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인권운동사랑방 부설 인권운동연구소 상임연구원)


올해로 13년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서강대에서 열리고 있는 '제6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를 보며 과거 경험한 불쾌한 기억 두 가지를 떠올리게 된다. 

불쾌한 기억 하나 : '박홍'

95년 1월의 일이다. 서강대에서 신입생들에게 좌경거부서약서를 받아 문제가 됐다. "본인은 자유민주 체제를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통한 좌경폭력혁명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가담하지 않을 것임을 서약합니다"라는 각서에 신입생 면접과정에서 서명을 요구한 것이었다.

인권단체들은 이 일이 알려지자 서강대 정문에 가서 "사람은 누구나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가 있고, 의견 및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지적하며 좌경거부서약서에 대한 공식적 사과와 철회를 요구했다. 이 사건의 핵심에는 당시 총장 박홍 씨가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서강대에서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가 열렸다. 박홍 씨는 어김없이 출현하여 "북한은 사상적으로 미쳤고, 남한은 썩었다"는 특유의 도발성 발언으로 언론을 즐겁게 해주었다. "옛날에는 대학 내에 주체사상 동조자가 많았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찌꺼기들이 남아있다"며 본인의 특허가 된 발언도 덧붙였다.

사상·양심의 자유를 공격하는 전력과 발언을 갖고 소위 '인권'을 논한다는 것을 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박홍 씨만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장소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떠올리게 됐지만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그가 놀린 입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탄압과 고초를 당했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대북인권공세가 북한인민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지 두렵다.
 
소위 '인권회의'를 하고 있는데, 웬 찬물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옹호하는 인권에서, 표현의 자유는 전쟁 선동과 한 운명 공동체에 대한 악의적 감정 고취를 표현의 자유로 여기지 않는다. 북한의 '그 날 이후(붕괴 또는 변화 이후)'를 운운하며 '전쟁을 유발시키는 것은 유화정책이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그들의 북한인권은 그런 태생적 모순을 안고 있다. 

불쾌한 기억 둘 : 'NED와의 만남'

또 하나 그들이 열고 있는 행사의 돈줄인 NED가 내게 안겨준 기억을 얘기해볼까. 97년 NED의 아태담당자라는 사람이 사랑방 사무실을 찾아왔다. 당시 대표인 서준식 선생과 내가 손님을 맞았다.

너무나 당황스런 만남이었다. 우리 사무실 임대료가 얼마인지, 직원의 숫자와 월급이 얼마인지부터 물어보는 황당한 만남이었다.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면 그걸 다 책임져줄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모욕스러웠다. 민간단체의 독립성이란 걸 도대체 뭘로 보는 것인가.

얘기 방향을 인권관이나 활동 내용으로 돌리자, 상대방의 안색이 달라졌다. 부랴부랴 짐을 꾸리더니 사무실을 떠나갔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몸짓이었다.

99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 인권연구소의 초청으로 뉴욕에 갔을 때 40여 개의 인권관련 재단과 단체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NED였다. 우리를 맞은 것은 나를 찾아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나를 보며 당황스러워 하던 그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독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민간단체에게 그런 식의 접근을 했던 NED가 왜 이런 국제회의의 돈줄일까? 북한 인권문제에 돈을 퍼붓는 의도는 무엇일까? 너무나 뻔한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내가 어떻게 먹고사는지 알려주겠다. 주말에 식당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생계를 해결하고 사무실에서 주로 먹고 자며 주중의 시간을 인권활동에 보낸다. 내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권단체들은 그렇게 고달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산다.

그들이 북한인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부패의 냄새를 본능처럼 맡을 수밖에 없는 내 직업 때문이란 걸 이해하길 바란다. 2008년까지 매년 2천4백만 달러가 투여되는 미국의 '2004 북한인권법'의 전개논리가 그들의 회의 내용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는 것을 못 본체 지나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북한인권법 : 미국식 '자유의 성전' 교과서

북한을 상대로 한 소위 '자유의 성전'의 교과서가 될 북한인권법은 북한을 전체주의 정권으로 못박는 것으로 시작된다. 북한의 시장경제 증진 등을 위한 활동에 막대한 돈을 투여함으로써 대북인권운동 양산과 탈북자 증가 유발을 도모하고 있다. 인도주의적 지원에는 갖은 조건을 달아 생존권 위협 가능성을 증대시키면서 미국의 소리 방송을 포함하여 대북한 라디오 방송을 하루 12시간으로 늘리는 데는 막대한 돈을 할애하고 있다.

