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식(통일뉴스 상임고문)



1. 들어가는 말


내년(2005년)이면 한미관계 60년이 된다. 일제 40년 간의 강점 하에서 식민지 통치 하에 있던 우리민족은 8.15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이라고 희망을 가졌으나 한반도에 대한 미.소 양군이 38선을 계선으로 강점하게 되었고 그러한 한반도 분단과 민족분열은 반세기 이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민족은 외세의 굴레와 간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남한의 경우 미군의 주둔은 21세기에도 변함없이 지속되는 것으로 되어있으며 그와 병행하여 한미동맹 역시 장기성을 띨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과 같은 한미동맹의 강화는 민족분열의 역사를 극복하는데 역기능으로 작용할 것이며 따라서 한미동맹의 성격이 달라질 때만이 순기능적 역할을 한다고 볼 수가 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민족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분열되었는가 라는 것과 민족분열의 극복과 한미동맹이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가를 간략히 살펴본 것이다.


2. 민족분열


일제 패망에 따른 한반도 분단과 민족분열은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 하에 있었으며 2차대전시에는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 및 물적인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을 했기에 일어났다. 이에 따라 한반도 문제는 일제 패망에 따른 미국, 소련, 영국 등 전승국에 의한 전후 처리의 대상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한반도 분단과 민족분열은 우리민족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미국, 영국, 소련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또한 그들의 정치적 흥정에 따라서 처리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분단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주로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그대로 관철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반도의 분단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미국의 루즈벨트와 영국의 처칠은 당시 식민지 종주국의 두목들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1) 종전기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구상

한반도에 대한 전후 처리문제는 2차대전 종전을 앞두고 미국을 중심으로 영국, 소련, 중국(장개석) 수뇌들의 네 차례의 회담(카이로, 테헤란, 얄타, 포츠담)에서 합의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한 합의가 해방 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3국 외상회의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1) 카이로 회담

1943년 11월 24일 카이로에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아시아의 장래를 토의하기 위해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개석과 회담을 하고 11월 말에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이 참가하지 않은 것은 중국의 장개석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중국 내에서의 장개석 정권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중국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발표된 카이로선언에서는,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조선민중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유독립 시킬 것”으로 합의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적당한 시기’는 루즈벨트의 구상으로서 40년간의 신탁통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되어 있다.

(2) 테헤란 회담

카이로 회담을 마친 중국의 장개석을 뺀 루즈벨트와 처칠은 1943년 11월 28일 테헤란에 가서 소련 스탈린과 함께 미.영.소 수뇌회담을 진행했다. 이 회담은 카이로 회담에 이어서 열린 회담으로서 카이로 회담에서 스탈린이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린 회담인 것이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자기들의 식민지인 필리핀을 예로 삼아 조선이 완전독립을 획득하기 전에 약 40년간의 훈련기간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제안을 했으며, 이 제안에 스탈린이 찬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얄타 회담

1945년 2월4일 미.영.소 수뇌들이 얄타 회담을 개최했는데 이는 연합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시기였다. 따라서 종전후 유럽의 정치 군사문제와 국제평화기구 창설문제, 그리고 소련의 태평양전쟁 참전문제 등이 토의되고 그에 대한 합의를 이뤘다.

이 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조선의 신탁통치기구 설치문제를 구체적으로 스탈린에게 제안을 하면서 신탁통치 기간은 20년 내지 30년으로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는데, 이에 스탈린은 신탁통치에 동의는 했으나 통치기간과 한반도의 외국군 주둔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고 한다. 그리고 신탁통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주장을 했는데 이에 대해 루즈벨트는 부정적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얄타 회담 후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인해 트루만이 대통령직을 맡게 되자,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안에 대한 스탈린과의 합의를 확인하기 위해 홉킨스를 특사로 하여 소련을 방문케 하고 스탈린과 회담을 했는데 이때 4개국 신탁통치에 합의를 하고 그 기간은 25년, 10년, 5년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4) 포츠담 회담

1945년 7월 중순 포츠담에서 연합국 수뇌회담이 열렸는데 이 회담은 독일 항복 후의 유럽문제와 일본에 대한 항복을 촉진하고 아울러 극동문제도 취급하는 회담이었다. 이러한 회담중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성명서를 작성하여 그를 일본에 보냈는데 이에 일본은 조건부 수락을 제의해 왔다.

