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기고는 통일뉴스가 신년초부터 진행한 <신년인터뷰-"2005 통일을 듣는다"> 연재물에서 14번째로 인터뷰한 정도상 통일맞이 집행위원장의 <김 주석 문제, "합법적으로 매듭풀고 가야">기사와 관련, 독자들이 ‘의견나누기’에 올린 글들에 대한 정도상 집행위원장의 답변이자 반론입니다. 남측에서의 ‘미군철수 및 민족자주 문제’와 관련 독자 여러분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합니다. 아울러 정식 반론을 기고 형태로 보내올 경우 이를 게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 편집자 주


정도상(통일맞이 집행위원장, 소설가)


1. 냉전의 풍경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 종식 이후에 이 땅은 분단되었다. 분단의 상처가 얼마나 참혹했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논하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분단 60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이념의 분단선을 만들었다. 그것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적대적 차별관계를 넘어서는 극단적인 적대관계를 형성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단은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 그리하여 내면의 분단은 일상화되어 생활의 곳곳에 깊게 뿌리내렸다. 사람들은 그 사실도 모르고 살았다. <홀로 가는 저 등산객 간첩인가 다시 보자!> 설악산이나 지리산에서 문득 만나는 푯말, <자수하여 광명 찾자!> 라는 구호가 난무했다. 그것은 냉전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의 인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그 밖의 다른 대부분의 동물 종을 구별짓는 점은 바로 ‘인간들은 서로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고양이에게 다른 한 고양이는 언제나 또 하나의 고양이였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인간사회에서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조건들을 반드시 충족시켜야 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만 조심스럽게 인간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고유의 특성으로 타고 태어났다. (알랭 핀킬크라우트의 <잃어버린 인간성> 중에서)

그랬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개새끼'라고 불렀고, 아무 증거도 없이 '밀정'이라고 불렀다. 그런 태도는 반통일세력이 그들과 생각이 다른 모든 인간을 '빨갱이'로 일반화해버리고 처단하고픈 욕구에 시달리는 내면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내면의 작동원리가 동일한 것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대하듯, 백인이 흑인을 대하듯 타자(他者)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냉전의 풍경은 소위 진보진영에도 넓게 퍼져 있다.

그런 태도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런 태도의 사람을 진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진보의 탈을 쓴 사이비 진보인 것이다. (사이비 진보는 종종 좌경모험주의의 길로 나가기 십상이다. 항일무장투쟁 시절, 친일지주든 반일지주든 가리지 않고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타도대상으로 삼은 자들이 바로 사이비 진보다. 진정한 진보는 친일지주는 용서하지 않았지만 반일지주는 반드시 제휴하여 통일전선을 이루어냈었다.) '

나와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고 사유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찌 사이비 진보가 아닐 수 있단 말인가? 진정한 진보는 생각이 다른 것을 존중하고, 왜 생각이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여 차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와 태도를 보여줘야만 한다. 적어도 진보진영 내부에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2. 잃은 것은 예술이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

일제 시절 카프의 문학평론가 박영희가 감옥에 갔다가 출옥한 뒤에 '잃은 것은 예술이고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라고 선언하며 변절했다. 그 유명한 변절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 되고 있다. 그들 중의 몇몇은 '뉴 라이트'가 되었고, 또 몇몇은 동료를 장기수로 만들어 길고 긴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어 놓고 소위 '광명'을 찾았다. 광명을 찾은 그들 조선노동당의 옛 노동당원은 변절의 대가로 보수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미국의 전략과 전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은 북의 붕괴이며, 여러 전술 중의 하나가 탈북자들의 '기획 입남(入南)'과 '북 인권법안'의 실행자가 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와 자유의 핵심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변절자들은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사는 세상'을 위하여 복무하곤 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역사가 증거하듯이 변절의 법칙이었다. 대개의 변절자들은 훨씬 더 가혹하게 옛 동지 혹은 동료들을 팔아 생을 연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변절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좌경모험주의자와 상대의 의견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극단적인 강경파 중에서 변절자들이 나오는 것은 왜일까? 박영희가 그랬고, 김영환이 그랬다.

