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pbpm@wonkwang.ac.kr,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매주 월요일 이재봉 교수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이재봉 교수는 지난 10월 중순 ‘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이제까지 북녘을 세 번 방문했다.
이 교수는 방북기를 쓰는 목적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통일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녘의 실상을 나름대로 잘 알려보자는 데 있다”면서 “북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모습 또는 그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한반도 및 세계 평화문제와 특히 남북 통일문제에 실천적으로 접근하려는 이재봉 교수는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이자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를 맡고 있다. - 편집자 주


2005년 10월 중순 3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북녘 방문과 관련하여 난 언제부터인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일종의 오해를 받아온 것 같다. 내가 마치 “북녘을 자주 오가는 사람”처럼 소개되는 것을 여러 번이나 직접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북녘 방문은, 금강산 관광을 빼면, 1998년 10월과 2003년 10월에 이어 기껏 세 번째인데 이런 오해가 빚어지는 데는 아마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첫 번째 평양 방문이 좀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 6.15 정상 회담을 계기로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요즘은 북녘 방문이 다소 쉬워졌는데, 1998년 무렵에는 남쪽 사람이 북녘 땅을 밟는다는 자체가 뉴스 거리였다. 평양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문에 보도되었고, 다녀온 뒤에는 여기저기로부터 그에 관한 글을 써달라거나 강연을 해달라는 부탁을 귀찮을 정도로 받았다. 시기 때문에 나의 방북이 널리 알려졌다는 말이다.

다른 하나는 방북기 때문일 것이다. 1998년 10월 7박 8일의 일정은 원고지 400매 분량으로, 그리고 2003년 10월 4박 5일의 일정은 원고지 600매에 담아, 내가 매월 만들어내는 '남이랑 북이랑'을 통해 수십 개월에 걸쳐 연재했다. 그리고 그 글들은 다른 매체들에 옮겨져 실리기도 했다. 몇 년 동안 방북기를 써댄 셈이니 독자들에겐 내가 “북녘을 수시로 드나드는 사람”처럼 오해받는 게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방북기를 쓰는 목적은 소박하게나마 통일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녘의 실상을 나름대로 잘 알려보자는 데 있다. 딱딱하고 어려운 논문 같은 글이 아닌 부드럽고 쉬운 글을 통해 북녘에 대한 왜곡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재주가 부족하여 재미있는 글을 쓰지는 못해도 누구든지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쓸 수 있다고 믿으며, 바로 이러한 글쓰기가 내가 펼칠 수 있는 통일 운동이라 생각한다. 해마다 두세 차례씩 몇 개월 동안 해외여행을 하면서 유독 북녘을 다녀오면 여행기를 남기고 싶은 가장 큰 이유다. 따라서 이 글은 북녘의 산이나 강을 비롯한 자연 풍경을 묘사하기보다는 북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모습 또는 그들과의 대화를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1990년대까지 “세계화 시대를 맞아 돈과 시간만 있으면 지구촌 어디든지 맘대로 갈 수 있지만, 돈과 시간이 있어도 가기 힘든 곳이 북녘”이라고 얘기하며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북녘도 누구든지 돈과 시간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2005년 10월엔 평양의 ‘아리랑’ 공연을 계기로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평양 방문단을 모집하는 광고가 일간 신문에 큼지막하게 실리기도 했는데, 이를 전후로 약 5000명이 거의 한 달 내내 비행기를 전세 내어 줄줄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게 북녘의 담장은 조금씩 낮아지고 출입구는 서서히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쪽 사람들이 북녘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는 없다. 대체로 북녘 안내원들이 데려가는 곳만 둘러볼 수 있고 그들을 비롯한 ‘특수한’ 사람들과만 얘기를 나눌 수 있다. 극도로 제한된 여행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글이 북녘의 실상에 대한 또 다른 왜곡과 편견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1. 2005년 10월 평양 방문의 동기

