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규(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 위원, KAL858기 진상규명 모임 카페 공동운영자)


불법의 군사반란과 반인륜의 시민학살로 등장한 제5공화국 신군부 체제하, 반독재 반외세 민주화, 통일의 염원과 바람으로 질풍노도와 같이 6월 민주항쟁을 폭발시켰던 1987년, 그 해 11월 29일 대통령 직접선거 투표일 보름을 앞두고 인도양 벵골만 상공에서 비극의 소식이 날아든다.

중동에서 근무하던 근로자와 승무원 등 115명의 탑승객을 태운 KAL858기가 실종된 것이다.

당시 전두환 군사정부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의혹의 두 일본인 여행객을 추적한 끝에, 음독 자살했다는 하치야 신이치(김승일)와 자살에 실패한 하치야 마유미(김현희)를 체포, 대선 투표일 하루 전 날 서울 압송에 성공한다.

1988년 1월 15일 안기부는 ‘북괴 정예공작원’인 김현희와 김승일이 일제 파나소닉 라디오로 위장한 시한폭탄을 이용, 미얀마 안다만 상공에서 KAL기를 공중폭파 시켰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사고 원인을 규명해 줄 블랙박스는 커녕, 실종자 유품, 시신 한 구 찾지 못한 어처구니 없는 전대미문의 의혹사건으로 남겨졌다.

동 사건은 김현희, 김승일이 KAL858기를 폭파시켰다는 직접적인 ‘물증’ 하나 없이, 안기부 밀실에서 이루어진 김현희의 ‘진술서’와 ‘자백’에만 의존하고 그럴싸한 정황으로 포장된 ‘보강 증거’로 덧칠해진 채, 1990년 3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로 묻혀져 버린다.

1990년 4월 12일, 노태우 정부는 ‘KAL기 사건을 증언해 줄 유일한 생존자’로서 김현희씨를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특별 사면’을 시킨다. 그 해 6월 9일 신상옥 감독이 헐리웃에서 KAL기 폭파 장면을 찍었다는 반공영화 ‘마유미’가 전국적으로 상영된다.

그러나 사건 직후부터, 대내외적으로 KAL기 실종사건에 대한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유족들은 실종자에 대한 명확한 사망 확인도 없이 소중했던 가정이 산산히 파괴되는 한 맺힌 삶을 살아가며 18년 넘게 외롭고도 험난한 진상규명을 외쳐 왔다.

그리고 마침내 각 언론, 방송기관에서의 동 사건 재조명과 국회 토론회를 거치고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여론에 힘을 얻어, 2004년 11월 2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가 발족되어 KAL858기 실종사건의 실체적 진실규명을 위한 큰 희망을 얻게 된다.

신뢰성도 알맹이도 없는 국정원 진실위 중간 보고서

사건발생 18년 8개월 째로 접어든 2006년 8월 1일, 국정원 진실위는 ‘안다만 해상에서 KAL858기 동체 잔해로 추정되는 인공 구조물을 발견’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함께, 그동안의 동 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중간발표’를 했다.

그러나 국정원 진실위는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이렇다할 새로운 ‘팩트’ 하나 없이 또다시 까닭 모를 ‘강한 심증’에 기초한 옹색한 ‘중간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실종자 가족들은 물론 동 사건의 명쾌한 진상규명을 염원했던 국민을 실망시켰다.

국정원 진실위가 작성했다는 97쪽의 ‘중간 보고서’ 내용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을 위한 진지한 접근 노력을 했는지 근원적인 회의를 유발할 정도로 1988년 1월 15일 발표 된 안기부 수사 발표문을 재탕, 삼탕한 끝에 신빙성 없는 추정들로 덧칠해 버렸다.

‘확인하기 어려움’, ‘아는 것이 없다’, ‘~했기 때문으로 판단 됨’, ‘추정하였음’, ‘가능한 상황이라고 판단 함’, ‘현 시점에서 확인하기 어려움’, ‘정확히 논단할 수 없고’, ‘이유는 알 수 없음’, ‘관련 자료 없었음’, ‘김현희 면담 후에나 확인해야 할 것으로 판단 됨’, ‘의혹이 해소 되지는 않았음’, ‘김현희 진술에 의거해 임의로 추정 한 것이었음’...