한편,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히 취급을 하지 않았으나 그간 수뇌회담에서 합의된 것을 재확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종전기에 한반도 문제는 몇 차례에 걸치는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토의가 되었으며 주로 미국의 구상대로 합의된 것이다. 당시 미국은 자기나라 식민지인 필리핀을 염두에 두고 한반도 문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한다는 구상이었으며, 본래의 구상인 40년간의 신탁통치가 20-30년으로 단축하는 것으로 합의된 것이다.

2) 38선으로의 한반도 분단과 민족분열

(1) 우리민족사에서 한반도 분할에 대한 열강들의 시도

일본을 비롯한 외세 침략자들에 의한 한반도 분할 구상은 오랜 역사성을 띠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가 개입하게 되고 전선이 남부지방에서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군대와의 화평조건으로 남부 4개 도를 일본에 양도하고 조선은 북부 4개 도만을 보유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그 경계선은 대략 오늘날 38선에서 45마일 남쪽이 해당되며, 서울의 경우 한강 주변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로부터 300년 후인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당시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진압명분으로 개입하게 되었는데 그들간의 충돌이 임박했을 무렵 영국정부는 남부조선을 일본이, 북부조선을 청나라가 점령할 것을 제의한 바 있다. 이 제안은 청.일 당국에 의해 거절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러시아가 한반도에 적극 개입하게 되었으며 1896년 일본은 러시아에게 38도선 분할을 제안했으며, 그후 1903년 9월에 러시아는 남부지방에서 일본의 특수이익을 인정하는 대신 39도선 이북의 비무장 중립지대화를 내용으로 한 협약을 일본과 맺으려 했다.

이처럼 주변 열강들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분할점령을 끊임없이 시도했다고 볼 수가 있다. 결국은 20세기 초 일본은 같은 해양세력이며 제국주의 세력인 미.영과 공모하여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2) 미국에 의한 38선 획정

연합국 수뇌들은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선언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이 조건부 항복을 제의해 왔다. 그러나 연합군 측에서는 그를 거부하고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마지막 총력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45년 8월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를 거쳐서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었으며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에 8월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했다.

이 무렵 미국은 며칠 후 일본의 항복선언이 있으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맥아더 사령부에 대한 훈령과 각 연합국과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서 긴급히 검토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3성조정위원회(국무성, 육군성, 해군성)에서 8월10일부터 8월15일 사이에 몇 차례 회의가 있었는데 이 회의 과정에서 육군성 러스크와 본스틸 참모가 서울을 미군이 점령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획정한 것이 38선이었다.

그리하여 38도선 이남은 미군에게 항복해야 한다는 훈령 초안이 8월12일부터 14일 사이에 참모총장에 의해 최종적으로 검토된 다음 대통령 재가를 받아 8월15일 마닐라에 있는 맥아더, 소련의 스탈린, 영국의 처칠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일반명령 제1호가 9월2일에 일본항복 문서조인과 함께 공포된 것이다.

1945년 9월7일 하지 중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미24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으며 맥아더의 포고문 제1호를 공포하여 점령정책을 발표했다. 포고문 제1호는 전문과 5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에서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을 밝혔고 제1조에서 “한국의 북위 38도 이남의 지역 및 동 주민에 대한 모든 행정권은 당분간 본관의 권한하에 시행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의 포고문 1호는 앞서 지적한 미국의 3성조정위원회의에서 획정된 것이다.

