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은 알겠는데 통일미학은 낯설다. 또 이 두 가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통일시대에 살고 있다.

통일시대란 풀 한 포기 돌 하나까지 통일과 연관지어 사고할 수 있는 문화역량의 성숙을 요구한다. 통일이 되고 나서 우리의 의식이 바뀌는 게 아니라 통일이란 번역기로 우리의 사고가 바뀌는 과정을 통해 통일을 더 빨리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통일을 정치나 경제의 측면에서 접근해 왔다.

그러나 금강산관광을 하고 남북으로 대규모 인원이 오가고 있는 작금의 통일시대는 통일을 `요구하는` 시대를 넘어 통일을 `즐기는` 시대이다. 통일을 즐기는 시대를 더 활짝 열기 위해서는 지루한 논리보다 아름다움의 추진력이 필요하다. 통일미학을 운운하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통일의 미학을 건설하는데 역시 그 바탕은 민족미학이다. 그래서 민족미학의 가장 원초적 소재중의 하나인 고인돌로부터 그 기준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적이 되었다. 전북 고창에는 남방식이라고도 하고 바둑판식이라고도 불리는 고인돌이 전형적으로 남아있다. 전남 화순에는 고인돌 제작소인 채석장 흔적이 그대로 있어 그 제작과정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유적이 특징 있게 남아 있다. 강화도는 고창의 고인돌보다 규모에선 작지만 기울어진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 전형적으로 남아 있다.

고인돌 양식의 선후문제는 여러 가설이 있으나 필자의 견해로는 바둑판식으로부터 탁자식으로 다시 기울어진 탁자식으로 절정에 이르렀다가 개석식으로 최후의 형식을 맞이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인돌은 다른 나라에도 존재한다.

프랑스에도 있고, 영국의 스톤헨지와 카프카즈지방 (흑해와 카스피해) 인도, 남아시아 중국의 절강성, 요동성 이북지방, 일본의 큐슈지방에서 나타난다. 고인돌은 유라시아대륙에 집중되어 있는 문화이며, 그것도 대륙의 육로보다는 바다의 해로를 따라 분포하면서 고대문명 교류의 뚜렷한 흔적을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강화도에도 100여기가 넘는 고인돌이 있지만 부근리 마을에 있는 고인돌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우선 고인돌을 어떻게 찾아가는지부터 설명하는 게 순서이지 싶다.

강화읍에서 전등사쪽으로 좌회전하지 않고 계속 직진하면 송해면으로 가는 삼거리가 한번 나오고 그 다음이 부근리 삼거리이다. 부근리 삼거리에서 보면 강화에서 유일한 하점면 공단이 있는데, 이 공단의 바로 맞은편에 고인돌 공원이 있다. 강화도에서 매해 추진하는 고인돌 축제로 제법 알려졌고 무엇보다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고인돌 사진이 바로 이곳 부근리 것이어서 사실은 가장 유명한 고인돌이 되었다.

이것이 세워진 시기는 청동기시대였던 고조선시대이다. 삼국지 위지 공손도전에는 `요동 양평 연리사에 큰 돌이 불쑥 솟았는데, 길이는 한길을 넘으며 아래에는 작은 돌 세 개가 다리로 되어 있다`고 하고 이것은 그가 왕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상서로운 징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인돌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1세기까지도 고인돌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그 정체를 땅에서 솟은 것으로 보아 신비화하고 있다. 그것은 고인돌이 땅속의 돌널무덤에서 땅위로 올라오게 된 과정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작은 돌을 모아 쌓은 돌무지 무덤문화와 큰돌을 이용한 고인돌문화 사이에는 새로운 능력을 가진 사회적 단계가 필요하다. 돌도끼는 발견한 결에 대해 인간이 직접적으로 작용해야 하지만 큰돌은 결에 대한 인식과 그 결을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결을 조합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큰돌을 얻을 수 있었으며, 돌을 얻는 과정만을 보면 직접 돌을 깨는 것보다 덜 위험하고 덜 힘이 들게 되었다.