진실위 조사관들은 위 같은 방식의 모호하고 애매하며 불철저함으로 가득한 보고서를 내놓고, 당시 군사 정권에 의한 ‘기획조작설’ 과 ‘사전인지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 됨’이라며, 신뢰성 있는 ‘결론’이 아닌 이미 사망선고를 받은 제5공화국의 ‘선험적 가설’들을 되풀이 주장했다.

화동사진 논란은 거짓 증거 만들기의 재탕

몇 가지 사실 관계를 살펴보자.

국정원 진실위는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다고 호들갑을 떨며 김현희 화동사진 논란을 다시 내세웠다. 1988년 1월 15일 안기부가 증거로 내세운 화동사진은 ‘김현희=북한 공작원’ 임을 내세우기 위한 ‘유일한 증거’ 방식이었다.

<사진1>
▶1988년 1월 15일 안기부 수사 발표문에 공개된 화동사진.
화동은 김현희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자료사진 - KAL858대책위]
안기부는 김현희가 19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개최 된 남북조절위(72.11.2~11.4) 제2차 평양회담에 참석한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장본인이라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그 증거물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화동사진 1매를 공개했다. 그러나 동 사진은 11월 4일 장기영 대표가 떠나는 사진으로서 ‘둥근 귀’ 화동은 김현희가 아님이 판명되었다.

<사진2>
▶1988년 3월 5일자 경향신문과 ‘그라프 곤니치와’에 게재됐던 화동사진. 김현희는 4번
소녀가 ‘틀림없는 내 모습’이라고 주장했으나, 둥근 귀의 화동은 역삼각형의 ‘칼귀’를
지닌 김현희가 아닌 평양외국어학원의 교원 정희선임이 판명됐다.
동 사진은 1988년 11월 25일 검찰이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임을 입증하기 위한 공소
자료로 재판부에 제시했고, 재판부는 이를 판시의 근거로 채택했다(진실위, 중간
보고서 76쪽). [자료사진 - KAL858대책위]
1988년 3월 5일 일본 공산당 잡지 ‘그라프 곤니치와’의 기자였던 하기와라 료가 등장, 안기부 수사관과 함께 직접 김현희에게 제2차 남북조절위 사진을 보여주자, 김현희는 “이 사진은 당시 내 모습이다. 어떻게 사진을 구했느냐”라고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중학교 때는 살이 올라 뺨이 통통했다. 이마, 눈썹, 눈두덩이, 귀 등의 모습과 얼굴 윤곽이 지금과 같지 않느냐”면서 사진의 장면을 설명까지 했으나(경향신문 1988.3.5 11면), 동년 3월 8일 평양외국어학원의 교원인 정희선이 나타나 김현희가 지목한 화동은 “바로 나”라고 공개증언하면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사진 속 인물들의 성명과 소속학교를 일일이 설명까지 했다.

누구의 주장이 진실이었을까? 이 때 유명한 ‘칼귀’ 논쟁이 등장했다. 김현희가 ‘틀림없는 내모습’이라고 지목한 화동의 귀 모양은 도톰한 둥근형인데 반해 김현희의 귀모양은 역삼각형의 이른바 ‘칼귀’로 판명되어, 진실게임은 도툼한 복귀를 가진 정희선의 승리로 판명 됐다. 이후 김현희는 화동사진에 대해 일체 입을 꼭 다물게 된다.