(3) 신탁통치를 위한 모스크바 3상회의

이 회의는 1945년 12월16일부터 26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영.소 외상들의 회의이다. 주로 전후처리 문제를 토의하게 되었는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몇 차례에 걸치는 수뇌회담에서 합의된 바 있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가 중요 쟁점이었다.

이 3상회의는 전후 유럽의 평화문제, 대일 정책의 일환성을 위한 극동회의 문제, 원자력 국제관리문제 등등과 함께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가 토의되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몇 차례에 걸치는 연합국 수뇌회담에서 합의한 신탁통치의 실시를 위한 구체적인 문제들이 토의된 것이다.

12월28일에 발표된 합의문을 보면 5년간의 미.영.소.중의 신탁통치에 합의했으며 그리고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4개국의 신탁통치는 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실시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국과 소련 대표로서 구성되는 공동위원회를 개최하여 이 공동위원회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한 것이다.

(4)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와 결렬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미.소 두 나라 대표로 구성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공동위원회에서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위해 각 정당과 사회단체들과의 협의해야 한다는 문제가 주로 쟁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소련측은 모스크바 3상결정을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만을 협의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데 반해, 미국측은 3상회의 결정, 요컨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들까지도 의사표시의 자유라는 명분을 내세워 협의대상에 참여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 차이로 인해 1946년 5월에 미.소공동위원회는 휴회로 들어갔으며 그러다가 1년 후인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의 같은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제2차 회의에서도 협의 대상 문제에 있어서 끝내 합의를 이뤄내지 못했다.

일례로 1947년 6월 11일 미.소공동위원회 제11호 성명에서 협의 대상 문제가 구체화되고 신청서 제출을 공포하게 되자 하루저녁에 급조된 우익계 유령 정당.단체들까지 합하여 463개 정당.사회단체가 신청을 했다.

이처럼 협의대상 문제에 대해 합의가 이뤄지지 않게 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미.영.소.중 회담으로 이관시킬 것을 주장했으며 이를 소련 측에서 거부하게 되자 47년 9월17일 유엔에 상정시킨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당시 미국의 ‘거수기’ 역할을 하는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시키자 소련측에서는 미.소공위 61차 본회담에서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서 48년 초까지 철수를 하고 조선사람 스스로가 정부를 수립토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시 이러한 소련 측 제안을 미국 측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결국 미.소공위는 1947년 10월18일 제62차 회의를 끝으로 결렬되고 소련 대표단은 10월27일 평양으로 철수한 것이다. 이처럼 미.소공위는 62차 본회담까지 열렸으나, 미국 측의 의사표시의 자유(요컨대 모스크바 3상결정을 반대하는 자유)와 그리고 소련 측의 ‘모스크바 3상결정의 정확한 실천’이라는 명분상의 대립으로 결렬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의 근본 요인은 미국의 소련과 동구라파에 대한 강력한 봉쇄정책인 47년에 발표된 ‘트루만 독트린’(동서냉전의 공식적 선언)과 46년 중반부터 모스크바 3상결정을 강력히 반대해 온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해야 한다’는 ‘정읍발언’(전라북도 정읍 시민 앞에서 한 연설) 등등에서 이미 결렬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군정은 모스크바 3상결정과는 관계없이 처음부터 친미적인 단독정권 수립을사실상 추진했으며, 그것은 38선 이남을 대소 봉쇄 거점과 전초기지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르는 한반도 문제 해결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되자, 그후부터는 소련이 제안한 미.소 양군 철수를 전제로 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과 유엔을 통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대립관계가 새롭게 형성되게 되었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는 38선 이남지역에서 이른바 유엔 감시 하에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가 수립이 되고 그후 이북지역에서는 남한지역에서의 간접선거와 북한지역에서의 직접선거를 통한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하여 국토분단인 38선을 계선으로 민족분열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민족은 반세기 이상 분열된 비극의 역사를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과정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38선 이남의 경우 1945년 말까지는 즉시독립을 기대하면서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진보진영에서는 인민위원회가 전국적 규모에서 조직이 되고 중앙인민위원회가 구성이 되었다. 한편, 한민당(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진영에서는 상해임시정부 봉대론(奉戴論)을 주장하면서 독립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했다.

