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한국진보운동연구소 소장)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이 발표된 지 한달이 지나고 있다. 제4차 6자회담의 조기개최를 낙관했던 미국은 이북의 돌연한 성명에 당황하면서 대응책을 모색하느라 분주한 외교적 행보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북정책의 변경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따라 6자회담 개최를 둘러싼 대결국면도 장기화될 것으로 보여진다.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이남사회에도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으며, 일부 시민운동단체는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남 사회내의 충격은 예상외로 크지 않았으며, 여론 또한 담담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0선언은 이남 사회의 정치적 흐름에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을 형성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2.10 핵무기 보유선언의 정치외교적 공학을 살펴보고 향후 전망과 과제를 정리해본다.

1. 핵무기 보유선언의 배경-미국의 체제변형전략에 대한 반격

부시 2기 행정부는 제4차 6자회담의 개최를 중요한 전략적 과제로 내세우고 추진해 왔다. 웰던 미 공화당의원을 비롯한 미 의회대표단의 평양방문 허용(2005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취임사, 의회 연두교서에서 이북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최대한 자제했던 사실들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국내 일부언론과 지식인들은 부시 행정부의 이처럼 유화적인 태도를 보고 향후 대북정책이 온건한 방향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미국이 6자회담 개최를 서두르게 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 대선 이후 행정부 당국자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한 <이북체제 변형론>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김정일 체제의 붕괴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체제변화를 요구한 것이 이북체제 변형론이기 때문에, 이것은 대북 적대정책의 완화이며, 향후 북미대화 가능성이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체제변형론의 본질을 왜곡한 것이다.

<이북체제 변형론>은 이북체제 붕괴론의 변종이며, 새로운 대북 적대시전략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대>를 대외정책의 중심목표로 제시함으로서 미행정부의 공식적인 대북정책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이것은 라이스 국무장관이 미 상원의 인준청문회에서 이북을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규정함으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새로운 대북 적대시정책인 이북체제 변형전략은 무장해제를 노린 내부와해전략이다. 그리고 체제변형전략의 중심적인 무기는 <인권과 민주주의>이다.

미국이 내세운 새로운 체제변형전략의 기본적인 특징은 그것이 양면전략이라는 데에 있다. 양면전략은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는 칼을 가는 전략이다. 부시정부1기의 대북 강경압박정책이 실효성도 없이 국제외교적 반발만을 초래하여 스스로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였다고 판단한 미국의 전략가들은 강경대결 일변도의 전략을 수정하여 겉으로는 “침공할 의사가 없으며, 모든 현안문제를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떠벌이며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하지만, 막 뒤에서는 군사적 준비태세의 강화, 자금줄 봉쇄, 인권문제의 정치쟁점화를 통한 이북의 정치외교적 고립화와 이북내부의 무장해제와 체제약화, 내부분열을 모색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이북체제 붕괴를 목표로 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여기에는 남북 대결구조의 복원이라는 꼼수가 내포되어 있다.

이북체제 변형론은 대북 적대시정책의 수정 또는 완화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더욱 강화된 것이며, 더욱 악랄하고 교묘해진 정책이다. 이것은 과거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주요한 공격수단으로 설정한 데서 한걸음 더 나가 ‘인권과 민주주의’문제를 중심적인 쟁점으로 부각시키고 이것을 대북 공격의 무기화하겠다는 의도이다.

미국은 현 시점에서 새로운 대북 체제변형전략을 효과적으로 관철하기 위해서는 6자회담을 절박하게 필요로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6자회담을 열어 대화와 협상 분위기를 유도함으로서 이북의 행동을 지연시키자는 게 첫째 목적이다. ‘북핵문제’에 대한 뾰족한 정책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면에서 이라크, 이란 문제 등 중동문제에 정치외교적 역량을 집중해야 하는 게 미국의 처지이다. 그러자면 ‘북핵문제’가 국제적으로 긴급한 현안으로 부각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 일단 6자회담이 열리게 되면 이북의 행동을 일시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북핵문제’가 긴급한 외교현안으로 부각되는 것을 일정 정도 지연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② 6자회담에서 주도권을 틀어쥠으로서 이북을 국제외교적으로 고립화시키기 위해서이다. 지금까지 6자회담 과정은 미국의 의도가 좌절되어 온 과정이었다. 지금까지 6자회담 과정은 ‘선핵포기’를 강제하기 위한 국제적 압박공간으로 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미국의 ‘선핵포기’노선이 포위고립되고 이북의 <동시행동의 원칙에 따른 동결과 보상> 주장이 대세가 됨으로서 미국에 대한 압박공간으로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는 6자회담 공간을 대북 외교적 압박공간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선핵포기’를 비롯한 이북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압박공간으로 만들려는 속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6자회담 공간을 단순히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문제를 다루는 대화와 협상의 장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북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의제화함으로써 이북체제변형을 강요하는 압박공간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미국이 지금 6자회담 개최를 서두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전략을 관철하기 위해서다.