이 부근리 고인돌은 북방식으로 분류되는데 북방식과 남방식의 형식적 차이는 고임돌을 쓰느냐, 바둑판처럼 작은 돌을 네 귀퉁이에 받치느냐로 구분되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차이는 시신을 땅에 묻는가 땅위에 놓는가에 있다. 땅에 묻고 안 묻고는 다시 한번 결정적인 문화의 차이를 나타내는데 매장문화는 농경문화이고, 비매장문화는 기마문화이기 때문이다. 농경문화는 이전에 없던 공간개념을 만들어 냈다. 땅을 죽은 자의 사후 세상으로 본 것이다. 이 공간 개념은 더 발전하여 죽은 자가 거처할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돌널을 사방으로 막고 덮개돌을 덮는 방식이다. 물질적 신체가 없어진 죽은 자가 이 공간에 머물며 살아있는 자들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부근리 고인돌의 측면에 서서 보면 뒤쪽은 덮개돌과 고임돌의 끝이 일치하는데 앞쪽은 고임돌에 비해 덮개돌이 튀어 나와 있다. 즉 덮개돌 아래에 여유공간이 형성된 것이다. 이 공간은 무엇일까? 이북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비교해볼 때 이 공간은 문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죽은자를 산자와 같이 거처하게 할 뿐 아니라 산자가 그와 만나기 위한 통로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무덤안에 산자와 죽은자 간의 소통체계가 완벽하게 만들어지게 되고, 죽은자에 의한 통치가 가능해 진다. 새로운 공간개념의 창안은 결국 과거를 통해서도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니 시간개념도 같이 창안된 것이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정치권력과 사회체제의 창조물이다. 시신에 대한 식인 풍습은 그의 영혼과 지위를 공동체가 나누어 먹음으로서 공유하거나 전이된다는 관념에 기초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물질적 한계에 부닥치고 공동체를 통합시키기보다 심각한 분열로 몰아갔다. 사회의 존립에 식인 풍습의 유용성이 감소하게 되자 이는 결국 폐기되기에 이른다. 시신과 영혼의 개념을 분리하게 되고, 무덤공간의 창조를 통해 시간을 지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덤의 공간은 사회를 지배하는 구심이 되었고, 여기서 창안된 시간개념은 역사를 지배하는 뿌리가 되었다.

부근리 고인돌은 어떻게 감상해야할까?

문명은 사람관계의 기록이기 때문에 거꾸로 문명의 책장을 더듬다 보면 그 문명을 대할 때의 사람관계를 발견해 내는 행운을 잡을 때가 있다.
이렇게 해보자. 고인돌 정면에서 한 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뒤로 서서히 물러나다 보면 고인돌이 눈에 가득 들어오는 한 지점에 서게 된다.

그 지점에서 몸을 서서히 낮추면 고인돌을 우러러보게 되는 또 하나의 위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위치는 거의 땅에 닿았을 때 발견되는데 고인돌을 실제 대하던 사람들의 자리를 우리는 그렇게 어림잡아 볼 수 있다. 물체를 바라볼 때 가장 알맞은 거리는 물체의 최대높이나 길이의 3배인데 이 거리는 물체의 양끝을 바라보는 화각이 20도가 된다. 관광객의 입장이 아니라 당시 이 무덤 관계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고인돌을 정확히 감상할 수 있는 지점은 몸을 땅에 대고 우러러 봐야 하는 지점이다. 사진모임 사람들과 함께 가서 사진을 찍어 보시라 하고 나중에 보면 거의가 고인돌의 뒷쪽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에는 이유가 있다. 뒷쪽의 지면이 밭을 만드느라고 사람 키만큼 내려가 있기 때문이다. 즉 시선을 땅에 가까운 지점에서 올려봐야 그 웅장한 자태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개의 고임돌이 60도 정도 기울어져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직각으로 고임돌을 세워 놓았을 때 보다 기울어져 있을 때 웅장한 느낌이 더해진다. 고임돌에 기울기를 준 것은 비단 이 고인돌 뿐 아니라, 나주의 일부 고인돌과 강화도의 거의 모든 고인돌에서도 발견되는 양식이다.

