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와 통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통일은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민족의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문화로부터 분단이전의 우리자신을 기억해내고 통일의 상상력과 이상을 회복하여, 분단모순을 극복해나가는 것, 이것이 `통일맞이 운동`이다. 민족의 본성을 자각하여 분단을 극복하고 다시 민족의 본성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연평도의 조기는 서해안 조기문화의 정점이었으며 남북간에 가장 치열한 문제인 북방한계선과 조선서해해상군사분계선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해도서의 문제를 푸는데 중요한 고리가 영해문제이다.

1982.4.30 유엔 3차 해양법회의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 (영해)기선을 긋는데 실질적 문제는 사실상 이들 선 안에 놓여 잇는 해역들이 하수지배를 받기 쉽게 국내토지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느냐.

- 그렇지 않다면 해당지역에 대한 독자적인 경제적 이해와 그 해당지역에 대한 실체성과 중요성이 오랜 사용으로 명백히 입증되어야 한다.

두 번째 조항은 역사적 응고의 원칙을 말하고 있다. 때문에 영해문제와 관련하여 연평도의 조기문화는 민족문화로서의 영해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연평도의 조기문화라는 것이 어느 정도였을까? 사실 조기문화는 연평도를 정점으로 한 한반도 서남해안 전역의 문화였다. 조기는 동해에는 없고 갯벌을 끼고 있는 서남해에서만 나는데 곡우를 전후하여 남에서 서쪽으로 회유한다. 제주도 서남쪽과 상해 동쪽의 따뜻한 바다에서 월동한 뒤 북상하여 3월 하순경에 칠산바다에 이르러 이때부터 첫 어획이 시작되는데 이곳부터 노래가 시작된다.

진도뱃노래의 첫머리는 `칠산바당(칠산바다) 너른들`에서 서서히 조기를 잡아 올리는 대목으로부터 시작된다.

칠성바당 너른들에
어기야어하 어기야 어하
고깃배가 돌아온다
어기야어하 어기야어하
어허어허어 어허어허어어 어하 영차(으영차)
어기야차저차 으어허어어어 영차(으영차)

4~5월에 연평도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6월 압록강 대화도 부근에 이르고, 6월 말경 발해만의 간석지에서 산란한다. 진도 뱃노래의 절정은 연평도 조기잡이의 신명어린 양산도 가락이다.

연평바다에 널린 조기 양주(새끼)만 남기고 다 실어라
에야디야 에야디야 이고기를 많이 잡아 이밥(쌀밥)한번 먹어보세
선주놈 마누라 인심좋아 막내딸 키워서 날준다네
에야디야 에야디야 이고기를 많이 잡아 이밥한번 먹어보세
고기를 잡네 고기를 잡네 만선일세 만선일세
에야디야 에야디야 이고기를 많이 잡아 이밥한번 먹어보세

진도 뱃노래는 조선시대이래 우리 밥상과 제사상의 중심 찬거리였던 서해안 조기문화에 관한 일대 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평도 선착장이 있는 당도에서 연평 본섬까지는 1km가 넘는데 파시가 설 때는 배만 밟고도 당도까지 건너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연평에선 4월 하순이 되면 조기떼가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배를 띄워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먼바다에서부터 아련하게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개구리가 떼지어 울듯 아우성소리로 바뀌며 다가오다가, 쳐놓은 그물에 이를 때면 시끄러워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안 들릴 정도가 된단다. 많을 때는 4-5만 마리까지 잡히고 때로는 들어올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그물이 구멍나는 경우까지 있었다 하니 `만선이란 징말로 그런것이 만선이여`라는 어민들의 말에 신명이 들어 있었다.

연평도 입구에 세워진 조기잡이 동상은 `물반 고기반`이라던 연평조기어장을 표현하기 위해 바다속 물기둥을 통과하는 거대한 조기떼를 새겨 넣고 있다. 이들에게 조기는 눈감고도 보이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해의 명태와 비교해서 왜 황해의 조기문화가 특별해진 것일까? 이는 임경업 장군과 연관이 있다. 인간은 나서 죽을 때까지, 탄생을 탄생`답게` 죽음을 죽음`답게` 하기 위한 삶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그것은 문화가 된다. 조기에 의해 축복된 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연평도에서 조기를 자연상태의 조기로 놓아두었을 리 만무하다. 