이 법에 따라 엄청난 보고서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그것들이 쌓여감에 따라 대북한 인권공세의 파고는 높아만 갈 것이다. 그리고 국제대회에 모인 그들은 막강한 후견 속에서 북한 때리기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대북인권공세는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문제를 외면하고, 북한인민의 인권향유를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독이 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북한인권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한 인권을 위해서 힘써 이용하던 국제인권기준과 국제사회의 협력을 북한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다루자는 얘기도 아니다.

북한에는 당연히 인권문제가 있다. 권력의 일반적 속성에 따른 인권문제, 전쟁과 체제 위협, 자연재난과 경제적 곤란에서 파생하는 상당한 인권문제가 있으리란 건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은 인권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상식이다. 인권의 보편성은 그 기준만이 아니라 적용에도 해당된다.

북한인권을 다루는 전략은 인권을 목적이자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인권적 방법만이 인권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는 '평화적 방법'을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죽음을 부르는' 방법으로서 '전쟁선포'와 마찬가지이다. 그들도 알겠지만 이것은 무고한 인민의 희생을 대가로 한다. 인권을 조건으로 대북지원에 압박을 가하는 북한인권법도 마찬가지다. 북한의 붕괴 또는 체제전환을 목적으로, 북한에 가장 적대적인 미국이 채택한 수단으로서의 인권은 인권의 정치도구화의 극치이다.

식량지원은 인권증진에 기여한다.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는 말처럼 굶주리는 사람에게 식량을 조건 없이 제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인권옹호는 없다. 그동안의 국제사회의 지원은 분명 인권증진에 기여해왔다.

인권을 인도주의적 지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지원과 인권대화는 동시에 추구돼야 하는 일이다. 북한인권을 빌미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약하려는 시도는 인권활동으로 가장될 수 없는 일이다.

인권의 불가분성 : 인권.평화.통일은 한 실타래

인권의 불가분성, 상호의존성을 통해 본다면, 인권·평화·통일의 문제는 한 실타래이며, 민주적 국제관계라는 조건, 인권침해에 대한 공동책임의식, 각종 경제제재 조치가 인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자유권과 사회권에 대한 동시적 접근이 절실한데, 자유권을 빌미로 사회권을 압박하자는 주장은 용납될 수 없다.
 
인권대화는 북한의 체제와 평화와 안전보장 속에서 진행돼야 한다. 인권이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는 '구조'를 다루고 있는 개념이 '발전권'이다. 유엔에서 86년 채택한 '발전권선언'에서는 "국가의 주권·국가적 통합·영토보전에 대한 외부의 지배·점유·위협, 그리고 전쟁의 위협 등"을 위해 요소로 지적하며 "합당한 환경의 형성"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 사회가 처해있는 국제적 상황은 전쟁위협과 긴장으로 점철돼 왔다. 한 나라의 인권신장을 위해서는 대내외적 평화의 확보가 중요한 과제이며, 북의 인권신장을 위해서는 한반도에 평화적 국제질서를 조성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

세계 어디서나 국가는 인권침해자이고 주된 인권침해자이다. 따라서 국가가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동일한 잣대로 북한인권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에는 인권문제가 보편적이라는 상식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냉전적인 반북 정서를 담은 북한 때리기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정치범수용소의 존재 여부 및 그 규모를 대표적으로 제기한다. 이는 독립된 대규모 수용소가 발견된다면 자연스럽게 밝혀질 문제이다. 그러나 20만 명이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돼 있다는 미 북한인권법의 주장은 북한 전체를 수용소군도로 인식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주장이다.