수많은 고인돌이 있는데 특히 이 고인돌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고인돌에 빠져든 것은 바로 이 기울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탁자식 고인돌이 6~70기로 전체의 2/3가 되는데 이중 3기만 빼고 모두 기울어진 고인돌이다. 그리고 땅에 그렇게 깊이 묻혀 있지도 않다. 기울기가 우연히 이루어진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울기가 왜 중요한가.

모델이론이란 것이 있다. 연구하고자 하는 사물의 모델을 실제와 가장 유사하게 만들어가면서 사물의 법칙을 밝혀내는 방법론이다. 가설과 논리의 메마른 정의가 아니라 유비(유사한 것)를 통해 생동한 실제를 재현하는 것이다. 과학과 미학을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나는 이 방법에 호감을 갖는다.

고인돌도 모델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비슷한 돌을 뒤뜰에 날라다 쌓을 때까지도 고인돌 같이 단순한 건축물을 이렇게까지 해 볼 필요가 있나 하는 자문이 있었지만, 고인돌을 쌓아도 쌓아도 쓰러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의 경솔함을 후회했다. 기울어진 고인돌을 쌓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우연히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억지로 버팀돌을 대서 고인돌을 세워놓고 어떻게 기울어진 채로 고인돌이 서있는지 내가 아는 모든 과학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기울어진 지석이 땅과 직각삼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각삼각형에 생각이 미치자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연상됐다. 그런데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시대에 피타고라스정리 같은 것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엔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었고 중국에는 있었다. 천문학서인 주비산경(周 算經)과 진서(晉書)에 나오는 구고현(句股弦)의 정리가 그것이다. `고(股)`란 허벅지를 뜻하는데 무릎을 구부렸을 때 삼각형이 만들어지는 원리에서 추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句)`는 밑변이고 `현(弦)은 삼각형의 빗변이다. 구와 고로 현을 구하는 방법(句股求弦之法)이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때 만들어진 책이니 고조선보다는 시대가 한참 지난다.

이에 비해 주비산경은 기원전 1000년경 전국시대 이전인 주나라 때로 올라간다. 피타고라스정리가 기원전 500년경이니 그보다 500년 정도 앞선다고 하겠다. 당시 고조선은 중국과 인접하여 있었고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가 서던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서경에는 훗날 기자조선의 주인공이 된 기자의 고사가 전한다. 기자는 청동기문명의 고대국가인 은나라의 엘리트로 주나라 무왕에 의해 고조선의 제후로 책봉되는데 무왕이 기자를 찾아가 우왕이 하늘로부터 받았다는 국가경영의 9가지 근간인 `홍범구주(洪範九疇)`에 대하여 설명 듣는 대목이 있다. 그중 4번째 항목이 천문역법에 관한 이야기이니 이미 이때 주비산경과 같은 천문역법에 관한 세련된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역사에서 기자조선시기의 설정은 그 같은 문명의 도입과정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기울어진 고인돌을 설명할 수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석사이에 채울 흙의 양과 인력의 동원수를 계산해내는 정도이다. 기하학이 아닌 역학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건축공학자인 김인성씨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기울기가 아니라 기울어지게 하려는 힘이 문제였다. 이를 `모멘트`라 한다. 예를 들면 손으로 막대기의 중간을 잡으면 균형을 잡기가 쉽다. 그런데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똑같은 힘을 주었어도 막대기는 한쪽으로 기울어지려 한다. 모든 힘은 모멘트와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막대기의 중간을 잡았을 때는 모멘트가 0이 되기 때문에 힘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막대기의 끝을 잡으면 모멘트가 극대화되기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지석의 기울어지려는 힘을 상쇄시켜서 0이 되게 해야만 고인돌은 기울어진 채로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지석의 기울어지는 힘을 상쇄시켜주는 것은 상석의 기울기이다. 상석이 기울어져 있어야만 지석의 모멘트를 상쇄시킬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기울어진 고인돌이 서있을 수 있는 조건은 세 가지이다.
상석이 무거울수록, 상석이 기울수록, 지석의 낮을수록.
다시 공식에 따라 고인돌을 쌓았다. 성공! 고인돌은 너무나 아름답게 기울어진 채 서있다.