나는 1999년 8월부터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을 벌여오고 있다. 북녘을 바로 알리고 북녘 동포를 도와 전쟁의 가능성을 낮추며 남과 북이 더불어 살자는 취지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이 약 20명에 이른다. 매월 2만원씩 모아 '남이랑 북이랑'을 인쇄하고 보내는데 드는 비용을 부담해주는 이른바 ‘운영위원’들이다. 동료 교수와 학생도 있고 종교인과 시민운동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으며 가정주부도 있다. 나보다 먼저 그리고 깊이 북녘을 연구하거나 통일 운동에 헌신해온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평범한 사람들이다.

매월 '남이랑 북이랑'을 펴내면서, 이 운동의 취지에 동감하는 사람들로부터 한 달에 천원 또는 1년에 만원씩 후원을 받아 1억원을 모으면, 북녘의 추운 고장에 비닐 온실을 세워 배고픈 사람들이 반찬거리라도 직접 생산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꿈이 금세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6년이 흐른 2005년 8월까지 모아진 돈은 기껏 6천만원 정도이기 때문이다. 1년에 천만원 정도씩 모은 셈이어서 이런 상태로 목표액을 채우려면 앞으로 4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침체되는 듯한 통일 운동의 활성화도 꾀할 겸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북녘을 방문하여 부분적이나마 그리고 겉으로나마 북녘의 실상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계획을 조금 바꾸었다. 꼭 온실이 아니더라도 북녘 사람들이 고달픈 생활에서 벗어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인도적 차원에서 어떤 분야에든 후원자들의 정성을 전달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많지 않은 성금을 가지고 독자적인 방북단을 꾸리기는 여러모로 어려웠다. 이에 우리보다 규모가 큰 대북 지원 단체 또는 통일 운동 단체와 손잡고 북녘에 들어가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운영위원들의 방북 자체가 우리 통일 운동의 목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의 취지에 맞는 대북 지원 단체나 통일 운동 단체를 찾아야 했다. 운영위원 가운데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에서 이사로 일하는 사람이 이 단체를 소개했다. “아이들은 키도 비슷하고 마음도 통해야 어깨동무할 수 있다”는 취지로, “지난 10년 동안 북녘 어린이들이 건강하게 자라 남녘 어린이들과 어깨동무할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 왔다”는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의 대북 지원 사업 내용이 참 맘에 들었다.

2004년엔 평양에 '어깨동무 어린이 병원'을 열었고, 2005년엔 '어깨동무 학용품 공장'을 세우는데 지원한다는 것이다. 나도 얼마 전에는 북녘의 협상 상대로부터 온실 대신 학용품 지원을 부탁받은 적이 있기에, 우리 운영위원들은 성금의 일부를 '어깨동무 학용품 공장' 지원에 기꺼이 내놓기로 결정했다.

마침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에서 2004년에 세운 어린이 병원을 참관하고 2005년 10월 17일 문을 열게 될 학용품 공장 준공식에 참가할 대표단을 구성하는데 우리 쪽에서도 10명이 동참하기로 했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워낙 짧았던 터라, 운영위원들 가운데서 돈과 시간 둘 다 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3일간의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은 200만원이란 여행 경비를 부담스러워 했고, 큰 어려움 없이 여비를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은 3일간의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했다.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에 10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내준 이른바 평생회원들에게도 연락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를 포함해 운영위원들과 평생회원들 가운데 5명만 평양 방문 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2. 계획된 방북 일정과 경비