1946년 1월부터는 미.소 합의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투쟁을 전개했는데 진보진영에서는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모스크바 3상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했고, 반면 이승만을 비롯한 친미우익진영에서는 모스크바 3상결정을 반대하면서도 미군정의 비호하에 자기들이 주도하는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1947년 9월부터 남측의 진보진영에서는 양군철수를 전제로 한 자주적인 정부수립 투쟁을 전개했다. 1948년 4월 북쪽의 주도로 개최된 남북정치협상에 김구, 김규식 등 민족주의 세력들이 대거 참여하여 단선반대결의를 하고 단정 수립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친미우익세력들은 미국의 의도대로 유엔의 감시 하에 38선 이남에서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를 추구해 나갔다.


3. 한미동맹


1) 한미동맹의 시작

한반도에 대한 분할점령은 미국의 38선 획정으로 38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에 의해서 이뤄졌는데 비록 모스크바 3상결정에 의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5년간의 4개국 신탁통치가 실시되었다 하더라도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문제는 그 어디에서도 연합국 수뇌들간에 합의된 바 없으며 아무런 약속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38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1948년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계기로 그해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는 달리 38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미군정하에 친미정권이자 단독정부인 대한민국 수립으로 미군정이 사실상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49년 6월에 500명의 군사고문단만을 잔류시키고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인 6.25 한국전쟁이 발발되자 미국은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게 되었으며 휴전 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안보를 이유 삼아 계속 주둔하고 있는 상태이다. 앞으로도 미국은 세계군사전략이 변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미군 주둔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이 된다.

휴전 후인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주한미군 법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한미동맹 관계가 보다 제도화되고 강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1945년에 미군의 38 이남에 대한 점령과 그후의 과정을 연결시켜 볼 때 한미관계(동맹관계)는 금년이 59년이 된다고 볼 수가 있다. 내년이면 60년이 되는 셈이다.

2) 한미동맹의 강화.발전

한미동맹은 미 군정하에서 단독적인 친미정권 수립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그후 한국군을 지휘.통제하는 군사 동맹으로, 나아가서 정치 경제 외교 통일 등 모든 분야로 확대.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 군사분야

6.25 한국전쟁 때는 한국군에 대해 미군 장성인 유엔사령관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 이때 편입과 관련하여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5일 “한국군은 귀하의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며 또한 한국국민과 정부도 고명하고 훌륭한 군인으로서 우리들의 사랑하는 국토의 독립과 보전에 대한 비열한 공산침략을 대항하기 위하여 힘을 합친 국제연합의 모든 군사권을 받고 있는 귀하의 전체적 지휘를 받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또는 격려되는 바입니다”라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한을 보내 감사의 표시를 했다.

휴전 후 53년 10월 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동 조약 4조에서 “상호적 합의에 의하여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한다”라고 합의함으로서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으며 그리하여 미 육군 2개 사단 및 지원부대 1개 공군사단을 포함 약 6만 명의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78년 11월7일 한미연합군사령부가 창설을 하게 되었는데 사령관은 미 대통령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는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임하고 부사령관은 한국군 4성 장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엔사령관이 장악해 온 것이 한미연합사령관으로 이관되었다.

그런데 한미연합 지휘체제는 미 지상군 2사단과 미 공군과 해군이 제외되고 있으며 주로 한국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군의 육해공군은 미 4성 장성이 사령관으로 되어 있는 한미연합사령관의 지휘.통제 하에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군사정보와 무기체제는 물론 군사전략과 작전, 훈련 등 모든 것이 미군 측 주도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반세기 이상의 한미동맹관계는 군사 면에서 동맹군 체제로 발전해 왔으며 큰 틀에서 보면 한국군이 미국의 군사체계에 편입돼 가는 과정을 밟아왔다고 볼 수가 있다.