고조선의 기록 어디에도 이런 고도의 역학공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인돌을 이렇게 세우려면 직관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주비산경의 기하학만으로는 고인돌을 세울 수 없지만 이 고인돌역학에는 주비산경의 구고현의 정리가 응용된다. 즉 기울어진 물체의 힘 작용점은 2/3 지점이다. 이 지점으로부터 바닥의 핀까지 빗변의 길이가 되고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 핀에서 힘 작용점까지의 거리가 결정된다. 중력에 의해 힘은 직각으로 작용한다. 직각삼각형의 원리이다. 단 직각삼각형의 원리가 기하학이 아니라 역학에 적용된 것이다. 당시 고조선의 과학수준이 최소한 이 부분에서만큼은 탁월했다는 증거이다.

고인돌이 이렇게 과학적으로 실험된 증거가 있을까?

나는 고인돌을 틈만 나면 보고 또 보았다. 그러다가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왜 이렇게까지 힘들게 기울기에 집착했던 것일까? 하다보니 우연히...? 아니다. 부근리에는 상석도 없이 서있는 하나의 지석(15번)이 있다. 지석의 높이나 기울어진 각도가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137번 고인돌과 비슷하다. 상석과 지석은 어디에 있을까? 나의 추정으로는 이 지석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실험용이었던 것이다.

고인돌이 오래되어 붕괴된 경우라면 이 정도 규모의 고인돌은 반드시 그 자리나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잔해가 발견되어야 한다. 아니면 누군가가 포크레인으로 번쩍 들고 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상석이 없이 지석이 기울어진 채로 서있을 순 없다. 즉 상석을 들어내는 순간 이 지석도 쓰러졌어야 한다.

고인돌은 세 개의 돌로 구성되지만(두개의 막음돌은 역학적 구조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므로) 기울어진 채 건축되는 순간 하나의 물체가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 이상이 생겨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때문에 부근리식 고인돌은 지석을 기울여놓고 그 위에 상석을 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수직으로 세운 지석 위에 상석을 올! 리고 한쪽을 밀거나 잡아당겨 기울어지게 하는 수밖에 없다. 즉 따로따로 건축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137호 고인돌의 상석 남쪽모서리 부분에는 4개의 정교한 4각형 홈이 파여져 있다. 이 홈은 성혈과는 다르고 채석 흔적으로 보기에도 부적합하다. 남쪽에서 기울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걸어서 잡아당긴 흔적으로 나는 보았다. 이와 더불어 북쪽의 지석 뒤쪽이 깨어져있다. 이는 직각으로 세워져 있다가 상석을 남쪽으로 기울이는 과정에서 힘의 과부하로 깨어진 흔적으로 추정된다.

다시 하나의 지석(15번)으로 돌아와 보자. 이 지석이 상석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땅의 묻힌 부분에 돌을 쌓아 바쳤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고인돌을 세울 때 썼던 방식이다. 흙이 유실되고 돌이 치워지면 이 돌은 쓰러진다. 그러나 기울기의 역학을 이용하면 땅에 깊이 묻거나 돌을 쌓아 받치지 않아도, 어떤 힘의 보조도 필요 없이 설 수 있게 된다. 인근에 있는 대산리1호나 점골 24호 등 대부분의 고인돌이 쓰러진 이유는 돌과 지반의 유실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기울기 역학대신 돌과 흙 같은 보조적 힘에 의존했다가 그것들이 유실되면서 쓰러졌을 가능성이다. 때문에 하나의 지석(15번)은 사적 137호 고인돌의 축성을 위한 실험용이라는 생각이다.

그럼 당시 강화도의 고조선인들은 왜 이렇게 기울기에 집착을 하고 엄청난 공을 들인 것인가? 모든 문화양식은 있는 것과 있어야할 것과의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있는 것을 있어야할 것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문화를 창조한다. 이런 기울기가 우연이 아닌 이상 당대의 고조선인들은 기울어지도록 해야만 하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고난도의 기술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을 흥분시켰던 이상은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당대 다른 문명권의 미의 이상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중국을 보자

[국어.주어(하)]에서 영주구( 州鳩)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정치는 음악과 비슷하니, 좋은 음악은 조화로움에서 나오고, 조화로움은 각 악기가 침범하지 않는 안정됨(平)에서 나온다.(...) 잘 맞는 것이 모인 것을 소리라 하고, 조리가 조응하여 서로 돕는 것을 조화(和)라고 하며, 높고 낮은 소리가 제 소리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은 것을 안정됨(平)이라 한다.(...)이에 만물이 잘 자라고, 인민은 화해롭고 이롭게 된다.(...)이런 고로 음악은 올바르다.