2005년 9월 중순 쯤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로부터 전해들은 3박 4일의 방북 계획에 큰 호감을 가진 대목은 방문 장소가 좀 색다르다는 점이었다. 이 단체에서 지원해준 학용품 공장 준공식에 참가하면 조그만 공장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일하는지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 전에 세워준 어린이 병원을 방문함으로써, 북녘이 대외적으로 널리 자랑하는 평양산원을 비롯한 큰 병원이 아닌, 조그만 병원에서 열악하다고 소문난 의료 환경을 엿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기도 했다. 북녘이 내세우는 최고 교육 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이나, 일종의 예체능 과외 학원으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이 아닌, 일반 소학교 (초등학교)를 둘러보게 된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1998년 처음 북녘을 방문했을 때 일행은 두 명 밖에 되지 않고 기간은 8일이어서 평양 시내뿐만 아니라 황해도 지역까지 여기저기 원하는 곳은 거의 모두 둘러볼 수 있었지만 빠진 구석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소 보충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무튼 지난 두 차례의 방북을 통해 둘러보지 못한 장소들이 몇 군데 포함된 게 맘에 들었단 말이다.

북녘이 “21세기의 대걸작”으로 내세워온 대집단 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을 관람할 수 있다는 것도 구미를 댕겼다. '아리랑'을 감상하기 위해 수천 명이 1인당 100만원 안팎의 거금을 들여 1박 2일로 평양을 다녀오는 데는 부정적 생각이 앞섰지만, '아리랑'을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 엄포 섞인 유혹에 말려든 탓인지 무슨 핑계가 주어지면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터였다.

묘향산을 오른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처음 방북 때는 묘향산 계곡에서 술을 곁들인 도시락을 먹은 뒤 옷을 홀랑 벗고 10월의 차디찬 물 속에 뛰어들어 수영까지 하는 스릴을 맛보기는 했지만 산을 오르는 기회는 갖지 못했었는데, 상원암까지 오른다니 그야말로 ‘천하 제일 명산’의 가을 단풍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경비였다. 3박 4일 일정에 250만원. 엄청 부담스런 액수다. 북녘에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좀 한다고 해서 특혜를 받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도 솔직히 섭섭하다. 더구나 처음 방북 때는 7박 8일의 일정이었지만 숙식은 완전히 공짜로 제공받고 벤츠 승용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쓴 휘발유 값만 두 사람이 합쳐 30만원 건넸으니 그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비행기를 전세 내어야 하고 어린이들 30명을 데려가는데 그들 경비를 어른들이 조금씩 보조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들 여행비 보조는 얼마든지 기꺼이 할 수 있겠다. 취지가 몹시 아름답기 때문이다. 우리 어른들은 통일된 세상에서 살아갈 날이 없을 것 같지만, 이들 어린이들은 앞으로 남북 출신 구별 없이 더불어 살아가야 할텐데 지금부터 만남과 교제를 가지면서 마음이 통하게 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왜 꼭 비행기를 전세 내어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서울-평양 사이에 정기 상업 항로가 없기 때문에 비행기로 가려면 당연히 전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그 거리가 꼭 비행기를 타야할 만큼 멀지는 않다. 육로는 이미 뚫려 있고 더구나 2003년 10월엔 류경정주영체육관 준공식 참관차 천여명이 버스를 타고 들어간 적이 있지 않은가. 갑작스런 개방에 따른 문제점 등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북녘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처지이지만 불만스러운 대목이다.

이러한 방북 일정과 경비에 변화가 생겼다.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 실무자들이 10월 초 개성에서 북녘의 협상 상대들과 만나 일정을 새로 조정했다는 것이다. 남쪽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듯이, '아리랑' 관람을 위한 방북객들이 매일 수백명에 이르러 평양의 숙박 시설이 딸리게 되는 바람에, 무슨 명목으로 방북을 하든 10월 중에는 1박 2일 일정으로 단축해달라는 북녘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내가 협상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고, 알더라도 그것을 널리 알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는데, 아마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 측에서는 3박 4일 일정을 1박 2일로 단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대꾸한 모양이다. 그래서 2박 3일 일정으로 조정하되 원래 3박 4일 동안 계획했던 행사를 모두 포함할 수 있도록 아침 일찍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저녁 늦게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단다. 덕분에 경비는 200만원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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