③ 마지막으로 미국은 6자회담을 열어 북미대화 분위기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킴으로서 막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북체제 붕괴 공작들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 의도를 간파한 이북은 역공을 통해 미국의 정치적 의도를 좌절시키고 정세의 주도권을 튼튼히 틀어쥐고 미국을 정치외교적 궁지에 몰아가기 위한 반격카드로서 2.10성명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2. 핵무기 보유선언의 정치외교적 공학

① 한반도 핵전쟁위기의 현실성에 기초해서 모든 논의를 펼쳐나가야 한다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으로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양상은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에 직면한 미국은 즉각적인 징벌행동에 나서든가 아니면 핵무기 보유국과의 대결을 감수하든가 양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양자 그 어떠한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게 미국의 처지이다. 이러한 처지에서 미국은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자체를 공갈협박쯤으로 격하하면서 악의적인 무시정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일시방편의 궁여지책에 불과하며, 시간이 흐를수록 곤혹스런 처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 이후 국내에서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이러저러한 전망과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 중에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의 불가피성을 수긍하는 흐름이 대부분이지만 개중에는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견해도 상당수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비판의 논거와 초점들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들 속에는 일관된 기본전제가 하나 깔려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전쟁가능성(미국의 대북 핵전쟁가능성)에 대한 악의적 무시이다. 그들은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그릇된 가정에 기초해서 모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핵전쟁 준비과정들이 <전쟁을 위한 실제적 준비과정>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군사적 압박과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미국의 대북 전쟁위협은 하나의 쇼나 제스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들도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의 이러한 확신을 공개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미국에 의한 전쟁발발 가능성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수사적인 것에 불과하다. 만약에 미국이 가까운 시일내에 이북을 향해 핵전쟁을 일으키고, 그것이 칠천만 민족 전체를 핵전쟁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나갈 것이 명확하다면, 한반도 평화와 칠천만 민족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는 전쟁을 막아내는 것보다 앞서는 가치가 없으며, 전쟁을 막아내는 것보다 더 우선적이고 중차대한 정책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고 전쟁을 막고 평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반론한다. 미국은 전쟁을 일으킬 의사를 갖고 있겠지만 현재의 한반도 역학구조 속에서 전쟁은 불가능하며, 미국도 이를 알고 있다고. 그리고 지난 1990년대에도 결국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지 않느냐고. 이러한 주장은 일면 타당하다. 미국이 아무리 전쟁을 벌이려 해도 현재의 한반도 역학구조 속에서는 전쟁을 일으키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한반도 역학구조의 핵심에 <이북의 자위적인 무장력>이 놓여 있음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채,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군사적 강국이 이북의 배후에 있고 이 두 나라가 미국의 대북침공을 반대하는 한 미국은 대북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대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의 전쟁반대 정책도 미국이 쉽게 대북전쟁을 결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미국이 전쟁을 벌이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는 중국 때문도 러시아 때문도 아니다. 이것은 지난 94년도에 대북 공격계획을 취소한 이유가 중국 때문도 러시아 때문도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러시아와 중국이 격렬히 반대했지만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전쟁에는 직접 개입할 것으로 보는 것이야말로 비과학적인 아전인수격 사고라 아니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미국의 군사전략가들에게 중국변수 러시아 변수는 단순한 고려사항에 불과할 뿐 결정적인 변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미국의 대북침공을 억제하는 한반도 역학구조의 핵심적인 알맹이는 다름아닌 이북의 군사적 억제력, 즉 자위적 무장력이다. 바로 이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야말로 한반도 정세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핵심 전제이며, 요건이다. 결론적으로 한반도 전쟁억지력은 한반도 내부적 동력에서 찾아야 하며 한반도 내부에 전쟁억지력이 무력화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한반도 전쟁으로 비화한다는 것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모든 논의는 한반도 핵전쟁 위기의 현실성을 명확히 인정하고 여기에 기초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현실을 떠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② 군사적 억지력이 무너지면, 정치적 억지력도 무너진다

국내 일부 사람들은 이북의 처지는 이해되지만 핵무기 보유선언은 득보다 실이 많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평화활동가로 알려진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다. 정 대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정 대표의 주장은 장황하지만 요지는 간단하다.

