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pbpm@chol.com, 원광대 정치행정언론학부 교수,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보여준 언행과 한미 정상 회담 결과에 대해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대개 진보 세력은 그의 미국 방문 외교를 "굴욕적 사대 외교"로 비판하는데, 보수 세력은 그것을 "실용적 친미 외교"로 반기는 모습이다.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던 과정에서처럼 그에 대한 지지 세력과 비판 세력이 뒤바뀐 셈이다.

한미공동성명만으로 방미 외교 성패를 논하는 것은 무리

나는 한미 공동 성명의 내용에 대해 별로 시비걸고 싶지 않다. 한 마디로 친미 반북적 내용이지만, 미국에 가서 그 정도로 합의했으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진보 쪽에서 비판하듯이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한 채 남북 문제를 미국에 완전히 떠맡긴 것도 아니며, 북미 갈등을 경제 제재나 전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데 합의를 해준 것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한미 공동 성명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세 가지 내용이다. 첫째, "부시 대통령은 한반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군의 강력한 전진 주둔에 대한 공약을 재확인했다"는 대목이다.

나는 주한미군의 목표가 냉전 시대에는 북한의 남침을 막기 위한 것이었을지라도 탈냉전 시대에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바뀌었고,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의 군사력보다 뒤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당장 떠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해 왔지만, 우리 사회의 여론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보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다소 진보적이거나 평화 통일 운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즉각적인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쉽게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터에 노 대통령이 개인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나 감축을 바라더라도 이에 대해 소신껏 얘기할 수 있겠는가. "미군의 강력한 전진 주둔"이란 표현이 찜찜하지만, 주한미군 철수는 말할 것도 없고 감축이나 이전 얘기만 나와도 금새 북한이 쳐들어올 것 같은 공포를 조성하는 수구 신문들과 그에 휩싸여 불안에 떠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비난할 일이지 노 대통령을 욕할 게 아니란 말이다.
 
둘째, "두 정상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에는 추가적 조처의 검토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데 유의하면서,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표명했다"는 대목이다.

북미 갈등이 미국의 대북 선제 공격 협박 등 제네바 합의 위반에서 비롯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북한의 핵 위협에서 빚어진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분명히 크게 잘못되었다. 평화적 해결을 얘기하면서 북한이 제안해온 불가침 조약이나 평화 협정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 게 불만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전쟁도 벌일 수 있다는 미국과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남한 사이에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우방국들의 충고나 국제 사회의 비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온 세계를 맘대로 주무르는 제국에게 이 만큼이나마 양보를 얻어낸 것은 잘했다는 말이다. "추가적 조처"란 경제 제재나 폭격을 뜻하는 것 같은데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미국으로서는 잘했든 못했든 북한에 대한 협상용으로 은근히 내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한편 나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경제 제재를 시도해도 중국의 반대로 쉽게 성공하지 못할테고, 북한의 군사적 보복 능력 때문에 북한을 함부로 폭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추가적 조처의 검토"를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솔직히 밝힌다.
 
셋째, "노 대통령은 향후 남북 교류와 협력을 북한 핵문제의 전개 상황을 보아가며 추진해 나갈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는 대목이다. 이는 미국의 요구나 압력을 받아 햇볕 정책을 포기하고 상호주의를 따르겠다는 것처럼 보여 한미 공동 성명 가운데 가장 못마땅하다. 북한 핵문제는 미국의 제네바 합의 위반 때문에 불거진 것으로 북한과 미국이 풀 일이지 남북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하필 그가 미국에 머무르고 있던 12일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폐기한다고 발표한 데 대한 불쾌감의 표시일 수도 있고, 남북 사이에도 협상이 있는 만큼 북한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한미 공동 성명의 내용을 가지고 노 대통령 방미 외교의 성패를 논한다는 게 조금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외교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은밀한 부분이 더 많을 수도 있는데 속으로는 어떠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은 절대 안된다는 남한의 강력한 요구를 미국이 받아들이고도, 조금이라도 북한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겉으로는 북한을 압박하는 성명을 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미국에서 보여준 비굴한 모습은 지나치기 어려워

