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pbpm@chol.com)


한일 협정 문서 공개가 북일 수교에 미칠 영향

1월 17일 공개된 한일 협정 문서와 관련하여 큰 파문이 일고 있는 가운데 문서 공개가 북일 수교 추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남한과 일본의 협상 과정 및 그 결과에 북한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한일 협정 자체가 북일 수교에 큰 걸림돌이 되거나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첫째, 남한과 일본 사이의 협상 과정이나 결과가 어느 정도 밝혀짐으로써 일본의 협상 기술이나 전략이 부분적으로나마 드러났다. 이에 따라 앞으로 일본을 상대할 북한은 조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일본이 문서 공개를 반대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둘째, 협정에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명시하고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남한이 법적으로 북한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점은 조금도 새로운 게 아니다. 더구나 남북이 극단적으로 대치했던 1960년대엔 남한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북한을 무시하고 반대했던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셋째, 남한 정부가 일제 식민 통치 피해자들의 몫을 가로채기는 했어도 북한 지역에 돌아갈 보상금까지 챙긴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 이전에 북한의 청구권 문제에 대해 북한과 구체적 교섭을 하지 않을 것을 상호 약속하는 방법”을 고려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헌법상 주권은 이북 지역까지 미치기 때문에 청구권 문제 해결에는 북한 지역에 관련되는 청구권도 포함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1월 21일 “당시 남조선 당국은 일제시기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됐던 피해자 103만 2천여 명에 대해 1인당 생존자는 200달러, 사망자는 1천650달러라는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금액을 요구했다”고 비판했다.

북한은 지금까지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100여만명의 학살만행, 840여만명의 강제련행, 20여만명의 일본군 ‘위안부’ 등 중대 인권피해 문제”에 대해 “별도의 사죄와 함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을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으로 강조해오고 있는데, 일본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 적어도 120억달러 안팎의 자금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제안이 아니라 자민당 간부의 사견이었지만 10년전 일본쪽에서 먼저 언급한 액수이기 때문에, 남한이 받았던 8억 달러라는 “턱없이 적은 금액”에 크게 영향받지는 않을 것이다.

넷째, 남한이 ‘피해 보상’이 아니라 ‘경제 협력’이나 ‘독립 축하’ 명목으로 돈을 받은 사실 역시 새로운 게 아니다. 북한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한일 협정이 굴욕적이고 반민족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해왔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1930년대부터 항일 무장 투쟁을 하던 김일성 부대가 1940년대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북한은 승전국으로서 패전국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일본과의 정상 회담을 통해 북한 역시 보상이든 배상이든 ‘경제 협력’의 틀 속에서 과거를 청산하기로 합의한 터여서 한일 협정을 통해 건네진 돈의 명목이나 성격이 북일 수교에 문제될 것 같지는 않다. 참고로 조선의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과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대신이 2002년 9월 17일 평양에서 서명한 ?조일 평양 선언?의 제 2항은 다음과 같다.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조선인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력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통절한 반성과 마음속으로부터의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다. 쌍방은 일본측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 대하여 국교정상화 후 쌍방이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기간에 걸쳐 무상자금 협력, 저리자 장기차관 제공 및 국제기구를 통한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경제 협력을 실시하며 또한 민간 경제활동을 지원하는 견지에서 일본 국제협력은행 등에 의한 융자, 신용대부 등이 실시되는 것이 이 선언의 정신에 부합된다는 기본인식 밑에 국교정상화 회담에서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규모와 내용을 성실히 협의하기로 하였다....”

