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높은 식견이나 탁월한 경륜, 아니면 화려한 경력이나 풍부한 경험으로 국민의 여망을 한 몸에 지니고 그 자리에 오른 분이 아니었다. 비록 아직 다듬어 지지는 못했지만 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지도자의 재목으로서는 그래도 이회창 후보보다 낫다는 판단으로 국민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미숙한 언행은 오히려 애교로 보아줄 수 있었다. 또 대선 후보 시절의 거침없던 대미비판도 막상 청와대에 들어가면 점차 세련되거나 수정되리라는 것도 짐작 가던 일이었다.

지난 5년간 남북화해 노력에 찬물 끼얹어

그러나 이번 방미기간 중 노 대통령의 언동은 그가 과연 그런 재목인가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게 하였다. 그는 필요 이상으로 숭미사대(崇美事大)의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겨우 싹트게 한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의 앞날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양 정상의 워싱턴 회담은 불과 37분으로 끝났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부시와의 대화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서로 신뢰하게 되었다면서 그것이 이번 방미의 가장 큰 성과였다고 말했다. 부시가 자기를 "좋은 친구"요 "대화하기 편한 상대"라 추켜 주면서 앞으로 중요한 문제를 개인적 우정을 갖고 협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외교적 수사를 액면 그대로 믿는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 미국이 뭐 그리 대단하고 무서운 나라인가, 반미면 어떠냐,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할말은 해야겠다고 제법 쎄게 나가다가, 정작 앞에 와서는 기가 죽어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고분고분해지는 사람, 그런 사람을 그대로 믿어줄 만큼 미국사람들은 단순하지 않다. 오히려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비굴한 인간으로 보고 경멸하면서 부려먹으려 하는 것이 그들의 속성이다. 노 대통령은 차라리 한미관계의 평등한 발전을 위한 자신의 소신을 떳떳이 밝히고 진지하게 이해와 협조를 구했더라면, 당장에는 몰라도 길게는 참된 신뢰를 구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북한의 핵 보유는 용인할 수 없으나 이는 제재나 군사공격이 아니라 북미간 협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해야한다고 역설하던 분이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는 핵 완전포기 뿐 아니라 핵 물질의 완전폐기와 아울러 국제기구의 검증까지 요구하면서 대북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또 대북 군사공격을 반대한다는 말은 아예 부시에게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평화적으로 안되면, 제재나 군사력의 사용을 뜻하는 "추가적 조치"도 필요하다는 미국의 주장을 수용했다. 이는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의 포기이다.

또 향후 남북교류와 협력은 북한 핵문제의 전개상황을 보아가며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언론과의 대담에서는 북한 체제, 그 지도자 및 정책을 부정하거나 비난했다. 이는 그간의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정책의 기저를 부정한 것이다. 또 북한이 하자는 대로 할 수는 없다고도 말했다. 이는 지난 5년간 "햇볕정책"을 비방하고 그 성과를 부인해온 한나라당의 노선을 두둔한 것이다.

방미외교의 허실

이번의 방미외교가 한미동맹관계를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며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관계란 말이 좋아서 동맹관계이지 그 실은 분단체제에 바탕을 둔 대미종속관계이다. 노 대통령은 그런 굴욕적인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바로잡겠다고 장담하던 분이다. 자기가 바로잡겠다던 관계를 그대로 재확인한 것이 무슨 성과가 될 수는 없다.

또 미 2사단의 재배치 문제가 유보됐다고 좋아하는 것도 한심할 일이다. 북한보다 인구나 경제력으로 월등히 우세한 남한에서 군부가 32년 동안 군사제일주의를 내걸고 독재정치를 했는데, 아직도 미군 1개 사단이 후방으로 재배치되면 안보위협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일이다. 그 때문에 일국의 총리가 한낱 주둔군 사단장을 방문해서 애원했는가 하면 대통령이 미국까지 가서 "간곡하게 부탁"해야 했으니 참으로 창피스런 일이다. 게다가 정상회담 후에도 미 국방장관은 북핵문제와 상관없이 2사단 재배치를 추진한다고 언명하고 있으니 노 대통령은 헛물을 켠 셈이다.