(夫政象樂, 樂從和, 和從平, 聲以和樂, 律以平聲,(...)極之所集曰聲, 聲應相保曰和, 細大不踰曰 平,(...) 嘉生繁祉, 人民和利(...) 故曰樂正)"

평과 화의 개념을 음악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중심음으로 도량형을 정하고, 이것으로 건축의 잣대로 삼았다. 중심음이 황종으로 설정되었고 이것을 조화음이라고 했다.

고대 희랍인들의 이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조화에 관한 이론적 흔적은 피타고라스 학파에게서 발견된다.
피타고라스의 `조화` 또한 음악과 연관이 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사실 오르페우스(Orpheus)교라는 밀교의 지도자였으며 그는 플라톤의 시대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천체가 운행할 때 다른 물체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내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영속적으로 울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천체들은 일정한 비율로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이 천체의 소리는 특수한 화음을 이루고 있다고 여겼다. 이 특수한 화음이란 훗날 케플러를 천문학에 광적으로 몰입하게 한 저 유명한 화두 "천구의 화음"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일정한 음의 높이가 현악기의 일정한 현의 길이에 상응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자신의 오르페우스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음악의 비밀을 알아내게 되었고, 이는 더욱 확고한 신념을 부여해 주었다. 이 위대한 발견의 중심에 수(數)가 있었다. 수는 단순한 과학이 아니었으며 세계관이었고 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는 음악이야말로 조화의 본체로 생각되었다. 이로부터 근대까지 서양의 사상사를 규정한 개념이 성립된다. 질서(Cosmos)이다. 이처럼 동서양 모두 미의 이상을 조화라는 개념으로 집약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광객이 고인돌 앞에 서있는 시간은 5분도 안되지만 나는 고인돌을 보면 볼수록 낯설었다. 뒤늦게 깨닫게 된 사실은 이 고인돌이 건축과 공간학의 측면에서 봤을 때 어떤 계보하고도 연결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의 건축은 물론이고, 서양건축사에 큰 획을 그었던 기둥과 아치, 판테온식 돔형지붕, 고딕성당의 천정 등은 그 획기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형과 조화를 추구하는데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근대소설에서 사회의 부조화를 폭로할 때도 건축만큼은 조화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의 음악이자 초상으로서 건축의 고유한 장르특성으로까지 인식되었다. 그러나 부근리 고인돌은 기울기를 통해 부조화와 비정형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죽은자의 입장에서 이 공간은 기울어진 방과도 같다. 어떤 민족의 건축에서도 일부러 기울어진 방을 창조하진 않았다. 더군다나 죽은 자로서 최고의 권력이 행사되는 무덤공간을 이렇게 일부러 기울인 경우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때문에 부근리 고인돌은 그냥 쉽게 지나치든지, 볼수록 난해해져 탈현대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조화속에 감춰진 조화, 비정형의 정형 이것이 부근리 고인돌에 고도의 과학적 능력을 투여한 사람들의 미의 이상임에 분명하다.

부조화의 조화

원래 중국에서의 미학의 시초개념인 `화`는 조화로 번역되기보다는 화해로 번역되는 게 맞다. 왜냐하면 `조화`는 화를 다시 줄서게 하는 것, 즉 정제되지 않은 것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는 반면 `화해`는 불화를 풀어 어우러지게 한다 의미가 있다.