그 다음 다시 하기와라 료는 대법원 최종 판결(1990.3.27)이 있기 전에 ‘서울과 평양’ (1990.2)이란 책을 출판하면서 화동들이 ‘일렬로 늘어선’ 또 다른 사진(동 사진은 월간조선 2001.11월호에 게제 됨)을 제시하며, 그 사진의 ‘세 번째 화동’이 바로 김현희라고 주장했다. 국정원은 이른바 ‘답변서’(2004.3.15)에서 88.1.15 수사보고서에서 발표한 사진의 화동은 김현희가 아니었다고 시인하면서, 하기와라 료가 제공하고 월간조선에서 다시 게재한 사진속의 세 번째 소녀가 김현희로 확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검찰이 제출하고 재판부가 판시의 근거로 채택했던 화동사진이 ‘거짓의 증거’로 판명 된 마당에, 또 정작 화동의 주인공이라는 김현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제3자들이 또 다른 화동사진을 들고나와 귀모양을 판독하기 어려운 화동이 바로 김현희라고 호들갑 떠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애시당초 김현희는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당시에 꽃다발을 전달받은 남측 인사의 순서는 이후락(공동위원장)-장기영(보좌)-최규하(특별보좌) 순서였으므로, 하기와라 료와 안기부 주장대로 ‘서울과 평양’에 게재된 사진의 3번째 소녀가 김현희라면, 김현희는 최규하 특보에 꽃다발을 전달해 주었다고 해야 올바른 것이다.

국정원 진실위는 하기와라 료의 미공개 사진들을 입수했다고 하면서, ‘서울과 평양’에서 제시 됐던 ‘3번째 소녀가 김현희가 맞다’라는 헛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진실위, 중간 보고서 26~28쪽). 그런 너절한 주장을 하려거든 당사자인 김현희에게 직접 물어 보던지 아니면 김현희와 최규하를 대질신문 하는 것이 더 객관성있고 타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10월 전 감사원 직원 현준희씨는 ‘월간 내외저널’을 통해서 KAL858기 사건 조작의혹을 전격 제기하고, 화동사진 논란을 일일이 통박했다. 이후 2004년 신동아 1월호에서 그리고 2004년 월간조선 2월호에서, 동 잡지 2001년 11월호에 게재했던 유사한 사진(컬러, 요미우리사 제공)을 게재하며, 김현희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사람은 이동복(제2차 남북조절위 남측 대변인)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당시 수행원에 불과했던 이동복은 서열 3위 최규하 특보를 제치고 평양 역포 헬기장에서 꽃다발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언론의 KAL858기 사건 재조명을 외면한 국정원 진실위

2003년에 들어서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사건의 의문을 제기하고 진실규명의 필요성을 제기 했다. 2003년 11월 18일 MBC <PD수첩> "16년간의 의혹, KAL858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방영, 11월 2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16년간의 의혹과 진실, 김현희 KAL858 폭파 사건" 방영, 그리고 2004년 5월 22일, 23일 <KBS스페셜-KAL858기의 미스터리> 2부작이 특집으로 방송 된 바 있다.

MBC <PD수첩>에서는 김현희, 김승일 일행의 오스트리아 빈->유고 베오그라드 행적과 음독 미스테리를 재조명 했으며,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 행적과 KAL기 예상 추락지점과 칸챠나부리 밀림 수색의 오류를 파헤쳤고, KBS 스페셜에서는 KAL기 폭파 의혹 전반과 평양->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 행적의 허구를 파헤 쳤다.

과연 김현희, 김승일 일행의 평양->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 행적은 김현희 진술과 안기부 발표에 부합된 사실일까? 이 결정적인 사실 문제에 대해서 왜 국정원 진실위 중간 보고서에 아무런 언급이 없었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KBS 스페셜 팀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87년 11월 12일 08시 30분에 평양발 조선민항기를 타고 중간 기착지인 ‘이르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18시에 도착했다는 김현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었다. ‘ABC 국제항공시간표’와 ‘북한 년감’에 따르면, 동년 11월 12일 평양발 조선민항기(JS215)는 09시 출발, 중간 기착지 없이 직항하여 12시 30분(이상 현지 시각)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반면 김현희가 도쿄 나리타 출발은 ‘위장 여정’이었다고 진술한 부분은 어떠한가? 김현희 일본 여권의 87년 11월 14일 나리타 출국 소인은 '위조'라고 안기부는 발표했다. 그러나 동 여권에는 김현희의 나리타 출국을 증명해 주는 '일본인용 띠지'와 일련번호(PM 6979589. 12.)가 적힌 '귀국카드'가 스테이플러로 찍혀 있다. 역시 위조라고 주장한 김현희 소지의 일본병원 '예방접종서'도 진짜로 판명됐다.