결국 그들은 완벽하게 적의 진영으로 귀순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을 전면에 내세웠다. 박영희는 예술을 버리고 친일파가 되어 국민문학이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얻었고, 강철 김영환과 그 일파는 평화와 통일을 버리고 신 자유주의(이것은 세계화와도 다르다. 오직 북을 반대하면서도 극우파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합리성 뒤에 숨어 평화보다는 전쟁을, 통일보다는 분단을, 민주주의보다는 파시즘을 본질적으로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민족통일에 찬성한다. 그러나 본질은 미국의 전략전술에 근본적인 동의가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그럴 듯한 모자를 쓰고 자신들의 본질을 은폐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CIA의 자금을 받아 배고픔 때문에 국경을 떠도는 북의 주민들을 탈북자로 만드는 범죄행위를 일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북의 인권을 말할 자격이 없다.

작년에 일본에다 탈북자 망명정부를 세우려 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국제적으로 망신을 자초하는 민족 배신자들의 망명정부는 결국 동네에서 흔히 보는 복덕방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3. '미군철수는 민족자주의 핵심이 아니다'에 대하여

민족자주란 무엇인가?

'우리민족끼리만' 자주를 내세우는 것은 민족자주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정한 민족자주는 '우리민족끼리'와 '세계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연대하는 것'의 동시성이 없다면 결코 실현될 수 없다. '우리민족끼리만' 자주를 주장하는 것은 국수적, 쇄국적, 고립적 단견에 불과하다. 타자를 완벽하게 배제하는 주체의식은 전체주의 혹은 파시즘으로 전화될 위험성이 아주 농후하다. 우리는 히틀러에게서 타자를 배제하는 주체주의를 보았다. 히틀러가 내세운 게르만 민족의 민족자주는 결코 동의 받을 수 없었다. 아울러 팔레스타인들을 저토록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모는 것은 물론이고 서슴지 않고 학살을 저지르는 이스라엘의 민족자주도 동의 받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단일민족의 혈통만을 강조하는 무조건적인 민족자주는 선(善)이 아니다. 참된 민족자주는 다른 민족과의 조화와 균형 속에서 자기 민족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 민족의 경우는 아주 특수하다. 특히 남쪽은 거의 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자주는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 진보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민족자주의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민족자주를 아주 좁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런 경향은 우물 안 개구리의 자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을 닫힌 자주라 부른다. 닫힌 자주는 교조주의와 좌경모험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우물 안에서 혼자 잘난 체 하고, 혼자만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물 밖의 세계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는 우물 밖의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열린 자주, 즉 국제연대와 함께 하는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이야말로 민족자주를 실현하는 참된 길임을 명심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한미군 철수가 민족자주의 핵심은 아니다. 사실 해외미군의 재배치와 관련하여 미국은 한반도에서 미군(특히 보병부대)의 철수를 강력하게 바라고 있다. 일본의 오끼나와 기지에 신속배치군을 창설하여 유사시 신속하게 투입하는 전략으로 서서히 방향 전환을 하고 있다.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한다면, 미군은 공군과 해군을 이용한 전투에만 참여하고 싶은 것이 미국의 속셈이다.