즉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함과 동시에 대미 전쟁억지력를 확보하려는 양면전략으로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전략이다. 그 이유는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대북 적대정책 철회를 압박하는 데 거의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군사패권주의 강화에 역이용될 것이 뻔하며, 미국의 대북 전쟁정책에 대한 군사적 억지력으로도 별 효과가 없다. 핵억지력보다 오히려 정치적 억제력이 더 효과적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논거에 기초해서 <북이 '조선반도의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오면, 미국이 대북 제재나 군사 행동의 명분을 찾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미국 내부와 국제사회의 동의를 확보한다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저는 이를 '정치적 억제력'이라고 부르고자 하며, 북의 전략적 선택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라고 말하면서 점잖게 <리비아식 선핵포기 노선>을 충고하고 있다.

정욱식 대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비난하고, 이북의 처지와 입장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실천적 결론에서만은 미국의 정책적 의도에 딱 들어맞는 <리비아식 선핵포기 노선>을 이북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과연 우연일까?

정욱식 대표는 비교우위라는 개념으로 정치적 억지력과 핵억지력(군사적 억지력)을 대립시키고 선택적인 것으로 바라보면서 핵억지력보다 정치적 억지력이 더 효과적이므로 핵억지력을 포기하고 정치적 억지력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국제정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날의 국제정치의 현실에서는 군사적 억지력이 무너지게 되면 곧바로 정치적 억지력도 무너지게 된다. 이라크 사태가 보여준 심각한 교훈은 바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군사적 억지력이 막강하게 되면 정치적 억지력도 그에 비례해서 커진다는 것도 오늘날의 국제정치의 현실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진리이다.

군사적 힘이 막강한 나라와 민족은 세상 그 어느 나라나 민족도 깔보지 못한다. 그리고 세상민심과 여론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미국내의 전쟁반대 여론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이북이 군사적 억지력이 전혀 없고 저항능력이 없는 나라라면 전쟁의 위험에 대한 부담감이 적어지면서 미국내의 전쟁반대 여론도 약화될 것이며, 반대로 이북의 군사적 힘이 막강하여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엄청난 전쟁손실이 예상된다면 자연히 전쟁반대 여론도 확산될 것이다.

미국민의 여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정의와 도덕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득실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이 가져올 파장이 큰가 작은가의 여부이다. 군사적 억지력이 큰 나라와 전쟁에는 그 나라 여론과 민심도 보다 신중해지고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억지력이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정치적 억지력을 결정해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합리적 명분과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이다. 그리고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규정해 주는 중대한 요소가 바로 군사적 힘이다.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데에 있어서 정치적 억지력은 군사적 억지력 못지않게 중요하다. 어쩌면 군사적 억지력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와 현실의 진리는 정치적 억지력과 군사적 억지력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군사적 억지력이 강한 조건아래에서만 정치적 억지력은 제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군사적 억지력이 무너지게 되면 정치적 억지력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이다.

따라서 군사적 억지력(핵억지력)을 포기하고 정치적 억지력을 추구하는 것이 비교우위라는 주장은 언어도단이며, 궤변이다. 전쟁의 명분을 제거하는 것이 전쟁억제의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주장은 전형적인 강자의 무장해제 강요전략인 것이다. 전쟁은 전쟁의 명분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해와 요구 때문에 일어난다. 명분이 없어 일으키지 못한 침략전쟁은 없었다. 침략자들은 현실적인 필요와 능력만 있다면, 명분쯤이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전쟁명분만 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이조왕조 멸망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왕조를 치러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달라>는 명분으로 왜놈들이 쳐들어 온 침략전쟁이었다.

③ 악순환의 늪은 허구적 논리이다

무한대의 군비경쟁을 유도함으로서 지속적인 군비확대와 경제난 가중이 악순환되는 악순환의 늪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 미국이 노리는 바이며,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는 주장도 그럴듯하게 유포되고 있다. 지금 이북경제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과거 미소군비경쟁도 구소련의 붕괴에 한몫을 했었다는 것 때문에 이러한 논리가 더욱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 미국의 전략가들도 이러한 측면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다. 즉 이북의 무장해제를 꿈꾸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는다면 전국가적 역량을 국방 분야에 쏟아 붓게 만들어 이북경제를 황폐화시키려는 게 미국의 의도이다.

