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후반, 홍명희와 김규식이 중도파를 중심으로 단선반대 세력을 결집하고 있을 때, 남한 우익 진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균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균열의 조짐은 이미 1947년 중반부터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으로 확고히 방향을 굳힌 반면, 김구는 여전히 `임정법통론`에 의한 정부수립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조건에서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미소공동위원회가 파탄나고 한국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가면서부터였고, 12월 2일 한민당 총무 장덕수 암살 사건이 나면서 둘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유엔에서 `한국총선거안`이 결정되자 김구의 한독당은 11월 중도파 연합의 `정당협의회`에 참가해 이승만의 조기 단독선거에 제동을 걸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장덕수 암살사건이 일어나자 이승만과 김구의 합작에 비판적이었던 한민당은 미군정이 배후로 지목한 김구를 거세게 몰아세웠습니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이를 수수방관한 채 12월 15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과 선거를 협의할 `한국민족대표단`을 일방적으로 구성합니다. 김구가 곤궁에 처한 것을 이용해 이승만과 한민당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합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김구는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 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즉각 해산`을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 합작 논의가 진행됩니다. 그러나 1948년 1월 16일 `지도이념의 차이`와 `영도권 문제`로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합니다.(도진순, 앞의 책, 152∼166쪽)

1947년 하반기의 김규식과 홍명희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연맹 결성과 이승만·김구 사이의 균열, 이것으로 단독선거를 위해 김구와 김규식이 합작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남한 정치세력 내부의 합종연횡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엔 한위가 서울에 도착했고, 국제호텔에 본부를 두고 3개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유엔 한위와의 면담에서 이승만은 남조선 과도정부의 `중도파 지원 정책`과 `공산주의자의 테러`를 비난하면서 남한의 조기 선거를 주장합니다. 반면 김구는 김규식과 사전협의를 거친 뒤 `남북 정치요인의 협상`과 `전국총선거`를 주장했습니다. 유엔 한위와의 면담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한민당과는 달리 단선단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던 것입니다.

김구의 주장에 대해 한민당은 김준연이 기초한 성명서에서 김구를 "크렘린의 신자"라고까지 매도하면서 비난합니다. 한민당의 이런 비난에 대해 김구는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로 답했습니다. 성명서에서 김구는 단정세력과 한민당을 박테리아에 비유하면서 격렬히 비판합니다.

"미군 주둔 연장을 자기네의 생명 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없이 통일정부 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하여 단선 단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며 유엔위원단을 미혹케 하기에 전심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난익(卵翼: 보호) 속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명찰하는 선각자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 일진회식의 선각자일 것이다." 
   
이로써 신탁통치 반대로 결집했던 남한 우익 진영은 단독정부노선과 통일정부노선으로 확연히 갈라섰습니다. 이승만·한민당과 갈라선 김구는 그동안 단선에 반대하고 있던 중도세력과 손을 잡게 됩니다. 이로써 남한 내에서 통일정부를 향한 새로운 흐름을 추동할 남북협상파가 힘을 갖게 됩니다.

1948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발송합니다. 김일성에게 보낸 것과 김두봉에게 보낸 것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그 둘을 종합하면 서한의 요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첫째, 민족의 분열과 완전통일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순간에 민족국가를 위하여 평생을 노력해온 애국자들이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아무리 외세의 제약을 받고 있는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 일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지리멸렬하면 우방의 호의도 접수하지 못한다.
셋째, 남북 정치지도자간의 정치협상을 통하여 통일정부 수립과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자.
넷째, 이를 위해 남북은 각각 남북정치협상에 찬동하는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대표를 선출하자."

김구와 김규식이 `2월 서신`에서 제안한 남북회담의 특징은 "4김(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남북 정치지도자들 간에 정치협상을 하자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남북이 각각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해 협상대표를 선출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김구와 김규식은 회담의 기조를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한다는 `자주적 입장`과 더불어 `우방의 호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국에는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북한의 입장과 분명히 차이가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한에 정치협상을 제안해 놓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단선을 향한 발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었습니다.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정하였고, 3월 1일 하지는 선거일자를 5월 10일로 발표합니다.

그러나 2월 28일 김규식은 유엔 소총회 결의에도 불구하고 남북회담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으며, 김구는 한독당의 3·1절 기념식에서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다"며 남한 단독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피력하게 됩니다. 홍명희도 2월 29일 남한 단독선거 불참을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동시에 이들은 남북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3월 2일부터 4일까지 김구·김규식·홍명희는 수 차례 극비회동을 통해 단선단정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모색했고, 그를 바탕으로 3월 12일 김구·김규식·김창숙·조소앙·조성환·조완구·홍명희 등의 `7거두 성명`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로써 남북협상파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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