한편 한미 공동 성명의 내용은 이렇게 긍정적이고 호의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도 그가 미국에서 보여준 아첨과 비굴한 모습은 도저히 지나치기 어렵다. 그가 이렇게 변신하게 된 데는 아마 다음과 같이 털어놓기 어려운 사연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첫째, 미국으로부터 견디기 어려운 협박을 받았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주한미군을 당장 철수하겠다는 위협이나, 한국내 미국 자본을 빼돌리며 국가 신용 등급을 낮추겠다는 으름장을 받았는지 모른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 매달리지 않으면 국제 사회에서 살아 남기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둘째, 여러 가지 고급 비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앉고 보니 북한의 실체를 파악하고 북한 체제나 지도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겼을 수 있다.
 
셋째, 수구 신문들과 한나라당을 비롯한 극우 수구 세력의 딴죽이나 반발을 다독거리지 않고는 국정을 제대로 이끌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넷째, 내년의 총선거를 겨냥하여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고 계획하면서 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유혹을 펴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자신을 지지했던 진보 세력이 한나라당을 지지하지는 않을테니, `노통`이 변절했다며 떨어져나갈 진보 세력보다는 그를 믿을 수 있다며 지지해줄 보수 세력이 더 클 것이라고 계산하면서 말이다.
 
다섯째, 촌사람이 외교 경험도 별로 없는 터에 난생 처음으로 미국에 갔는데 세계를 주름잡는 사람들이 붕 띄워주니 뿅 가버렸을 수도 있다. 미국인들이 기대 이상으로 치켜 세워주니 황송해서 즉흥적으로 `오버`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아무래도 노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뭉개며 낯뜨겁게 아첨했다. "만약 53년전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쯤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가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에 관한 미국의 역할을 모르고 이 말을 했다면 대통령으로서 너무 무식하다고 할 수 있고, 알고도 그랬다면 천하의 아첨꾼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분단 때문에 일어났는데 그 분단의 원흉이 바로 미국 아닌가. 미국이 전쟁을 통해 남한을 도와준 은혜에 감사하려면 분단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유엔 사무총장을 방문한 자리에서는 온 세계를 향해 자신이 기꺼이 `부쉬의 개`가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라크 사태와 관련해 유엔 내의 목소리가 통일되지 않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정당성이라곤 반푼 어치도 찾기 어려운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유엔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왜 미국에 반대했느냐며 앞으로는 미국이 하는 일에 시비걸지 마라는 투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얄밉다는 말도 있는데, 힘있는 미국에 빌붙어 깐죽거리는 남한이 국제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지 두렵다.
 
밥 한 술 덜 먹더라도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그는 국익을 위해 체면과 자존심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의 말을 했다. 미국에 가서 어떻게 반미적 언행을 할 수 있느냐고도 했다. 맞다. 국익을 위해서는 대통령 개인의 체면과 자존심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나라와 민족의 체면과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

또한 국익을 위해서는 친미도 필요하고 반미도 필요하며, 줄기찬 반미가 바람직하지 않듯이 무조건 친미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앞서 건전한 비판은 반미가 아니듯이 비굴한 아첨은 친미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아가 더욱 중요한 것은 경우에 따라 친미도 하고 상황에 따라 반미도 하면서 국익을 챙기려면 먼저 미국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덕담을 했다고 하지만, 비굴과 아첨은 겸손이나 미덕과 달리 조소와 경멸의 대상일 뿐이다. 그의 비굴과 아첨에 미국인들이 겉으로는 반미주의자가 아니라며 반가워했을지라도 속으로는 "니까짓게 그러면 그렇지" 하지 않았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북한은 미국에 대해 자존심과 자주성이 너무 넘쳐 위험하게 보이고 남한은 너무 모자라 비굴하게 보이니 이런 면에서도 남북이 조화를 이룰 수 없을까. 미국에 종속되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조금 풍족한 삶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밥 한 술 덜 먹더라도 최소한의 자존심과 자주성은 지키며 떳떳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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