그러니 화의 진정한 의미는 불화不和와 화和가 서로를 배제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화는 조화의 의미로, 불화를 평정하고 똑바로 질서 지운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서양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서양에는 변증법이란 것이 있었다. 변증법은 대화술에서 탄생된 것인데, 내가 말을 하고 나의 말을 상대가 받아서 이야기 할 땐 한 단계 발전되어 있고, 그이야기를 듣고 내가 다시 이야기 할 때는 나의 처음 입장이 변화될 수도 있다는데서 변증법은 변화와 발전의 철학방법이었다. 이것을 헤겔이 최종적으로 정리했는데 1과 2가 대립하며 통일되어 있다가 3이라는 새로운 질로 발전한다는 정반합의 논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헤겔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것은 달리 이해되었다. 즉 1과2가 싸워서 이긴 것이 3이라는 생각이다. 변증법에는 상생과 상극의 원리가 함께 통일되어 있는데 서양철학은 주로 상극만을 강조했다. 그리고 3을 조화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문화가 생겼다.

고인돌을 비롯한 우리의 민족미학은 `화`와 `불화`가 상극으로 대치할 뿐 아니라 상생하기도 한다는 원리에 기초해 있다. 기울기라는 `불화`를 파괴하여 `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풀어서 화와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풀기가 바로 상생과 상극을 어우러지게 하는 방법이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풍물을 칠 때 내고 달고 맺고 풀기라는 원리가 있다.

내는 것이 `동기`라면, 달구는 것은 동기의 `발전`이고, 맺는 것은 `결말`이자 절정이다. 서양은 여기에서 끝이 난다. 기승전결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나라엔 맺은 다음에 반드시 풀어주기가 있다. 어우러짐이 다양성의 방만한 수용이 아니라 맺음이 있고 바탕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바탕위에서 서로 좁혀지지 않은 차이를 이해하고 관용하며 공존하도록 하는 것이다. 대동놀이라는 것이 이것이다. 대동놀이가 즐거운 것은 맺고 풀기가 자재롭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학은 불화나 화로 단절되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풀기를 통해서 불화의 화, 즉 불화이면서 화하고, 부조화하면서 조화로움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과거시대 분단의 미학은 바로 이 점을 결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군사정권 시절에 변웅전씨가 진행하던 `유쾌한 청백전`이란 오락프로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청색의 대비를 흰색으로 선택하는 나라는 없다. 음양사상이 아니라도 파랑의 대비색은 빨강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시대는 청홍전이 아니고 청백전이 되었다. 빨강을 곧 공산주의로 생각하는 극단적인 편견이 빨강의 자리에 흰색을 끼워 넣게 만든 것이다. 시골학교 가을운동회에서도 청백전을 만들 정도여서 누구나 청백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는 지경이 되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식을 파괴하면서까지 내 맘대로 조작해야 인식하기 편한 선험주의 철학이 분단미학의 사상적 기반이다. 파랑과 빨강으로 어우러진 태극의 형상에서 빨강을 표백시켜 흰색을 만드는 순간 태극자체가 사라지듯이 기울어진 지석을 상석을 기울여 세운 강화도 고인돌 또한 지석을 똑바로 세우는 순간 그 역동성과 웅장함이 사라지고 평범해지는 것이다.

반대로 불화 또는 차이를 인정만 하는 것도 문제이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것에만 그치면 방임이 된다. 인정을 넘어서서 풀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고인돌을 보라. 기울어짐을 인정만 한다면 지석은 쓰러진다. 강화의 고조선인들은 기울어짐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 비밀을 풀어냈다. 그래서 상석을 기울어지게 한 것이다. 풀기의 과정은 감성이나 의지만 강조해서 안된다. 냉정하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풀어야지 불화의 화, 부조화의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불화의 화, 부조화의 조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강화도 고인돌만 이런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중에서도 이같은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게 있나를 살펴보자. 그래야 이 미학원리가 보편적임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민요를 보자.
고대로부터 전래되어 온 우리의 민요는 불협화음과 협화음이 둘이면서 하나로 어우러진 독특한 구조를 보인다. 민요는 떠는청. 본청. 꺽는목으로 구성된다. 본청만 협화음 즉 안정된 조화음이고 떠는청과 꺽는목은 모두 불안한음 불협화음이다. 민요와 소리의 맛은 불협화음인 떠는청과 꺽는목의 농현에 의해 무르익는다. 중국 정악이 12 율려중 황종을 중심음으로 치밀하게 계산된 음인 것과 대비된다.

