 일극질서가 고착되어 있었고 사회전반에 안온한 중산층 문화가 확산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96~97년 학생운동은 김영삼 정권의 무단적인 탄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시대착오적인 김영삼 정권의 강권적인 탄압이 문제였지만 운동의 교훈을 찾는다는 관점에서 보면 학생운동과 대학생사회에 가로 놓여 있었던 괴리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99~01년의 머니게임과 대학생사회의 변화
90년대말 20세기 초 대학생사회에 놓인 객관 환경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2001년 부시 행정부의 등장으로 조국통일정세는 일시적인 조정기로 접어들었다. 조국통일정세가 다시 극적인 양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2월 북이 핵보유선언을 한 이후이고 2005년 시작된 정세의 격변기는 2007년 후반기부터 가시적인 양상을 띠며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대학생들은 조국통일을 조만간 도래할 태풍 전야의 시기로 이해하기보다는 느슨하고 완만한 협상국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서태지의 노래와 세계화의 감성에 익숙한 세대였던 만큼 느슨하게 진행되는 조국통일정세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이 주장하는 6.15시대, 조국통일대사변기라는 시대 규정이 그다지 호소력있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둘째,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에 따른 경제적 좌절과 박탈감이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는 87~97년이다. 현재의 대학생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아니면 그러한 분위기속에서 자랐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사회의 예외적인 호황기에 형성된 의식과 문화가 심성의 가장 밑바닥에 형성되어 있다.
한편 이들은 98년 IMF가 밀어닥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99년~01년 한국경제의 거품기에 잠시 고통에서 벗어났다가 2002년 이후 내수 침체기를 맞으며 끝없는 미로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들은 취업, 등록금, 아르바이트 등 구체적인 경제적인 압박과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반면 87~97년 좋았던 시기에 형성된 심성 구조가 이들의 내면을 장악하고 있다. 이 괴리가 청년실업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예외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만든 원인이 아닐까?
상황을 이렇게 보면 01~05년 무렵 전국의 대학에서 벌어진 등록금 인상투쟁의 동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일점을 돌파하는 ‘영웅적인’ 승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했다. 대중운동에서 승리가 중요한 것은 90년대 초반 세종대, 조선대에서 벌어진 학원민주화투쟁의 승리가 해당 대학에 미친 영향에서도 잘 나타난다.
쟁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논점을 진전시켜 보면 90년대 중후반 이후 대학사회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을 때 학생운동진영은 한번쯤 학생운동의 명운을 걸고 이에 대한 정면 승부를 걸어야 했다. 즉 봄에는 등록금 투쟁을 하다 적절한 시점에 조국통일운동으로 이동한다는 식의 느슨한 발상으로는 대학생사회의 변화는 물론 대학생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적나라한 적자생존의 논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친기업, 강자 독식의 세계관에 젖어들었다.
98년 IMF가 밀어닥치자 극심한 경기불황에 빠져들었던 한국경제는 99년 이후 막대한 경상수지 흑자, 외자 유입, 가계대출 증가로 급속한 유동성 확장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99~01년 냉정하고 잔인한 머니게임이 시작되었다.
주식시장에서 삼성전자 등 대기업 우량주에 투자한 외국인들이 막대한 이윤을 챙긴 반면 국내 기관투자가들은 그보다는 적지만 나름의 이윤을 얻었다. 외국인들과 국내 기관투자자들이 얻은 만큼 국내 개인 투자자들은 돈을 잃었다. 부동산시장에서 한국의 졸부들은 02년을 정점으로 한 부동산 광풍 속에서 미증유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주식과 부동산에서 잔인한 머니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한편에서 1~2억의 명예퇴직금을 갖고 거리에 나와 호프집, 치킨집을 차린 40~50대의 순진한 중년 남성들은 내수 침체와 자영업의 과다 경쟁 속에서 돈을 잃었다. 외자가 장악한 은행은 기업대출보다는 무분별한 가계대출.카드대출에 집중했고 당장의 ‘단맛’에 익숙한 서민대중은 2002년 경기 거품이 지나고 난 후 막대한 빚에 몰려야 했다.
99~01년 머니게임은 총칼이 지배하는 강권과 폭력의 세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화와 금융에 민감하고, 고급정보에 익숙한 ‘세련된’ 고학력 부유층과 ‘구질구질한’ 구시대에 머물러 있는 저학력 서민대중 사이의 경쟁이었다. 광풍이 지나고 난 후 한편은 주체할 수 없는 부를 거머쥐었고 다른 한편은 감당하기 어려운 빚더미와 생활고에 빠져 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학생들은 승자독식, 우승열패, 강자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삼성과 이명박 신드롬이 퍼진 것은 이러한 환경의 산물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낭만과 지성의 전당으로 보였던 균질적이던 대학생집단은 서울의 명문대학, 서울의 사립대학과 지방국립대학, 지방대학으로 확실하게 서열화되었고 이 서열을 가르는 선은 대학생 자신이 아니라 부모의 출신 성분 즉 99~01년의 머니게임에서 승리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양심과 지사적 결단에 호소하는 학생운동의 호소와 감성은 주류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주변화되었다. 이 시점이 되면 한총련은 정권의 탄압에 무너졌다기보다는 학생대중으로부터 잊혀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 만큼 학생운동의 주변화는 심각했다.
96~97년 학생운동의 좌절이 상대적으로 김영삼 정권의 무단적인 탄압에 책임이 있다면 90년대말 이후 학생운동의 침체는 대학생사회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한 학생운동 자신의 책임이 크다.
운동은 대중의 이해와 요구에 근거하여 대중 자신이 벌이는 것이다. 노농 등 계급적인 대중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운동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현재의 학생운동은 대학생 사회의 변화를 관찰하고 대중의 눈높이에 서서 그들과 호흡을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운동의 선봉대라는 과도한 책임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 하다.
민경우 전문기자
tongil@tongilnews.com


여기에서 계속 딜레마가 발생하게 됩니다. 학내투쟁에서 학교의 책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책임또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학교에서 투쟁해도 확실한 승리라는 느낌이 없고, 정부투쟁으로 하자니 밑에 분이 말한 것 처럼 진보운동 전체로도 버거운 사안이 되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