이번 방미외교가 한국의 경제환경에 대한 외국 투자가들의 불안을 불식시켰다는 긍정적 평가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경제는 대미종속관계의 온상 속에 핀 꽃이다. 그런데 대미종속관계는 바로 통일의 가장 근본적 방해요인이다. 따라서 통일을 이루려면 한국경제는 언젠가는 온상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체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북핵문제는 한국의 주도적 역할로 해결해야 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지난 달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문제 회담에 대한 한국의 참여를 북한이 반대함으로써 그의 포부가 좌절된 데 대해 노 대통령은 매우 분통을 느꼈을 수 있다. 또 그의 방미 중에 북한이 남북비핵화선언의 폐기를 선언한데 대한 불쾌감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이런 일에 대한 분풀이가 그의 돌연한 변절과 배신의 동기였다면 그의 민족지도자로서의 영상은 심히 흐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을 믿지마라

우리는 분단으로 고통받고 있는 민족이다. 미국은 우리를 갈라놓고 지배하면서 재미보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의 이러한 한반도 지배체제에 반기를 든 북한을 미국은 처음에는 무시하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를 만드는 기미가 포착되자 북한과 협상해서 핵 계획을 정지시키고 그 대신 경수로를 지어주고 무력위협이나 그 행사를 안 하기로 약속했다. 허나 미국은 북한이 머지않아 붕괴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당초부터 그런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으며 또 실제에 있어서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이 붕괴하리라는 미국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리고 남한에 새로 들어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으로 남북한은 화해.협력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남북간에 화해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훼방을 놓아 판을 깨던 미국도, 6.15 공동선언 이후에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 상종하는 정책을 채택하여 마침내 관계정상화의 일보직전까지 접근해 갔다.

그런 판국에 클린턴의 뒤를 이은 부시정부가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북한을 제거대상으로 찍은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이라크는 이미 요리됐고 다음은 북한 차례로 돼 있다. 북한이 결코 쉽게 무릎꿇지 않을 것임을 아는 미국은 명분을 쌓기 위해서 일단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표방하면서 국제적 여론몰이를 하되 궁극에 가서는 무력으로 김정일 체제를 도려낸다는 복안을 가지고 그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다. 작년 10월 새로 불거진 북핵 사태나 미 2사단의 한수이남 재배치를 포함한 주한미군의 재조정 문제 그리고 동굴 파괴용 소형 핵무기 개발계획 등은 모두 이런 복안의 일환으로 밟고 있는 수순이다.

그런즉 노 대통령이 만일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부시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은 북한을 칠 준비가 끝나는 대로 그런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는 구실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나라이다. 특히 약자와 맺은 약속은 별로 지키지 않는 것이 미국의 관행임은 북한과 맺은 1994년 핵 협정의 예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힘에 의한 북한의 강제붕괴는 한반도 전체를 불바다와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붕괴된 북한의 통치를 남한에 맡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설사 맡긴다 하더라도 이미 극심한 피해를 입은 남한에게는 북한을 통치할 여력이 있을 수 없다. 결국 미국이 북한을 따로 떼어 마음대로 요리하게 되어 우리 민족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도 통일은 못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런즉 북한이 아무리 싫고 미워도 통일은 남북이 자주적으로 협상해서 서로 비기는 방식으로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미국에 가서 북한의 강제붕괴를 꾀하는 부시의 위험천만한 정책을 뒷받침해주는 우를 범하고 돌아왔다. 

작년 12월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 지지와 자주적 대미자세를 표방한 노 후보가 미국의 예상을 뒤집고 당선됐을 때 미국은 당황했다. 남한정부가 대북 군사공격을 반대하면 이를 강행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골인 줄 알았던 노 대통령이 얌전하게 미국이 부르는 대로 공동성명을 받아쓰고 발표했으니, 미국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4년 9개월이나 남아있다. 그 동안에 한반도의 험난한 정세가 얼마나 위태로운 결과로 치달을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게 되었다. 반년 전에 노무현 후보에게 귀중한 한 표를 던져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불쌍한 북한동포들은 앞으로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인지, 또 남한의 동포들은 과연 언제까지 편안할 수 있겠는지를 끊임없이 걱정하면서,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아픔과 씁쓸함을 두고두고 되씹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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