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북미간 BDA회담이 결론 없이 다음 회기로 넘겨지게 됨에 따라 지난 18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5차 6자회담 2단계회의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참가국들은 22일까지 예정된 회기를 연장하며 막판 공동문서 작성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지만 북측이 선결조건으로 내세운 금융제재 문제가 이후로 넘겨짐에 따라 9.19공동선언 이행에 관한 합의도 다음 회기로 넘어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북측은 개막식 기조연설부터 일관되게 미국의 BDA 금융제재를 포함한 제재 해제를 북미간 '신뢰'의 증표로 내세웠고 9.19공동성명 발표 당시로 돌아가 이행방안을 협의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만일 미국이 금융제재를 필두로 유엔안보리 제재와 미국 내의 대북 적대시 법.제도 등 온갖 제재를 지속하며 신뢰회복 조치에 나서지 않는다면 북한도 핵무기 보유국의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점을 북측은 18일 기조연설에서 일찌감치 밝혔던 것이다.
20일자 베이징발 조선신보 기사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다른 참가국 대표들에게 밝힌 조선의 비핵화공약리행의 로정도는 《현 단계에서 핵무기를 제외한 현존핵계획의 포기문제를 토의할수 있다.》는것으로 집약된다"고 북측의 이같은 입장을 전했다.
북측은 제재해제의 추이를 보아가며 9.19공동성명 이행에 관한 협상 수준을 정하려 했고 미국측의 제재가 여전히 엄존하고 있는 조건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한 핵보유국의 위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에서 협상에 임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5차 6자회담 2단계회의는 9.19공동성명의 포괄적 이행방안을 집중 논의하자는 미국측과 BDA회담에서 우선 진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북측이 맞선 형국이었으나 결국 북측의 의도대로 'BDA로 시작해서 BDA로 끝났다'. 9.19공동성명이 타결된 지난 제4차 6자회담 2단계회의가 경수로로 시작해서 경수로로 끝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번 회담을 평가해 보면 북한이 의제관리와 시간관리라는 협상의 기본요소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함으로써 시종 협상전술에서 우위를 점한 회담으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의제관리에서 북한은 6자회담과 BDA회담을 형식적으로는 동시에 진행하되 내용적으로는 '선 제재 해제, 후 9.19공동선언 이행방안 협의(후 비핵화 협상)'라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했고, 이는 BDA협상은 6자회담과 별개이며 9.19공동선언 이행방안과 그 초기 행동조치 논의에 주력하려는 미국측의 의도를 무력화시켰다.
9.19공동성명 채택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그 이행을 협의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금융제재를 거둬들임으로써 신뢰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논리적 타당성과 이를 관철시킨 북측의 상대방 의표를 찌른 협상전술이 빚어낸 결과이다.
북측은 일반의 예상을 뒤집고 BDA회담 단장에 오광철 조선무역은행 총재라는 국제금융전문가를 배치했고 BDA협상을 우선 의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6자회담과 연계시켰지만 그 외에는 철저하게 기술실무적인 차원으로 접근해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BDA회담을 정치적으로 연계시킨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 미국 대표단 대니얼 글레이져는 첫 회담 직후 '장기적 과정'(long-term precess)이 필요하다며 기술실무적 타결이 빨리 이루어질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실제로 BDA회담은 내년 1월경 뉴욕에서 다시 열려봐야 그 향방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측은 '일면 협상, 일면 제재'라는 양면전술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셈이고 북측은 그렇다면 신뢰에 기초한 핵무기 포기를 포함하는 6자회담의 포괄적 이행방안에 응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이 제재의 카드를 쥐고 있는 한 북한은 '핵무기'라는 카드를 계속 쥐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향해 아무런 협의도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핵무기를 제외한 현존핵계획의 포기문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시간관리에서 북측은 6자회담의 핵심인 북미간 양자협의와 BDA회담을 동시에 시작했고, 크리스마스 연휴라는 상대측의 한계시한을 적절히 활용했다.
예상과 달리 BDA회담 북측 대표단은 6자회담 개막식 다음날인 19일에서야 베이징에 모습을 드러냈고 6자회담 북측 대표단은 BDA회담이 시작되기 전까지 미국과의 양자협의에 나서지 않았다.
북측은 BDA회담이 끝났으므로 6자회담도 끝났다고 판단하고 있겠지만 미국측 대표단에게 남은 시한은 크리스마스 이브 직전인 23일까지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조건에서 굳이 먼저 판을 깼다는 비난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 22일까지 6자회담 지속에 동의해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 과정에서 9.19공동성명 이행방안을 둘러싼 미국측의 협상전술을 파악하고 미국측의 상응조치 이른바 '값 매기기'를 꼼꼼히 챙겨보는 과외 소득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미국은 물론 중국과 한국은 9.19공동선언 포괄적 이행방안과 그 첫 단계 행동조치를 확정하고 이를 추진해나갈 사안별 실무그룹 설치까지를 북측과 타결지으려 회기까지 연장하고 있으며, 특히 첫 단계 행동조치에 집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등이 추진하고 있는 6자회담 공동문건은 의장국인 중국의 리자오싱 외교부장이 20일 참가국 수석대표 접견에서 언급한 바 있는 △9.19공동성명 이행 의지 재확인 △대화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한반도 핵문제 해결 의향 재천명 △한반도 비핵화라는 공동의 목표 견지 재확인 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언적 내용과 6자회담의 유용성을 재확인하고 다음 회담 일정을 정하는 수준을 크게 뛰어넘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설사 부분적인 첫 단계 행동조치가 포함되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미국측의 보상조치가 제대로 짝을 이뤄야만 가능할 것이다.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동결 대 안전보장 서명' 수준으로는 북측이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이번 회담은 선 제재 해제라는 의제관리와 BDA회담을 19일에서야 시작하고 23일이라는 상대편의 한계시한을 적절히 활용한 북측의 시간관리 전술이 효력을 발휘한 협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 하나 이번 회담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4차회담 당시와는 달리 중국과 한국이 대체로 미국측 의제 설정에 동의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북한이 만류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강행한데 대한 불편한 심기가 어느 정도 반영돼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은 'BDA회담은 6자회담과 완전 별개'라는 미국측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9.19공동성명 이행방안과 초기 조치 합의에 주력했으며, '핵보유국 북한'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따라서 이번 회담과정에서 한국은 4차 6자회담 당시에 비해 중재력과 발언력의 현저한 축소를 드러냈다.
일본측 대표단은 줄곧 납치문제데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4차 6자회담 1단계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단 한차례도 북한과의 양자협의를 가질 수 없었다. 북 핵실험 이후 강경 대북정책이 아무런 외교적 실효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보인 것이다.
제5차 6자회담 2단계 회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 따른 대북 제재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핵보유국 북한이 처음으로 '선 제재해제'를 내세우며 협상에 임했고, BDA회담이 동시에 진행됐다는 점에서 사실상 기존 5차 1단계회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제6차 1단계회의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어쨌든 이번 회담은 BDA로 시작해서 BDA로 끝났고, 의제관리와 시간관리에서 앞선 북측의 협상전술이 돋보인 회담이었으며,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보다 세밀한 논의들이 검토된 유의미한 자리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6자회담이 제대로 된 성과를 내놓기 위해서는 아직 갈길이 멀다는 점을 확인한 자리이기도 했다.
회담이 짧게 끝나 다시금 장외에서 공방이 계속되겠지만 미국이 2008년까지 북핵문제의 일괄 해결을 진지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면 BDA회담을 철저히 실무회담으로 만들어 빠른 해결책을 추진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