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한미관계는 지난 반세기동안 미국의 뜻대로 순조롭게 굴러갔다. 대다수의 한국인들도 그것을 다행스런 일로 여겨왔다. 그러나 요즘 와서 한미관계에는 삐걱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한미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

작년 대선 때 한국에서는 시민들의 "반미시위"가 날로 심해지더니 마침내 미국의 마음에 드는 후보를 제치고 보다 평등한 대미관계를 주창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미국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한국인들을 배은망덕으로 몰거나 차라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자고 주장하는 등 소위 "반한감정"을 표출하기도 했다. 또 한국 내에서도 한미관계의 변화가 초래할 수 있는 불안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현재의 한미관계는 1950년에 일어난 한국내전에 미군이 개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국인들이 이 관계를 그후 50년 이상 그대로 유지해 온 것은, 1) 남북은 불구대천의 적대관계에 있으며, 2) 남한의 무력은 북한의 무력을 당할 수 없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존재가 한반도 평화유지에 필수적이며, 3) 남한은 주한미군의 유지를 위해서 대미 종속관계를 감수해야 한다는, 세 가지 기본인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미관계는 처음부터 불평등한 관계였다. 그런 관계를 떠받치는 대들보 역할을 하는 것이 한미 상호방위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한국은 전 국토가 미국의 저렴한 군사기지로 전락되었다. 또 한미간의 약속으로 한국군은 조국에 대한 충성을 아무리 맹세해도 전쟁이 나면 미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돼 있다. 치외법권적인 "소파"협정으로 한국인들은 자기 땅 안에서 미군을 상전으로 모시는 2등 국민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소위 한미일 3국 공조체제에 묶여서 한국정부는 대북 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미국의 감독과 조정을 받고 있다.

불평등관계 지탱해온 전제들 차례로 무너져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에 이러한 불평등관계를 지탱해온 전제들이 차례로 무너져갔다. 우선 지금의 남북관계는 적대관계에서 화해협력관계로 이행하고 있다. 쌍방간에 아직 군사적 긴장이 남아있긴 하지만 현실적인 군사대결상황은 없다. 군사적 긴장관계도 그 원인을 따져보면 부시정권의 대북 강경정책으로 인해 북미 사이에 있는 것이지 남북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남북간에는 2000년 6월의 남북공동선언으로 오히려 화해협력관계가 더욱 증진되어, 이제 이산가족 상봉과 각종 문화교류가 꾸준히 추진되고 있을 뿐 아니라, 철도와 도로가 연결되고 군사분계선도 뚫리기 시작하고, 활발한 경제협력사업이 계획되고 있는 실정이다. 남북은 어차피 동족이니 결국은 화해 협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게 돼있다.

또 남한의 무력이 북한의 무력을 당하지 못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남한은 북한보다 2배의 인구와 몇십 배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지난 몇십 년 동안 매년 북한보다 적어도 5, 6배의 군사비를 써가며 국군의 전력을 강화해 왔다. 경제가 파탄 나고 식량과 에너지의 태부족으로 훈련도 제대로 못 받는다는 북한군을 자력으로 당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래도 아직 북한군이 겁난다는 일부 논자들의 주장은 엄살이나 거짓말이 아니면 망국적 패배주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이제 한국인들 자신이 대미 종속관계에 얽매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한미관계는 이제 마땅히 새로운 환경에 맡도록 재정립돼야 할 시점에 와있다. 이 마당에 아직도 지난 50년 동안과 같은 굴욕적인 한미관계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수선을 떠는 것은 지각없는 일이다.     

한미관계의 합리적인 재정립은 적어도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한미관계의 합리적인 재정립을 위한 몇 가지 사항

첫째, 한미관계는 주권국가간의 평등한 관계로 그 근본성격이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현행 한미 방위조약은 필요한 단계를 거쳐서 궁극적으로는 폐기되거나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한미관계는 남북사이를 이간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해와 협력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그 목표와 기능을 수정하여야 한다. 지난 50년간 한미동맹체제 하에서 한국은 북한의 궁극적 붕괴를 목표로 하는 미국의 정책을 거들어 주는 역할을 맡아 왔다. 그 덕으로 남한은 평화와 번영을 누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과 지속적이며 극한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동포들은 그 때문에 항상 극심한 불안과 공포와 고통과 희생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을 무한정 연장하는 것은 동족간에 도의적으로 떳떳한 일이 되지 못한다.

셋째, 한국군의 전시작전지휘권을 미군사령관에게 귀속시킨 조치는, 1936년 영국이 이집트를 외형적으로만 독립시켜 줄 때 써먹은 수법을 본뜬, 눈 가리고 아옹하는 방식이다. 국가주권의 상징이자 실체인 군 통수권은 가급적 단시일 내에 완전 환수되어야 한다.

넷째, 주한미군은 남북간 화해, 협력의 추진과 상호군축의 진도와 보조를 맞추어 단계적으로 재배치, 감축 및 철수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근래에 숭미사대에 찌들은 일부 전 현직 보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주장하는 모임들을 만들고 있다는데, 이는 일제 강점시기에 항일독립운동을 무모한 짓이라고 반대하면서, 오히려 일제 식민지배의 장구화를 옹호하던 친일분자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연상시키는 한심한 작태들이다.

이와 관련, 주한미군은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무한정, 심지어 통일 후에도, 주둔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다. 동북아지역의 평화유지를 위해 미군이 필요하다면 그런 임무를 띤 미군은 북한을 적으로 삼는 "주한미군"이 아닌 "동북아평화유지군"이어야 한다.

그러한 미군의 필요여부는 물론 그 구성과 지위 및 통제방식 등은 한미 두 나라의 양자간 합의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동북아의 지역안보체제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일로서, 지역 내 모든 관련제국들의 다자간 합의를 통해서 결정되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 절차 없이 "주한미군"을 "동북아평화유지군"으로 둔갑시켜 놓으면 오히려 전쟁의 불씨가 되어 동북아의 평화를 해치는 역작용을 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런 이치를 무시한 주장은 명분 없는 "주한미군"을 무기한 붙들어 두자는 자들의 궤변이요 간계에 불과하다.

다섯째, 완전 철수 이전의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은 적어도 미국과 독일 또는 일본과의 협정의 수준으로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동북아 중심국가 포부는 한미관계의 합리적 재정립 없이는 불가능

지금까지 맹주로 섬기던 미국과 교섭하여 한미관계를 이와 같이 재정립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정부는 국민의 의식을 고양시켜야 한다. 이 세상에 타국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의 이익과 자국민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나라는 없으며 미국도 예외가 아님을 국민이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한미관계도 그런 냉철한 자세로 재정립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이 지향하는 것이 결코 감정적인 "반미"가 아니라는 점과 한미관계를 새로운 환경에 맞도록 재정립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된다는 점을 미국 측 인사들에게 인식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굳게 먹고 교섭에 임한다면, 보다 합리적인 한미관계의 정립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을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런데 그것은 한미관계의 합리적 재정립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동북아의 배타적 패권을 노리는 미국의 종속국으로 남아서 미군기지의 역할에 안주하고 있는 나라가 그 지역의 중심국가가 되겠다고 나서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이 이를 어떻게 수긍할 수 있겠는가?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