그렇다면 미국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군비경쟁을 포기하고 자진해서 무장해제를 하는 길이 있다. 이것은 리비아 방식이며, 이라크 방식이다. 이것은 전쟁의 명분을 제거함으로서 전쟁가능성을 없애고, 국제여론과 외교적 지원세력들을 동원하여 미국의 군사적 압박을 제거함으로서 국가의 안전과 평화를 수호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이라크에서도 실패하였으며, 리비아에서도 실패하였다.

무장해제를 통해 군사적 억지력이 사라지게 되면 정치적 억지력도 약화되어 미국의 요구에 대항할 수단이 없게 되어 끊임없는 요구에 굴종하지 않을 수밖에 없으며, 종국에는 미국의 지배와 굴종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냉엄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무장해제는 곧 죽음이다. 이것은 한미관계의 현실이 웅변해 주고 있다.

둘째는 자위적 무장력을 강화하면서도 무한군비경쟁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도를 찾는 길이 있다. 국방공업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양면적이다. 국방공업은 그 자체가 최종소비재 공업으로 국가적 자원과 노동력을 무한대로 소비할 뿐 그 자체로 국가경제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지 못한다. 그래서 소비적 낭비적 성격이 농후하다. 그 결과 국방공업은 경제에 짐으로 될 뿐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일면적으로 타당하다. 그렇다고 국방공업이 국가경제에 부정적인 영향만 미치는 것이 아니다. 현대적 국방공업은 그 자체가 고도한 기술공업, 중공업적 성격을 띠고 있다. 국방공업을 발전시키자면 현대적인 기술과 장비를 갖추어야 하고 높은 과학기술이 요구된다.

따라서 국방공업을 강화발전시키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현대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수반하게 된다. 21세기 현대기술의 총아인 컴퓨터 기술이 원래 국방공업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사실은 이를 증명해 준다. 또한 인공위성은 현대적인 최첨단 과학과 기술의 총아이다. 국방공업이 국가경제에 미치는 양 측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 중에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고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할 수 있다면, 무한 군비경쟁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수 있다.

자립적인 경제구조, 정확한 경제정책, 전사회적 단결이라는 3대요소를 옳게 결합시킬 수 있다면, 부정적 측면을 최소화하면서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하여 자위적 무장력을 강화하면서도 국가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따라서 무한 군비경쟁은 경제난을 확대시킬 수밖에 없다는 <악순환의 늪>은 일면적인 논리를 비약시킨 허구적인 논리이다.

④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미국의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장악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부시정부의 대외정책기조를 군사적 패권주의라고 규정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이러한 규정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군사적 패권주의의 핵심비밀은 잘 밝혀져 있지 않는 것 같다. 군사패권주의의 핵심비밀은 무엇인가? 그것은 군사력으로 제압할 수 없는 상황(적)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존재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 비밀을 정확히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현재 한반도 정세의 전망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이다.

미국이 한반도 정세(북미대결)에서 주도권을 틀어쥐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북미대결에서 이북을 군사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미국이 현재 심혈을 기울여 대북 핵전쟁 준비책동에 광분하고 있는 것도 선차적으로 이북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이북을 군사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군사력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급속히 약화 퇴조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한반도 정세발전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그것은 급기야 이남에 대한 지배력의 약화로까지 발전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지배력을 현상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북미군사적 대결에서 압도적 힘의 우세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은 미국의 군사적 힘의 압도적 우위(전략적 우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전략무기의 속성상 그것이 무기화가 상당정도 진행된다면, 전술무기의 우위는 무력화될 뿐만 아니라 전략무기의 양적 차이도 무의미해지게 된다. 미국은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활적으로 MD체제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설령 과학기술적으로 가능하다하더라도 실용화되려면 몇 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설령 실용화된다 하더라도 전략무기 방어체제는 명중률이 80%이상 되지 않는다면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름없게 된다. 따라서 이북이 핵무장 군사강국으로 등장하게 되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 우위에 기초한 기존의 북미관계는 근본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한미관계도 변화가 수반되지 않을 수 없다. 즉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이 바뀌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을 악의적으로 무시하면서 시간끌기 전략으로 나오면서 이북의 핵무장을 군비증강의 명분으로 활용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손해날 것이 없는 꽃놀이패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미국의 허장성세에 속아 넘어간 사고이다.