조기를 조기답게, 황해의 역사를 역사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모르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역사와 문명이 하나로 통일되는 그 어떤 지점에서 황해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황해에는 사당마다 임경업 장군신이 안모셔진 곳이 없다. 황금조기의 전설과 함께, 황해안을 지키는 신격으로서 임경업 장군신의 채택은 황해의 조기문화가 만들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황금조기와 임경업 장군의 결합은 갯벌이라는 독특한 환경을 끼고, 중국과의 물류망을 가지고 있었던 동아시아인적 기질의 황해문화를 이해하는 접속코드가 된다.

이런 저런 설이 있지만 대략 연평도에서 내려오는 임경업 장군의 설화는 다음과 같다. 옹진군지와 주강현 선생의 책 등이 있으나 크게 차이가 없으니 연평 우체국장인 향토사가가 직접 사재를 들여 만든 연평지를 그대로 인용한다.

이조 16대 인조대왕 14년(1636년) 청태종의 침입으로 역사상 치욕의 병자호란을 겪고, 청은 우리나라와 명나라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에 행하여 오던 예를 청나라에 하도록 요구하고 두 왕자(소현세자, 봉림대군)를 볼모로 데려갔다. 당시 의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충의심이 강한 임경업 장군께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두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을 치려고 계획하던 중 육로보다는 수로가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마포나루에서 모 대상에게, 지금 의주로 가면 곡물을 비싸게 팔 수 있다고 꼬여 선박에 대량의 양곡을 싣고 행진하게 되었다. 연평도 앞바다를 통과할 무렵 선주와 선원들은 항로가 의주가 아니고 명나라로 가는 것임을 깨닫고 배에 싣고 있던 식수와 양곡, 부식, 연료까지를 모두 바다에 버리고 장군에게는 물자 부족으로 육지하구에 기항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경업 장군은 이에 속지 않고 즉시 배를 연평도 내항에 입항케 하고 식수로 바닷물을 실었는데 이는 소금물이 아닌 담수였으며(지금도 연평도와 소연평 사이에 "담수"가 나는 곳이 있다고 전함) 연료는 산에서 구하고 한편으로는 선원들을 시켜서 가시나무(엄나무)를 찍어 지금의 안목어장에 꽂게 하였던 바 수많은 조기가 가시마다 걸렸다고 하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 (...) 조기의 발견시기에 관하여 확실한 문헌은 없으나 1643년 5월27일(음)로 전해진다.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초부터 우리 식단에 동물성 단백질을 제공한 최대의 어종은 조기가 아니라 청어였다. 청어는 어장도 동서해안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최대의 고기찬을 제공했으나, 언제부턴가 천하 제일미의 자리가 청어에서 조기로 바뀐다. 이것은 청어의 생태특성 때문이다. 즉 수온변화에 민감한 청어는 어획량이 들쭉날쭉 했다. 그에 비해 조기는 청어에는 약간 못 미쳤지만 꾸준히 어획량이 유지되었으므로 값의 변동이 없고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모두에게 값싸고 맛있는 반찬이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설화는 `뭐니뭐니해도 청어가 제일`에서 `뭐니뭐니해도 조기가 제일`로 그 자리가 바뀌어간 과정을 문화적으로 매듭짓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연평바다를 떠나 제주도를 돌아 다시 연평으로 돌아오는, 조기문화의 정점이 바로 연평임을 확인시키는 그럴듯한 내력을 제공하는 역할도 함께 수행했다. 황해가 수평의 바다가 아니라 연평을 정점으로 한 수직의 바다임을 공식화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 자연은 사람의 생활과 만나 역사속에서 반복되면 문화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다. 문화란 진실의 법칙이 아니라 생활의 법칙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과 역사가 생활을 중심으로 맺게되는 `관계의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조기잡이라는 생활을 창조한 주인공이 임경업 장군이었다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생활을 중심으로 한 당시 사람들의 관계의 법칙을 헤아리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서해의 조기문화와 관련해서 볼 때 임경업 장군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임경업 장군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 사람이다. 인조반정은 동인세력중 대북파를 정치일선에서 완전히 탈각시킨 사건이었으며 서인 영구집권을 공고화시킨 사건이다. 서인은 황해도로부터 경기지방, 호서지방(충청), 호남까지 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서인은 사상적으로 조선성리학을, 정치적으론 친명배금노선을, 정세관으로는 북벌론으로 시대를 주도해 갔다.

