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희 (미국 심슨 대학교 종교철학부 교수)


통일뉴스에서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를 게재한다. 신은희 교수는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이 만날 수 있다며 이를 전도(?)하는 흔치않은 학자이다. 그는 주체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방법론으로 해서 기독교와의 접맥을 시도하고 있다.

미 심슨(simpson)대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는 그는 북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고 또 여름마다 남쪽에 와서 특별강의도 한다. 신학자이지만 신학에서 벗어나 인본주의로 가고 싶고 또 단순한 학문만이 아니라 실천 활동을 하고 있는 ‘주체문화’의 전도사인 셈이다.

이미 3년 전부터 주체사상과 기독교사상과의 접맥 시도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온 그의 <통일문화 이야기>는 매주(또는 격주) 화요일에 연재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너는 당분간 의견내지 마라”


지난 9월, 중국 심양에서는 한국학 (조선학)을 전공하는 전 세계의 학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제고려학회가 열렸다. 이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선배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기억난다. 정치학 분과에서 북측 학자의 발표가 끝나자 남측 학자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다분히 감정 섞인 그의 비난은 북측 학자들의 논문이 전혀 ‘학술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논문의 ‘주’가 없다, 참고문헌이 없다,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이 없다, 선동적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주된 불만이었다. 그가 계속 언성을 높이자 가만히 지켜보던 북측 학자가 침묵을 깨고 받아치기 시작했다. 북측 학자는 남측 학자들의 논문만이 학술적이라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따져 물었다.

“대부분의 남측 학자들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와서 미국식으로 논문을 써야만 ‘학술적’이라고 믿는 것 아닌가. 다른 사람들의 논문을 베껴놓고 ‘주’라는 것을 잔뜩 달아야 학술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미국식으로 써야만 ‘학술적’인가. 이는 ‘지식인의 사대주의’가 아닌가. 우리가 남측 학자들의 논문을 보고 ‘왜 당신들은 우리처럼 논문을 쓰지 않는가’ 하고 따지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것과 다르니 당신들 것은 학술이 아니다’'우리처럼 하지 않으면 당신들과 대화 안한다’그러면 당신들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우리 북조선에서는 장군님을 보위하고 국가의 입장을 세계에 똑바로 알리는 것을 지식인의 제일 중요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계속 우리식대로 학술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계속 대화할 수 있다.”

대체로 이런 내용의 항변이었다는 것이다. 뜻하지 않았던 북측 학자의 반격에 남측 학자는 더 이상 발언하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이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코미디 영화 「가문의 위기」에 나오는 대사가 불현듯 떠올랐다. 서투른 막내 조직원이 황당한 주장을 하면서 마구 설치자 조폭 두목인 맏형이 묵직하게 한마디 한다: “너는 당분간 의견내지 마라!”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시끄럽기만 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의견만 쏟아놓는 구성원이 있다. 우리 사회에도 평화로운 통일문화 형성을 위해 당분간 의견을 내지 말아야 할 이들이 제법 있을 것 같다.

“주체문화는 첩살이 신세”

우리는 북보다 다원화된 정보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대단히 ‘열린 사고’를 한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북을 향해 ‘이래라’‘저래라’ 충고하기를 좋아한다. 마치 돈 좀 있는 친구가 밥 한 끼 사면서 상대방의 인생까지 바꿔놓으려는 경우와 같다. 밥 한 끼 얻어먹으면서 인생관까지 바꿔야 한다면 누가 그런 친구하고 밥을 먹고 싶을까. 나는 다원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가 오히려 폐쇄적이고 집단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북측 사람들보다 훨씬 이분법적 사고를 하는 경우를 보면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물론 북측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체문화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근본주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문화를 다른 체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요구하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남쪽보다 다원주의! 원리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얼마 전 가수 신해철이 방송토론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그는 “익숙하지 않다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며 “좀 세련되라”는 뼈있는 한마디로 해명을 대신했다. 사실 ‘세련된’ 사고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영역은 통일문화를 이루는 통일운동계열이다. 소위 말하는 좌파이건 우파이건 중도좌파건 중도우파건 경직된 사고와 획일적인 문화양태는 여전하다. 이것 아니면 저것, 흑이 아니면 백,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식으로 끊임없이 둘로 갈라야만 하는 단편적인 사고의 이중구조. 주체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언급하면 ‘친북자’가 되고, 동시에 북의 세습구조를 비판하면 금새 ‘배신자’의 낙인이 찍힌다. 인권을 말하면 국권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권을 강조하면 인권이 유린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의 획일성. 마음속에 깊이 패인 사고의 틈과 분열. 이것이 우리를 질식하게 만든다.