사실 군사적 공격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대화와 협상의지도 없는 미국으로서는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에 대한 아무런 대응수단을 찾고 있지 못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악의적 무시정책으로 나오면서 시간을 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을 핑계로 군비증강정책에나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한반도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대북정책이다. 그러한 것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고민이고 고통이다.

시간은 미국편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북에 대한 군사적 공격기회는 더욱 사라질 것이며, 이북은 정치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날 것이며, 경제적 봉쇄망에서 벗어날 것이며, 이북경제는 회복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게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남북관계는 더욱 강화발전될 것이며, 민족의 화해협력은 더욱 확대될 것이며, 민족공조체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북에 대한 봉쇄력이 붕괴될 뿐 아니라 이남에 대한 지배력과 영향력도 시간이 지날수록 퇴조할 것이 명백하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힘과 영향력의 건재함을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과시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3. 향후 전망과 과제

2.10 핵무기 보유선언 이후 북미양자는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정치외교적 대결전을 펼치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외교적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한 대결에 집중하고 있다. 2.10선언이 발표된 지 한달이 지난 현재 북미 그 어느 한쪽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기존의 정책과 노선,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쉽사리 현재의 총체적 대결양상이 바뀔 것 같지 않아 보인다. 따라서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양상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그렇지만 명백한 것은 시간은 결코 미국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미국으로서는 가까운 시일내에 이북의 핵무기 보유선언에 대한 응징차원의 정치외교적 군사적 대응수단을 내놓지 못하게 될 경우 한반도 정세(북미대결)의 주도권을 잃어 갈 것이 명백하다. 미국이 현재 내세울 수 있는 응징차원의 정치외교적 군사적 대응수단은 결코 많지 않다.

첫째는 한국과 중국, 러시아를 미국편으로 끌어들여 이북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박을 가하는 한편 이북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가장 급선무이며, 손쉬운 대응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국제기구를 동원하여 이북에 대한 외교적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북에 대한 경제봉쇄조처를 강화하는 것이다. 넷째는 군사적 공격수단과 조건을 확보하여 군사공격위협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대응수단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지금까지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내에 가시화될 조짐조차도 없다. 심지어 북핵 보유선언에 대한 외교적 압박마저도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중국조차도 비핵화의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이북의 우려사항도 동시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오히려 미국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백히 시간은 결코 미국편이 아니지만 그것이 곧바로 이북의 승리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없다. 아직까지 미국은 대북 적대시정책을 포기하거나 완화할 의사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이북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는 등 강경대결 입장을 굽히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북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국제적 우려가 완전히 불식되지 않는 조건 속에서 제2, 제3의 추가적 반격조처를 강행하는 것도 결코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이북은 공세적 입장을 확고히 견지하면서도, 이남의 정세나 주변국의 반응, 세계여론 등을 신중히 고려하여 향후 대응전술을 세울 것으로 보이며,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일지 미리 예측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향후 정세전망을 예측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본다.

첫째, 한반도 전쟁을 막고 평화를 수호하는 데에 모든 힘과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우리민족에게 전쟁방지보다 더 중요하고 선차적인 가치나 과제는 없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을 봉쇄하는 반전평화적 관점과 입장을 확고히 앞세우고 모든 사고와 판단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한반도 전쟁위기는 워싱턴으로부터 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부시 행정부의 전쟁을 불러오는 군사적 패권주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반전평화투쟁에 총력 집중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문제도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이지, 그것을 떠나 비핵화를 위한 비핵화는 무의미하다.

둘째, 6자회담은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와 협상의 공간으로 되어야 한다. 시간을 끌기 위해 대화를 위한 대화공간으로 변질되거나, 더 나아가 이북에 대한 압박공간으로 악용된다면, 그것은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거리가 멀며, 한반도 평화수호의 관점과도 대립된다는 점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정부는 실질적 대화와 협상공간이 될 수 있는 분위기와 조건을 만드는 데 정치외교적 역량을 총집중하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의도에 말려들어 이북을 압박하기 위한 6자회담 개최놀음에 놀아난다면 그것은 민족적 죄악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회담의 형식적 개최가 아니라 실질적 협상이 가능한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이다.

셋째, 민족의 화해와 협력을 비약적으로 강화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현재 미국은 대북압박을 위해 이남 정부와 국민들을 앞장세우려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주적이 누구인지 명백히 밝히라는 협박을 우리 정부와 국민들에게 하고 있는 미국정치가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명백히 깨달아야 한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은 평화의 길이고, 민족의 분열과 대결은 전쟁의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압력과 회유에 놀아나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대북압박공세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을 몰아오는 반민족적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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