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이 남북 친선경기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매우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설정으로 반공이념을 극대화 시켰던 영화 '쉬리'의 감독 강제규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남과 북을 얘기하고 있다.

 

이 영화는 이념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한국전쟁터를 공간으로 삼고 있지만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남과 북, 이를 둘러싼 열강들의 속내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하등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얼떨결에(혹은 강요받은) 한국전쟁에 참가한 진태의 '병적인' 가족애와 '원인모를'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얘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진태와 진석형제는 종로거리에서 전쟁발발 소식을 듣는다. 감독은 전쟁의 시작을 "전쟁이 났데" 이 단 한마디와 불안하게 술렁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간단하게 처리해버린다. 덧붙이는 설명 따윈 없다. 이 영화에서 전쟁은 갑작스럽게 불어닥친 '돌풍'일 뿐이며 당장  그 날 보따리를 꾸려 내몰리듯 피난에 나서야 하는 '두려운 것'일 뿐이다.

피난길에 강제 징병된 이들 형제가 끌려간 전쟁터도 전쟁에 대한 물음에 명확하게 답해주진 못한다. 군인들은 "동포끼리 총을 겨누는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국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만 이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되'라는 생존의지와 맞물려 적(곧 인민군)에 대한 적개심으로 돌변해버린다.

살아남기 위해 이들은 무참히 살육을 벌인다. '왜'라는 개인의 물음이 통용되지 않는 국가이데올로기는 전쟁을 통해 이들 안에 잠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일깨우고 동생 진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구두닦이를 하는 진태의 동생을 향한 '부성애'는 국가이데올로기와 매우 흡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돌변하여 그를 서서히 광기로 몰고 간다.

훈장을 따 동생을 집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신들린 사람 마냥 인민군에게 총질할 때 이미 '부성애' 단계를 벗어났으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임무감은 하나의 억압기제로 작용하여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켰다.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국군, 인민군 가릴 것 없이 죽이는 그는 일말의 동포애, 사상, 이념도 없이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살인병기로 돌변할 수 있는 '광기어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응집체이며 전쟁과 가부장제의 이중 피해자일 뿐이다.  

필자는 "'애비 부재의 시대' 를 겪고 있는 아버지 관객들이 한국영화 사상 최고.최대급 스펙터클이 흘러간 시대의 진짜 애비를 찾아주는 듯한 부권 회복의 메시지를 보여주자 감격해마지 않았다"는 이 영화에 대한 경향신문의 평을 읽고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1950년  뿐만 아니라 200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부장제 망령은 여전히 건재하지 않은가.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광기'가 있었다

북을 바라보는 강제규 감독의 시선이 한결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영화 곳곳에는 반공이데올로기가 복병처럼 매복해있다. 인민군이 지나간 자리에는 꼭 양민학살 흔적이 남아있으며 진태가 지휘하는 '인민군 깃발부대'는 마치 살인귀를 연상시킨다. 동생마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이미 광기의 노예가 되어버린 진태와 깃발부대 인민군은 섬뜻하게도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훈장을 받고 드디어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게 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공격해와 진태의 꿈을 일순간 무너뜨린 인민군에게 관객들은 묘한 적개심마저 느끼게 된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너무나 직설적이게(촌스러울 정도로) 동포애를 강조하고 있으나 정작 인민군을 표현할 때는 '정복해야 할 대상', '속 다르고 겉 다른 파렴치 범'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쉬리'에 비해 시선이 한결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닥 달라진 것 없는 시각이 실망스럽다.

다만,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전쟁의 참혹성을 새삼 느꼈다는 지인들의 말을 전해들으며 이 영화가 반전평화 물결에 일말의 기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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