공군과 해군이 육상을 초토화시키면 보병이 진출하여 소위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이 설거지를 한국군 보병에게 맡겨 미군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되기를 미국은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해외미군 재배치의 핵심적 사항이다. 한반도에서 보병의 철수는 미국이 원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미군의 철수는 곧 전쟁의 위험이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미군철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주한미군의 대부분이 일본이나 태평양의 섬들로 철수한다고 해서 달라는 것은 무엇일까? 주한미군을 철수한 뒤에도 여전히 한미연합사의 작전지휘권이 미국에게 있고, 여전히 남측 정부는 허구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 상태에 머물러 있고, 남북의 교류와 협력사업에 대해 지금처럼 강력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고, 국가신용등급 조정 등의 경제적 협박을 일삼고 남측 정부와 국민들은 그것에 마냥 휘둘리고 있다면, 그것을 민족자주라 부를 수 있을까? 미군철수가 민족자주의 상징일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개인적으로 미군철수를 강렬하게 소망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민족자주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민족자주의 핵심은 우리 민족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다. 그것을 직시해야만 한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만 하는 일은 이 땅의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미국의 체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체제는 알게 모르게 거의 모든 분야에 내면화되어 있다. 미국이 북을 ‘악의 축’이라고 그토록 쉽게 단정 짓는 것처럼 의견이 다르다고 무조건 ‘악마’ 취급을 하는 것도 미국의 체제가 내면화되어 있는 현상 중의 하나인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미국의 체제는 이 땅을 허구적 평등과 실질적 예속의 상태로 지배하고 있다. 외교통상부의 외교관들과 공무원들의 친미 예속 상태는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중산층 이상의 계급의 친미 예속 상태 역시 심각한 지경에 빠져있다. 미군이 철수하면 민족자주가 저절로 획득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분단 60년의 냉전체제는 곧 미국체제로 내면화되었다. 이것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터뷰에서 해외미군 재배치의 전략과 미군철수의 관계를 설명했는데, 이 부분이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스스로 밝힌 바 있다. 나는 2005년을 자주통일의 전환적 국면으로 열어가는 해도 만들기 위해서는 미군철수 운동도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유일한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인권을 내세워 민족자주를 심각하게 해치고 있는 미국의 북 인권법안과 싸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미국은 6자회담을 통해 핵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끝끝내 북의 붕괴를 노리기 위한 장치로 북 인권법안이라는 술책을 생각해냈다. 북 인권법안의 이전에도 미국은 ‘아시아 민주주의 기금’이란 정체불명의 자금을 중국의 동북3성에 뿌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법적으로 북 붕괴자금을 위에서 말한 변절자 그룹과 반통일세력에게 공공연하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인권은 돈벌이였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논리를 앞세우면, 특별히 대항할 논리를 찾지 못하고 궁색해지는 것이 남측 정부당국자들이며 국민들이다.

미국의 북 인권법안과 붕괴 전략이 민족자주를 해치는 정도는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 작년에도 필자는 <대지의 운명공동체를 위하여>라는 기고문을 통해 미국의 북 인권법안의 허구성에 대해 지적한 적이 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미국의 북 인권법안과 싸우는 것이 긴급하고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에서 민족자주의 문제, 민족자존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4. 통이(通異, 統二)를 위하여

‘같다(同)’와 ‘다르다(異)’ 중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에 근접한 단어를 고르라면, 나는 ‘다르다’를 꼽겠다. 무지개는 단일한 색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떤 경우에도 단일한 색깔로만 이루어진 무지개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일곱 색깔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색의 조화를 통해서만 무지개는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무지개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걸어온 지난 길을 돌아보면, 무지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타자(他者)를 무지개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와 자아의 동일시를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정체성의 추구와 강요에 익숙한 탓이었다. 그것은 내 안의 파시즘이었다. 내게 있어 나는 파시스트지만 타자에게는 파시스트가 아니고 싶다.

‘다르다’보다 ‘같다’를 강요하는 것은 개인이나 사회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일본의 ‘이지메’나 우리의 ‘왕따’가 바로 ‘다르다’보다 ‘같다’를 강요하는 경우였다. 왕따나 이지메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또래집단에서 행해지는 폭력의 한 형태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폭력으로 확장되었을 경우에는 문제가 훨씬 심각해진다. 뿐만 아니라 타자에 자행하는 폭력의 참혹함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미국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차별,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매카시즘의 광풍, 유대인 학살, 르완다 학살, 보스니아 내전,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학살, 뉴욕의 9.11 테러, 이어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침공 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사회적 문화적 국가적 폭력의 한 형태였다. 모두가 동일하기만을 바라고 나아가 폭력으로 ‘같음’을 강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인간존재를 근본에서 부정하는 폭거요 야만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것들이 소통하는 바탕 위에서 존재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소통하는 것이 바로 통이(通異, 統二)인 것이다.

남북통일은 반드시 통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통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이’다. 통이는 타자성을 인식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겨우 가닿을 수 있는 문화적 과정이다. 본디 하나였으니 무조건 합치자는 구호의 범람은 통일에 심각한 장애만 형성할 뿐이다. 통이의 과정이 없는 통일은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통일은 통이의 과정, 그것이 문화적 과정일 때 비로소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미래의 문화적 고향’이 될 것이다. 문화적 고향이 아닌 통일은 그 속에 비극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작가>2004년 여름호, 필자의 보고문 <통이를 위한 기나긴 그리움의 길 위에서> 중에)

인용문이 제법 길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통이란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교류하며 협력하여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이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통일 지상주의는 우리 민족을 거대한 고통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할 것이다.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통이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만 남과 북이 조금씩 양보하면서 행복하게 합의할 수 있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겨우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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