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기(동국대 교수/평화통일시민연대 공동대표)


베이징 3자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시인했다는 미국언론들의 보도로 북한핵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의 핵보유가 사실인지의 여부는 지금으로서는 속단할 수 없다.

북한이 이미 1992년에 시인했듯이 제네바합의 이전에 폐연료봉의 재처리를 통해 일정량의 플루토늄을 보유 - 이른바 "과거핵" -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또 조악한 형태나마 기폭장치도 개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한이 완성된 형태의 `핵무기(nuclear weapon)`를 가지고 있거나 "의미 있는 핵무장"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북한의 행동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미국이 북한의 일방적인 양보만을 강요 - 사실상의 무장해제 -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은 계속 북한의 "선 핵포기, 후 협상" 만을 고집하고 있고, 이런 비타협적 자세는 북한이 이른바 "새롭고 대담한 제안"을 내놓은 베이징 3자회담에서도 전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라크사태는 북한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이라크는 미국의 요구를 전적으로 수용하여 수년간에 걸쳐 무기사찰을 받고 사실상 무장해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하는 것은 결국 이라크와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학습효과를 북한지도부에 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큰 위기감 속에서 핵무장의 유혹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북한의 절박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미국에 "대담한 협박"을 통해 협상국면을 열어보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통하지 않더라도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고, 미국과 협상이 깨지게 되면 실제로 핵보유 방향으로 간다는 구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순진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분명 북한 지도부는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국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정보력이 북한의 "핵 허풍"에 놀아날 만큼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북한의 핵보유 시인"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침착한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럼스펠드를 비롯해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이 최근 들어 북한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는 듯한 발언들을 잇달아 쏟아냈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능력을 충분히 간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북한이 정말 핵무기를 몇 개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미국의 안보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 핵무기 몇 개로 억지력을 가질 수는 없다. 미국의 안보에 정말 위협적이라면 선제공격해 버리면 그만이다.
 
북한 핵보유에 대한 의혹은 오히려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패권주의정책과 핵선제공격전략, MD계획 등에 더 없이 좋은 명분과 구실을 제공해줄 뿐이다. 부시 행정부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이라크전에 끝난 상황에서 미국은 새로운 적이 필요하다. "북한위협론"의 명분을 만들어야 하고 "북한위협론"을 계속 유지해 가야 한다. 미국은 처음부터 북한과 어떤 협상도 할 의사가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다.
 
작년 10월 이후 북한핵문제는 충분히 조기에 수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의도적이라고 할 만큼 상황을 악화일로로 몰고 왔다. 북한을 계속 벼랑끝으로 몰아, 북한의 핵개발을 유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과 같은 북한 핵위기의 책임은 미국에 있다. 북한지도부의 안일한 현실 인식과 상황판단의 미숙, 미국의 전략에 말려든 무모한 맞대응도 사태 악화에 한 몫을 했다.
 
어쨌든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 의혹을 증폭시키는데 성공함에 따라, 손해볼 것이 없는 장사가 됐다. 북한핵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와 동북아의 위기상황을 질질 끌고 가면서, 북한을 계속 가지고 놀기만 하면 된다. 북한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을 계속 제시할 것이다. 때로 북한의 핵보유 의혹을 구실로 해상봉쇄나 경제제재와 같은 대북제재 가능성을 흘리면서 북한을 압박하고, 아울러 한국에 압력을 가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꽃놀이 패"인 셈이다.
 
북한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어 보인다. 과감히 "핵옵션"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와 협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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