한국의 감옥에 평균 5-6만명의 수인이 있고, 그 중에서 소위 양심수(정치범)가 차지하는 숫자가 몇 백 명에 불과할 때도 사회가 불안하다고 했는데, 20만 명의 정치범이 있는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대표적으로 2십만명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미국내 재소자가 2백만 명이며 소년원과 구치소를 포함하면 5백만 명이 넘는 사회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북공세 속에서 쏟아져 나온 북한인권에 대한 많은 문제들 가운데 현재 우리가 명확한 답을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잘 모른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나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탈북자 증언 : 동기와 상황에 따른 조작가능성 고려해야

미국의 북한인권법에 나열돼 있는 조사결과나 수많은 북한인권보고서는 탈북자의 증언에 기초해있다. 탈북자 증언 일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상황에 따라 조작되고 이용될 수 있는 불안한 이주자의 증언이라는 것, 그 출처가 일방적이며 불분명하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또한 많이 제기되는 수용시설 내의 인권침해는 보편적인 인권문제이다. 2002년 유엔에서 채택된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가 발효되고 있지 않다는 데서 드러나듯 각 국은 수용시설에 대한 국제기구 방문조사를 꺼려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한정부나 남한 정부도 예외는 아니다.

보편적인 국제기준의 수용을 각 국에 촉구하는 한편, 북한도 그 절차에 따라 수용시설 내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기구의 모니터링을 수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북한만의 수용시설이 문제이고, 북한을 때릴수록 인권의 실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는 과연 인권실현을 위한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 의심될 뿐이다.

인권문제에 관한 한, 남북한 모두가 국제인권기준을 대화와 협력, 통일 노력 과정에서 존중해야 한다. 체제 경쟁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의 인권수준에 대한 자기반성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또한 국가보안법을 비롯하여 많은 인권문제로 유엔과 국제인권단체의 비판을 계속 받아왔고, 한국의 인권운동은 국제인권기준을 한국의 인권상황 개선에 적극 활용해왔다. 북한도 그리하기를 바란다면, 북한을 고립시키고 대결을 조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북한을 대화의 당사자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북한 정부는 유엔의 주요 인권협약의 가입국이며 그에 따른 보고서 제출의무를 수행해왔다. 북한이 거부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일방적 정치공세의 산물인 대북결의안일 뿐이다. 따라서 북한이 유엔과 국제사회와의 인권협력 채널을 지속시킬 수 있도록 북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제사회가 해야 할 일은 정치적 공세를 펼치는 행위자들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북이 진정한 인권대화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정치공세, 인권의 도구화 배격해야

대북공세를 취하는 그들이 항상 투덜거리는 '접근가능성'의 문제는 상호적인 것이다. 외부의 압박이 북한을 위축되게 하고, 체제붕괴의 불안감으로 경직된 상대방에 대한 외부의 접근은 더욱 어려워진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이 내놓은 '북한인권법안' 이다. 부시행정부는 북에 대한 기본정책으로 체제변형을 시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상호신뢰와 협력을 말하는 것은 립서비스일 뿐이다. 안정적인 대화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역할이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존재하는 인권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며 평화 없는 인권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체제보장과 전쟁위협 제거를 위해 노력하자는 것, '인권은 아침식사와 함께 시작된다'는 말대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을 조건없이 제공하자는 것이다.

또한 북한이 안고 있을 인권문제는 공동의 대화와 과제로 풀어가자는 것, 예를 들어 남북 공동으로 사형제도를 폐지하고, 구금시설을 개혁하고, 고문방지협약 선택의정서에 가입하고, 인신매매나 이주자인권침해 등에 대한 공동캠페인을 전개하는 등의 노력을 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서 절실히 요구되는 '대화'를 가로막고 북한에 위협을 가하는 정치공세로서의 인권의 도구화를 배격하자는 것이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간 화해 협력이 강화되고 한반도 평화정착 노력이 꾸준히 진전돼 왔다. 이로 인해 남한 사회가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남측 인사들의 방북이 늘어나면서 북한 인민들도 대남적대의식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남북관계에서의 냉전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남북한 인민 모두의 인권보장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서 북한의 '그날 이후'를 공공연히 외치는 소위 인권대회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 실타래를 푸는 일이 험난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인권이란 말을 되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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