오늘날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라 일부 지상군 철수와 관련해 당국에서는 ‘협력적 자주국방’을 주장하고 있으나 미군이 지휘하는 한미연합사 체제 하에서 ‘협력적 자주국방’이라는 것을 어떠한 의미로 해석해야 할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본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대처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그 목적과는 관계없이 미국이 일방주의적으로 전개하는 침략전쟁에까지 동참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에 있는 것이다. 이라크에 재건이라는 명분으로 전투병 파병이 그 대표적인 예다.

(2) 경제분야

경제분야에서는 정부수립 후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경제가 발전해 오다가 미국의 강요에 의한 1965년 한일수교와 더불어 일본과의 의존관계가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밟아왔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 붕괴와 더불어 구 소련, 중국과의 국교정상화가 이뤄짐으로서 대외경제활동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문민정부 때 WTO(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게 되었고 경제의 개방화가 가속화되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국제통화기금)를 비롯한 국제금융과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결국 1997년 12월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IMF 관리체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정치권에서는 ‘경제신탁통치’ 또는 ‘제2의 경술년 국치’라고 개탄을 했으며 그야말로 굴욕적인 것이었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세계주의를 주장하면서 IMF가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무조건 수용하고 미국이 추구하는 세계화 전략(미국화)에 적극적으로 편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국자본과 외국기업(주로 미국)을 무제한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 3년간 IMF 관리체제 하의 한국경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모델로 하는 미국식 시장경제가 한국경제 구석구석까지 침식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이러한 경제의 무원칙한 개방화로 인해 금융시장, 증권시장이 외국자본에 의해 잠식되고 중요한 알짜 기업의 관리권마저 넘어가게 된 것이다. 8개 시중은행 주식이 금년 9월말 현재 50.8%가 외국인 소유로 되어 있으며 그중 국민은행을 비롯한 3개 은행은 주식지분율이 70%가 넘었으며 관리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갔다.

미국식 시장경제(예컨대 경쟁에서 승자만이 살아남고 패자부활전이 없는)를 무원칙하게 수용한 결과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와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내수경기의 만성적 불황으로 중소기업이 몰락하면서 중산층의 폭이 크게 좁아진 것이다.

또한 경쟁력 강화라는 것을 내세워 고비용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규직 근로자를 비정규직으로 전락시켜 그 수가 절반이 넘는 상황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실업률 증대, 특히 청년실업률의 증가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농산물의 개방, 특히 쌀 시장의 개방은 농촌경제를 구조적으로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경지면적의 축소정책(120만 정보에서 100만 정보, 100만 정보에서 70만 정보로)은 우리나라 농촌경제를 사실상 파괴시키는 결과를 자아내고 있다.

어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수산물의 무제한적인 수입개방은 원양어업과 근해어업뿐만 아니라 양식업까지도 이해타산이 안맞아 포기하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서민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가계대출 규모가 약 500조(약 4,500억 달라)에 이르고 신용불량자 수가 약 400만 명에 달한다.

이러한 가계 빚과 신용불량자 문제는 계속 증가 추세에 있으며 해소해 나갈 전망이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므로 해외 이민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미 오래 전에 10명중 4명은 이민을 희망하는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민의 경우 “미래가 없다, 살맛이 안난다, 자식교육이 문제다” 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그리고 미국, 캐나다, 일본 등 해외불법 체류자가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이 뿌리내리게 됨으로서 각종 사회병리현상, 예컨대 자살, 살인, 강도, 사기, 뇌물, 인신매매, 성매매, 성폭행, 마약중독, 도박, 가출, 해외재산도피, 노숙자, 정신질환, 사이비종교와 광신도 등등이 나날이 증가 추세에 있다.

