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이달 말 북한에 쌀을 차관으로 제공하기로 한 것을 유보한 것과 관련해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자꾸 반복해서 일어날까 하고 어리둥절하고 있던 참에 이같은 유보결정이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한겨레신문 28일자 보도를 접하고는, 만약 사실이라면 아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이같은 유보지시가 부시 미국 대통령과 2.13합의 직후 한 ‘약속’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어떤 허탈감과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분명 노 대통령의 대북 쌀 차관 제공 유보지침은 2.13합의(6자회담)와 ‘연계’한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민족내부문제를 외부문제와 연계한 것이다. 그것도 남북간 인도주의적 문제를 북미간 정치군사적 문제와 연계한 것이다. 이같은 연계는 다음 두 가지 점에서 결정적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하나는 대북 쌀 차관 제공 연기 이유로서 북한의 2.13합의 불이행을 든 점이다. 과연 2.13 합의 이행 지연이 북한측 책임인가? 지금 현안은 방코델타아시아(BDA) 자금의 북한으로의 송금 지연이다. 그러기에 북한측은 아직 돈을 손에 못쥐고 있다. 따라서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BDA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그를 해결하기로 한 미국측에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책임소재를 따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이번 대북 송금 지연이 누구의 탓이라고 하기에는 불가측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고 따라서 책임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모두가 해결 방책에 골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던 참에 정부의 대북 쌀 제공 연기는 결국 북한측에 책임을 따지는 것인데, 이는 방금 살펴봤듯이 전혀 상황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이다. 오죽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조차 “북한은 2.13합의를 지키겠다고 하고 있는데 우리가 쌀을 안 주면 북한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되묻지 않았는가?

다른 하나는 이같은 ‘연계’가 미국측 입장을 충실히 대변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남북철도 시험운행으로 남북관계가 급작스레 개선될 조짐을 보이자 미국측 고위관리들이 앞다퉈 ‘남북관계 속도조절론’과 ‘남북관계와 6자회담 병행론’ 등을 들고 나오는데 이는 분명 내정간섭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미국측의 내정간섭에 한국정부가 너무 쉽게 굴복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인 2003년 5월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4개항으로 된 공동성명에 합의했는데 그중 독소조항의 하나가 “노 대통령은 향후 남북교류와 협력을 북한 핵문제의 전개상황을 보아가며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는 구절이다. 당시 이 구절을 두고 ‘북핵 해결과 남북교류의 병행추진 전략이 연계전략으로 바뀐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렇다면 노 정부 초기의 ‘남북관계-6자회담’ 연계가 말기에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는 단순하고 명확한 사안일 수도 있는 대북 쌀 제공 문제와 관련 ‘사실(fact)'에도 어둡고 외세에도 굴복하고 있다. 한마디로 무지(無知)하고 무력(無力)한 정권이라 아니할 수 없다. 지난 17일 경의선ㆍ동해선 남북 철도 시험운행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본격적인 봄바람이 불기를 기대했는데 정부당국의 이같은 무지하고 무력한 처사에 남북관계가 어디로 튈지 걱정이 된다. 아무리 남북관계가 우여곡절이 많고 아슬아슬하다지만 이같이 해서는 안 될 일로 곡예를 타야하니 정부당국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침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이 29일 서울에서 나흘 간 일정으로 열린다. 북한은 장관급회담과 6자회담은 별개라고 보기에 일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올 것이다. 그러나 쌀 문제는 장관급회담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에 어떤 식으로든 따질 것이다. 철도 시험운행을 계기로 속도를 더 내야할 남북관계에 쌀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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