북일 관계 개선에 대한 남한의 견제와 미국의 반대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북일 수교 협상은 2002년 9월과 2004년 5월 평양에서 열린 2차례의 양국 정상 회담에 힘입어 곧 타결될 것 같았지만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그 배경으로는 일본인 납치와 관련된 문제, 북한의 핵개발, 남한의 견제, 그리고 미국의 반대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가운데 미국의 반대가 북일 수교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과거에 중국이나 베트남 등과 국교 정상화를 계획하고도 미국의 반대로 추진하지 못하다 미국의 승인을 받고서야 수교에 이를 수 있었듯이, 북일 수교 역시 미국의 허락 없이는 진전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북한을 적국으로 삼고 있고 일본은 여전히 미국에 매우 의존적이거나 거의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은 왜 한일 국교 정상화를 1950-1960년대 “가장 급선무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면서까지 밀어붙였고, 그 과정에서 남한과 일본을 통해 북한을 어떻게 압박하고 고립시켰으며, 남한은 미국과 일본을 통해 북한을 어떻게 견제하고 반대했는지, 당시 미국 외교 문서들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첫째, 미국이 1950년대부터 남한과 일본에게 상당한 압력을 넣으며 두 나라의 관계 정상화를 이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 문제에 있었다. 냉전이 치열해지던 1950년대에 미국은 남한을 동북아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진열장”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공산권과 경쟁하는 가운데서 남한이 북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세계에 보여줌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도 정치 안정과 경제 성장을 잘 진전시키는데 반해, 남한은 미국이 막대한 원조를 ‘쏟아 부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의붓아들’ 같았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경제적 부담을 일본과 나누어 갖기 위해 남한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손을 잡도록 했던 것이다. 일본이 남한에 ‘피해 보상’이 아닌 ‘경제 협력’ 명목으로 돈을 건넬 수 있었던 이유요, 박정희 정권이 국민에게 돌려줘야 할 피해 보상금까지 가로챌 수 있었던 배경이다.

둘째, 한일 협정을 미국이 밀어붙인 다른 이유는 안보 문제에 있었다. 동북아에서 북한의 고립화를 포함한 공산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미국-일본-남한의 삼각 공조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남한과 일본이 관계 정상화를 이루지 않는 한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한일 협정을 추진하면서 부수적으로 취했던 전략은 다음과 같다.

1957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하자, 이에 맞서 미국도 1958년 1월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며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놓기 시작했다. 또한 1960년엔 남한 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북한의 위신을 훼손시키고 북한의 영향력과 북한에 대한 승인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며, 남한 정부에게는 북한에서의 간첩 활동을 더 활발하게 하도록 지원하고, 북한 내에서는 인민들이 정권을 반대하도록 부추기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다 1964년 소련에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남한을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며 일본과의 수교를 서두르게 했다.

셋째, 1960년 남한의 허정 외무부장관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주한미국대사에게 자신이 한일 국교 정상화에 ‘특별히’ 힘쓸테니 미국은 일본 정부의 재일 동포 북송을 막는 데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일본은 북한과 1959년 8월 인도에서 재일 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을 맺고 1959년 12월부터 조총련계 동포들을 북한으로 보내기 시작했는데 남한은 미국에게 이를 막아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넷째, 한일 협정이 비준되고 1년이 지난 1966년 7월 일본을 방문한 미국 러스크 국무부장관에게 일본 시나 외무부장관은 남한과의 관계가 잘 진행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두통거리’가 있다고 했다.

“일본이 북한에 공장 설비를 수출하려는데 그러려면 북한의 기술자들이 일본에 들어와 정밀 검사를 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남한이 북한 기술자들의 일본 입국을 반대하기에 일본은 한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를 3년 이상이나 연기했다. 이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완전히 정착되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북한에 대해 수출을 재개하고 싶은데, 남한은 일본이 만약 북한 기술자들의 입국을 허용하고 설비를 수출한다면 한일 관계가 근본적으로 손상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러스크는 일본이 북한과 무역하는 것은 모기에게 한 방 쏘이는 것에 불과할 정도겠지만 모기에 쏘임으로써 말리리아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라며 일본과 북한과의 관계보다는 남한과의 관계가 훨씬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북한과의 교역 규모나 액수는 보잘 것 없을지라도 공산권의 영향력 침투를 경계해야 된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듯 남한과 일본은 미국의 간섭 및 압력 아래서 가까워졌고 북한과 일본은 남한과 미국의 견제 및 반대로 멀어져갔다.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8월까지 북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에 대해 미국은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까. 그리고 남한은 어떠한 자세를 취하는 게 바람직할까? 분단 60주년을 맞으며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고민해볼 대목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동시에 송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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