그 군사적 실세가 임경업이었으니, 다른 많은 장군들에도 불구하고 임경업이 황해안 일대의 신격이 될 만한 조건은 그렇게 마련된 것이었다. 연평에 영구 이주한 첫 번째 집단은 이괄의 난이 평정되던 무렵 쫓기어 들어온 지씨와 채씨들인데, 임경업은 정충신과 함께 이괄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연평도에서 임경업 장군신이 추존된 것은 웬만한 육지의 세력관계를 등에 업지 않고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경업을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다. 그가 당시로서는 세계인이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에서 인정한 몇 안 되는 조선인, 청나라에 붙잡혀 재판을 받을 때에도 그의 이러한 자질을 아깝게 여겨 전례 없는 사면을 받을 수 있었던 조선인이었다는 점이다. 서인노론세력의 소중화의식은 당시 공동문명권과 민족문명권이 만나는 해법을 보여준다.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조선식 성취가 쏟아져 나오는데 소설에서 김만중, 그림에서 정선이 그랬다면, 군사에선 단연 임경업이었던 것이다. 이순신과 서산대사 같은 임진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민간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되지 못한 것은 이순신이 영남남인이었고, 서산은 억불정책에 눌려있던 승가의 인물이란 세력관계가 숨어있다. 그러니 임경업은 개인 임경업이 아니라 서인 임경업이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임경업은 장군으로서 뿐 아니라 황해의 해상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 점이 황해와 임경업의 인연을 결정적인 것이 되게 하였다. 의주부윤으로 있을 때 중앙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줄자 임경업은 아예 돈을 받아다가 중국과 무역을 하여 상당한 이재를 축적한다. 무기를 든 자는 세상이 적으로 보이기 쉽지만 임경업은 국방의 힘이 무기가 아닌 민중에게서 나오며 세상은 적대의 발전이 아니라 생활의 발전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전략가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과 내력이 장군신으로서 뿐 아니라 풍요를 가져다 줄 무역신으로서의 연평조기신으로 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것이다.  
 
문화란 창조적인 것의 다른 면에 지루한 관성의 모습도 갖고 있다. `답게`하는 과정이 간혹 `답`으로 둔갑하여 고착될 때 문화는 관성화된다. 임경업 장군신이 황해를 황해답게 하는 문화적 상상력의 과정이라면 연평도의 임경업 장군 사당인 충민사는 `답게`를 `답`으로 즉, 권력으로 만들려는 기획이었다.

그러나 연평사람들은 임경업 장군을 장군`답게` 생각할 뿐 이상형의 `답`으로 받아들이진 않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당에는 다양한 기원의 형식이 펼쳐 있었다. 엄격한 예의가 갖추어져야 할 유교사당이지만, 나뭇가지에는 누군가의 천도를 위해 옷과 천들이 걸려 있고, 앞마당에는 소주병이 뒹굴어 다니고 있었다. 무속에서 기복과 한풀이까지 자기나름의 형식으로 임경업 장군신을 해석하며 자기답게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평도다움은 바다라는 언제나 낯선 세계와의 대화와 만남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임경업 장군에 의해 조기잡이가 시작되었고 황해전역의 갯마을 사당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임경업 장군이 신이 된 것은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좋아서였다. 먼먼 바다 한가운데서 사람대접 받지 못하고 살던 섬사람들을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이괄의 난이 실패하고 연평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에게, 유배되어 다시는 살아나갈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그는 위대한 장군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이었다. 지금의 연평사람들이 육지에서 찾아온 이들을 맞이하듯이......

1980년대 이후로 바다의 주인공은 조기에서 꽃게로 바뀌었다. 지나친 남획으로 조기가 거의 사라지자 새로운 주인공이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꽃게다. 선주들은 꽃게 농사로 1억 정도나 벌 수 있게 되었다니 조기가 사라진 서운함이 이젠 완전히 극복되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조기문화에 필적할 꽃게문화가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아직까지 연평도 입구에는 조기잡이 동상은 있어도 꽃게잡이 동상은 없다. 그런데 꽃게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황해문화를 만들어낼 역사적 계기를 발견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서해교전이다.