그렇다면 김현희의 ‘실제 여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KAL858편 폭파 사건 ‘바레인 경찰 수사 보고서’(1987.12.31, 신동아 2004년 9월호에 번역 게재)에 따르면, 김현희(마유미)는 김승일(신이치)과 함께 1987년 11월 14일 ‘관광’을 목적으로 도쿄를 떠나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곧장 갔는데, 김현희는 그 곳에서 이틀을 머물고 동년 11월 19일 빈으로 갔다는 등의 진술을 한 사실이 있다.

사건의 본질과 핵심을 빠트린 국정원 진실위

2004년 7월 1일 국회 소회의실에서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 토론회’가 개최된 바 있고, 2005년 9월 21일 ‘폭발물과 항공사고 조사를 중심으로- KAL858기 시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청문회’가 개최된 바 있으며, 동년 11월 9일 국회 소회의실에 ‘KAL 858기 진상규명 촉구와 언론의 보도 행태에 관한 토론회’가 개최된 사실이 있다.

2004년 7월 1일 국회 토론회에서는 1987년 12월 13일 수거한 ‘구명보트’와 사건발생 2년 3개월 후인 1990년 3월 5일, 이렇다 할 ‘물증’ 없이 대법원 재판이 진행 되던 중 발견된 기체 잔해(동체 후미 겉부분) 등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 ‘압축 파열에 따른 흔적이 발견됐을 뿐, 폭발 흔적은 없었음’을 재확인하고, 김현희가 주장한 기내 폭발물 위치의 모순점을 발견했다.

2005년 9월 21일 국회 청문회에서는 폭발물과 항공 전문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김현희가 주장한 콤포지션 C-4 폭약과 피카티니 액체폭약(PLX)은 북한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명칭임과 동시에 안정성과 취급성이 용이하지 못한 액체폭약은 사제폭약으로서 C-4와 혼용해서 사용되지 않음이 지적됐다. 그리고 김현희가 주장한 폭발물로는 고강도 처리된 기내 금속을 파열시키고 날개부분 연료통을 폭발시킬 수는 없다는 점과 사고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블랙박스도 찾지 못하고 종결된 엉터리 수색이 큰 문제로 지적됐다.

2006년 11월 9일 국회 토론회에서는 당시 사건과 관련한 국내 언론의 난무했던 오보 사례와 1988년 2월 11일 유엔 안보리에서 채택되어 논의된 대한항공 858기 결의안 추진 사례를 재조명하면서, 북한을 테러국으로 지정하려 했던 남한, 일본, 미국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남한의 입장에 비판적이었던 소련, 중국, 유고, 이탈리아, 잠비아, 서독, 네팔 7개국에 의해 대북 제재 혹은 비난 결의안은 채택되지 않고 회의가 마무리됐음을 확인했다.

국정원 진실위의 분발과 김현희씨 진실고백을 고대하며

물론 국정원 진실위의 중간 조사발표가 전혀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에 지적했듯이 안다만 해상에서 실종된 KAL858기 잔해 수색을 통해 Taung-Pa-La 섬 앞 바다에 대한 Side Scan Sonar 탐사에서 ‘인공조형물이 다량 매몰돼 있음’을 발견한 사실이나 1987년 12월 2일경 수립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 계획 문건을 확인한 것은 커다란 성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실을 자백했다는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특별 사면’된 김현희에 대한 직접적인 면담 없이, 위원들의 ‘주관적 심증’에 기초한 사건에의 접근과 ‘조작 된 흔적이 없다’는 ‘예단’을 내린 점과 그로 인해 오히려 KAL858기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의 ‘대의’를 훼손하고 실종자 가족은 물론 사건의 진상규명을 고대했던 국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준 부분에 대해서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국정원 진실위가 가진 인적, 물적인 한계와 함께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오도하려는 불순한 세력에 의한 방해공작과 사안이 갖는 ‘무게감’으로 인해 진실위 활동을 온전히 진력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진실규명의 ‘대의’와 ‘역사적 소명’을 확고히 하고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국정원 진실위는 역사와 사회 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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