사고의 이중구조는 문화의 이중구조를 가져온다. 우리 사회에서 주체문화는 마치 무교(巫敎)의 전통처럼 ‘첩살이’신세와 같다. 실제로는 필요를 느끼면서도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우리 사회의 그늘 말이다. 정치인, 사업가, 교수, 심지어 목사마저도 간절한 마음으로 무당을 찾아 현실 삶의 어려운 문제를 상담하고 조언을 구하지만 이들 모두 드러내놓고 무당을 찾지는 않으려고 한다. 점을 치고 와서도 겉으로는 미신이라고 터부시한다. 주체문화에 대한 인식도 비슷한 양상이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북과의 관계성을 너무도 중요하게 여긴다. 북과의 협력 관계는 한국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한다. 요즘 정치적 돌파구를 찾고 있는 참여정부가 제2의 남북정상 회담을 추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야당도 반북발언을 일삼으면서도 누구보다 앞서 부지런히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싶어한다. 북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싶어한다. 겉으로는 부인하지만 뒤로는 특별한 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다. 그러면서도 북의 주체문화는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부권문화의 첩살이처럼 공개적으로는 결코 인정할 수 없지만 숨어서는 온갖 애정공급을 다 받겠다는 치사한 남자들의 횡포와 다를 바 없다. 오늘날 축첩행위는 금지되어 있지만 정치적 첩 문화는 여전하다. ‘사상적 첩들’의 반란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는 21세기 통일문화를 내다보면서 북의 사회와 문화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에 관계없이 먼저 인정하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하다.

“만경대까지 품는 사랑으로”

강정구 교수 사건으로 ‘구국투쟁’을 선포했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정치적 호소가 떠오른다. 그는 “4.19, 5.18은 품을 수 있지만 만경대까지는 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대표의 발언은 언뜻 듣기에는 전쟁의 경험이 생생한 세대들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좀 더 큰 틀에서 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생각한다면 결코 현실적이지 않은 방향이다. 왜냐하면 21세기의 평화로운 통일문화는 만경대까지 품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경대를 품지 않는 한 남북의 상호적인 평화통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많은 사람들은 “통일을 위해 북의 주체문화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북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라든가, “북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한다.

그러나 나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현실적으로 주체문화와 만경대를 품지 않고서는 평화통일을 위한 희미한 스케치조차 불가능하다고 본다. ‘만경대를 품는다’는 것은 만경대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뜻과 다르다. 북의 주체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찬양하라는 뜻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만 국제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다원주의 정신과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여 북의 국가종교인 주체문화와 만경대를 일단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건설적이고 비판적인 대화는 남과 북이 상호 ‘인정의 정치’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한국사회가 자유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모든 대화에 참여하듯이 북이 가지고 있는 조선식 사회주의 주체문화를 인정해주고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사관으로 볼 때 북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만경대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광의 역사이건 아픔의 역사이건 우리 민족이 대대손손 품고 살아야 하는 한민족의 역사인 것이다.

맥아더 동상도 마찬가지이다. 동상 자체를 철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맥아더 동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 더욱 중요하다. 우리가 그 동상을 바라보고 우리 민족의 비통한 오욕의 역사로 오열할 수 있다면 그 동상도 오래 간직하고 기억해야 할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북의 실체를 무조건 부인하고 통일만 하자는 것은 침략정신에 가까운 것이다. 21세기 통일문화는 공존의 정신이 전제되어야 한다. 소외된 그늘에도 빛이 비춰지고 상실된 명예가 복원되어 다시 만나는 창조의 역사이다. 새롭게 써야 할 통일시대의 역사는 만경대까지 품는 진한 민족의 사랑으로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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