이상과 같이 경제분야에서의 한미동맹 관계는 미국의 세계화(미국화) 전략에 따라 미국식 시장경제가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을 밟아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독자적인 경제발전 모델을 선택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글의 법칙’만이 작동하는 이른바 시장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모든 경제활동을 맡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우리나라에 침투된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자본의 이익을 보호하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실정인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 이상의 외국문화의 침투는 필연적으로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와 민족성의 파괴를 가져왔다. 언어의 경우만 보더라도 해방 후 3년간의 미군정 하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한 바가 있는데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는 영어가 공용어는 아니지만 영어를 모르고서는 사회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며 따라서 영어를 배우기 위한 어린 학생들의 해외연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로 인한 외화 손실이 수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특히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참여정부는 이미 국민의 정부 시절에 무원칙하게 수용된 미국식 신자유주의 모델에 의한 시장경제를 계승함으로서 앞서 지적한 경제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해야만 하는 부담을 안고 출범했다는 점이다. 이미 뿌리내린 신자유주의 모델에 의한 각종 경제 및 사회적 문제점들은 정부당국만으로는 해결하기가 불가능하며 따라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 온 국민이 힘을 합쳐 범국민적 차원에서 해결해 나가는 방법론을 찾을 수밖에 없다.

3) 정치, 외교, 통일 분야

오늘의 한미동맹은 정치, 외교, 통일 분야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으며 따라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돼 있다. 정치적으로는 4.19, 5.16, 5.18 등등 정치적 격동기를 맞을 때마다 미국이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60년대 월남파병도 그러려니와 오늘날 미국의 대이라크전이 침략전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미동맹의 강화라는 차원에서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전투병 파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6.15 공동선언에 의한 남북한의 화해협력 사업에 있어서도 미국과의 사전협의를 해야만 하고 2001년 3월 부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비판에 대해 국민의 정부는 이를 거부하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하는 기업들의 물자 반출에 대해서 당국은 독자적인 재량권이 없으며 미국에 사전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정부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인 예컨대 테러지원국, 핵선제공격 대상은 물론이며 체제붕괴를 목적으로 한 ‘북한인권법안’ 통과에 대해 아무런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유엔 총회 같은데서 당국자는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의 핵폐기’라는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면 안되는 형편에 있다.


4. 맺는 말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의 분열과 한미동맹관계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먼저 우리민족의 주체적 입장에서 볼 때나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 분단과 민족분열의 역사적 과정에서 볼 때 민족분열은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통치의 연장선에서 이뤄졌으며, 또한 민족의 자주권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제 식민지 통치 시기와 한미동맹 60년간의 역사는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이는 오늘날 우리 민족문제가 역사적으로 ‘우리민족 대 외세’와의 모순구조로 계속 되어왔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민족 앞에 제기되고 있는 기본 과제는 앞서 지적한 ‘우리 민족 대 외세’와의 모순구조의 극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구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토록 하여 북미간의 적대관계를 우호협력관계로 전환토록 하고, 다음으로는 한미동맹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분야에서 하루속히 불평등성과 종속성에서 벗어나 상호평등과 호혜의 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즉 자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토록 하자면 먼저 북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폐지시켜야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과 북이 힘을 합쳐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온 민족이 단결하여 민족의 자주와 민족의 이해관계를 위해 공동으로 대응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이미 착근되어 있는 미국식 시장경제인 신자유주의 모델에서 탈피하는 대담한 정책을 추구해야 하며 민족경제 건설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는 6.15공동선언에서 이미 밝힌 바 있는 것과 같이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나가면 되는 것이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민족적 당면과제를 추진하는 데는 외부와 내부의 반민족.반통일세력의 도전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들 세력은 이미 역사무대에서 사라져 가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그러므로 퇴행적이며 비이성적인 이념공세와 색깔론 등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정치권까지 포함한 애국애족세력과 통일세력의 힘을 믿고 그를 뒷받침으로 하여 대담하고 과감한 정치를 해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외세에 의해 역사적으로 강요된 만고풍상(萬古風霜)에서 벗어나 민족사의 올바른 발전궤도를 확립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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