다음은 체육부분인 무술을 보자.
무술을 무예무도라고 불러온 것처럼 무술도 미적인 것을 추구해 왔는데, 전통무예인 태껸의 동작은 불균형의 균형을 그 특징으로 한다. 태견의 기본 수련동작인 품밟기는 삼박자를 기본으로 한다. 두 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쿵후나 다른 나라의 무예와 리듬자체가 다르다. 두 박자는 균형을 중시하는 리듬이다. 그러나 삼박자는 균형이 흔들린다. 이 불균형을 연속으로 이어가는 것이 태껸이다. 불균형의 불균형은 균형이 되는 원리이다. 하지만 그 기본은 불균형이다. 소리와 같다.

음식도 생각해 보자.
음식의 삭힌 맛도 마찬가지 음식에서 부패는 부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을 삭힌다. 삭힌 맛은 부정의 긍정이다. 복잡한 맛이다.
때문에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깃들어 잇는 지혜들을 조금만 잘 생각해서 찾아내면 그게 바로 통일미학의 원리인 때가 많다.

고인돌과 연관된 건축분야를 보자.
부근리 고인돌의 기울기의 미학원리는 당대 어떤 문명권에서도 또 현대에 이르는 어느 시대의 건축사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보니 이런 원리를 이용한 건축물이 생겨나고 있다. 현재 새로 짓고 있는 서울역 건물을 보면 지붕이 물결모양으로 기울어져 있고 기둥은 경사가 진 기둥을 이용하고 있다. 인천공항과 일본의 간사이공항, 워싱턴의 덜레스 공항 등에서 나는 기울어짐의 미학을 발견했다. 기울기의 미학은 건물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들이 고인돌의 기울기 미학으로부터 그 원리를 배운 것은 아니다. 근대가지 이어져온 건축미학의 근본에 대한 파괴로부터 탄생된 것이다. 우리에겐 파괴가 아니라 복원하면 되는 훌륭한 재부를 가지고 있으니 바로 부근리식 고인돌이다. 어쩌다 보니 서양의 탈현대건축과 우리의 고대 고인돌건축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통일미학이나 민족미학이 민족내부용이 아니라 세계의 보편적 미학을 계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만큼 강화고인돌은 어떤 건축적 계보에도 속해 있지 않은 독창적인 미학을 민족문화의 재부에 첨가시킨 것이다.

이런 통일미학을 정치적인 논리에도 연결시킬 수 있을까?

정치는 즐거움을 줄 수 없지만 즐거움속에서는 정치도 기적을 일으킨다. 정치는 미학을 대신할 수 없지만 미학은 정치를 보완할 수 있다. 통일의 시대라는 말과 함께 화해와 협력의 시대라는 말이 등장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자체로는 통일문서라기보다는 화해문서이다.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고 여러번 한반도에 전쟁위기가 다녀갔지만 남북정상회담은 화해의 시대를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만남 자체는 분단시대를 살아온 우리의 미학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미학적 사변이 일어난 것이다. 북이 뿔달린 도깨비에서 동반자로, 적에서 이웃으로 바뀌었다. 이제 구석구석 이 통일미학을 적용하는 일이 남았다. `사람을 사람으로 짐승을 짐승으로 볼 수 있게 하소서` 하고 외쳤던 문익환 목사님의 이상이 실현된 것이다. 화해는 앞서 설명했듯이 그 자체가 통일미학의 내용이다.

통일의 시대가 논리의 법칙이 아니라 미학의 법칙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남북연합과 연방제의 공통점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화해의 시대에서 통일의 시대로 들어선 것이다. 기울어진 것을 바로 세우려는 원칙은 통일의 미학도 민족미학도 아니다. 기울어졌다고 보여지는 북의 체제와 상생하기 위해 우리를 기울이는 일이 화해의 미학이다.

강화 부근리 고인돌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새 사위가 어두워 온다. 구름 뒤로 숨는 노을 빛이 강렬한 빛을 뿜으며 고인돌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햇살은 평행이 아니라 기울어져 있기에 한 점에 모일수도 있고 사방으로 퍼져 나갈 수도 있는 것. 그러고 보니 햇살도 기울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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