서해교전은, 첫째 조기문화를 가진 우리민족의 해양문화의 가능성을 주목케 한다. 우리민족문화를 기마민족과 농경민족문화권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해양문화권으로서 해석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서울과 평양, 개성은 한강과 대동강, 예성강을 끼고 있는 도시이다. 이들 강을 끼고 있는 도시는 분단이후 하안도시로서만 기능을 해왔다.

그러나 세 강 모두 도시의 중심부까지 서해의 조류가 밀려들어온다. 때문에 이들 도시는 바닷배들이 강배에 짐을 바꿔 실을 필요가 없는 항구도시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분단에 의해 강마다 철책이 쳐지고 침투방지용 수중보가 건설되니 항구도시가 하안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황해는 동북아시아의 내해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역사적으로 황해의 주인이 이 지역 역사의 주인이었다. 서해교전으로 빚어진 전쟁의 가능성을 평화의 힘으로 바꿔냄으로서 남북은 미국이 쳐놓은 패권주의의 그물을 피해가며 유라시아대륙의 평화연대를 주도하는 위치로 바뀌어가고 있다. 동해의 나진선봉에 이어 서해의 신의주가 펼쳐갈 동북아 지정전략의 성공여부도 황해의 평화적 단합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서해교전은, 둘째로 이와 연관된 해양주권으로서 영해의 문제를 제기한다. 해상분계선과 영해선은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해양대국에 맞서 연안소국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국제해양법의 결정을 존중하여 영해문제가 풀린다면 세계적으로 군사력을 앞세워 해양패권을 추구해 온 미국을 평화의 힘으로 견제하게 될 것이다.

영해문제의 본질은 영해의 폭, 즉 영해를 몇 해리로 정하는가이다. 12해리가  해양주권을 지키려는 대다수 연안국들 최소한 요구이자 주장이라면, 해양군사력으로 연안국의 바다를 맘대로 사용하려는 미국을 위시한 해양대국의 주장은 3해리로 어떻게든 연안국의 영해를 좁히려는 것이다.

때문에 서해교전은 셋째로 영해문제와 관련 국가와 국가의 관계가 아닌 민족내부의 특수관계로 규정된 남북통일 과정에서 이 영해문제를 풀어가는 해법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었다.

남북의 문제는 엄격한 국제법적 논리로 풀기에는 현실적으로 비논리적 요소가 너무 많다. 그러므로 평화통일의 시점까지 엄격한 국제법적 해법으로 중간선 및 등거리원칙을 적용하는 것보다는 [남북한 공동 어로수역] 설정에서 그 해법을 찾는 것이 보다 현실성이 있다고 하겠다.

백령도 서쪽과 소청도-연평도 간 해상불가침선을 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일정한 범위를 설정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남북한 직교역에 대비하고 해상 교통을 위하여 무해통항권(無害通航權 innocent passage)을 보장하고 해상 교통로를 지정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무해통항로는 백령도 항로대(航路帶)와 연평도 항로대를 지정하여 북한 및 중국과의 해상교통을 원활히 하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남북어업협력이 됨과 동시에 미국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을 없애는 일이 된다.

남북정상회담은 이런 면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그동안 논의만 되던 남북공동어로문제 등을 당국간에 심도있게 합의했고 전국어민총연합 같은 단체가 북과 만나 민간차원의 구체적인 공동어로문제를 논의하기까지 했다.

전력이나 임진강 수해방지 사례에서 보듯이 ‘남북당국간 수산분과위’를 구성해 회담을 북측에 제의해 추진하는 것도 필요하다.

특히 북측은 지난해 4월 남측에서 어선, 어구자재 등을 제공하고 북측이 어장 및 선원을 제공해 어획한 생산물을 공동 판매하는 합작회사 설립을 수협에 제의한 바 있다. 이런 과정에서 남북공동 어로수역 설정문제를 자연스럽게 합의해내면 될 것이다.

연평도의 꽃게도 지나친 남획으로 조기와 같이 고갈되어 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염려가 들었던 적이 있다. 조기로부터 비롯된 황해문화를, 다시 꽃게가 이어받아 새로운 황해문화를 만들려 한다면 꽃게가 고갈되기 전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는 길 말고 과연 다른 길이 있겠는가? 함포소리마저 삼켜버리며 거침없이 몰아치는 역동의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맹자 한 구절이 떠오른다.

觀海難水
`바다를 보고 나니 물을 말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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