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언론 보도

 「17일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납치됐다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된 일본여성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는 1987년 KAL기 폭파범 김현희(金賢姬)씨의 일본어 교사로 알려졌던 한국명 `이은혜`, 바로 그 사람이다.」

동아일보 9월 18일자 <87년 KAL기폭파범 김현희 일본어교사 `이은혜` 사망 확인>이라는 기사의 일부이다.

조선일보 같은 날짜는 <아웅산 사건…KAL기 폭파…우린 왜 사과 못받나?>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들 기사만 보면 지난 9월 17일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일본측에 통보한 납치 일본인 명단에 다구치 야에코가 포함되어 있고 그녀는 김현희를 북한에서 가르쳤던 이은혜라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KAL 858기 사건을 자신들의 소행으로 시인했고 우리도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0월 1일자 연합뉴스의 <`다쿠치-이은혜 동일인물 미확인`>이라는 기사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최성홍(崔成泓) 외교장관은 1일 `북일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일본측에 행방불명자 조사결과를 확인해 준 다쿠치 야에코가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가 언급한 `이은혜`와 동일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일본측 설명`이라고 말했다.

최 장관은 이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의 외교부 국감에서 `북한이 이은혜 납치를 인정한 만큼 우리 정부가 북측에 대한항공 폭파사건에 대해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원들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다쿠치 야에코는 이은혜인가?

결국 이번 북일정상회담에서 납치된 뒤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다쿠치 야에코가 김현희가 자신을 북한에서 교육시켰다고 주장한 이은혜인지의 여부가 초점이다.

그런데 최성홍 외교통상부장관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일본측의 설명`이라고 국회에서 답변했다는 것이다. 즉 한국 정부나 일본 정부는 다쿠치 야에코를 이은혜라고 `확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들이 일제히 아쿠치 야에코를 이은혜로 `확신`하고 북측에 사과요구까지를 들고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1991년 5월 15일 당시 안기부가 `밤 9시에` 기자회견을 갖고 「그동안 김현희씨의 진술을 토대로 일본경시청과의 공조수사를 벌인끝에 일본수사팀이 15일 내한, 김씨를 만나 야에코씨의 사진을 보이자 김씨가 『이 여자가 내게 일본어를 가르친 은혜라는 여자가 틀림없다』고 확인했다」(경향신문, 991.5.11)는 이유에서이다.

더구나 다음날인 1991년 5월 16일에는 김현희가 직접 내외신기자회견을 통해 「사진을 보는 순간 은혜선생님임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살이 찐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 모습이 눈에 떠올랐으며 그리움과 함께 불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세계일보 1991.5.17)고 확언했다.

이때부터 이은혜=다쿠치 야에코라는 공식이 성립했으며, 그 뒤에 김현희는 1995년에 「이은혜, 그리고 다구치 야에코」(고려원 간)라는 책을 발간해 이은혜와 1년 8개월여간을 같이 살아온 내용을 소상히 공개했다.

김현희 증언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결국 이은혜=다쿠치 야에코라는 공식은 김현희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김현희의 증언이 만일 거짓이라면 이 공식은 성립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김현희 증언의 신뢰성에 달려있다. 김현희 증언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KAL858 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된 1988년 1월 15일부터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안기부가 김현희가 북한 공작원이라고 제시한 가장 중요한 물증인 사진 한 장을 둘러싼 논란이 바로 그것이다. 1972년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표단 환영행사에 화동들이 꽃다발을 증정하는 사진을 보고 김현희가 그중에 한 명이 자신이라고 증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속의 화동은 평생 잘 변하지 않은 귀부리 모양이 김현희와 달라 동일인이 아니라는 세간의 지적이 일었고, 김현희 본인은 이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가운데 조선일보가 그 소녀는 김현희가 아니고 사진속의 다른 소녀가 김현희라고 대변하고 나섰다.

KAL 858 가족회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근까지도 국정원은 김현희의 최초 증언이 맞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일본에서 KAL 858기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있는 노다 미네오(野田峯雄, 57)씨는 김현희의 수기에 적힌 대로 김현희의 유럽행적을 조사해 본 결과 사실과 다른 대목만 80여건을 찾아내기도 했다.

의혹 풀 구체적 물증 제시해야

결국 이번 언론 보도의 엇갈린 주장은 유일한 증거인 김현희 증언에 대한 신뢰여부와 연관돼 있으며,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보다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물증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외교통상부 한 관계자는 "북한은 이번에도 이은혜라는 인물은 없다는 것이 공식입장"이라고 전했으며, "김현희의 증언이 유일한 물증인데 북한이 시인하는 증거를 내놓기 전에는 추정할 수는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KAL 858기 사건을 추적해온 현준희(49)씨는 다쿠치 야에코가 이은혜라는 일부 보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무엇보다 먼저 김현희의 세모난 귀가 어떻게 동그란 귀로 바뀌었는지부터 밝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현준희씨에 따르면 일본측이 이미 91년 이은혜가 납치된 일본 여성 다구치 야에코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금년까지도 이 사건 담당 사이타마 경찰서는 미결 사건으로 수배령을 해제하지 않고 있다고 전해들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 정부도 아직 이은혜=다구치 야에코라는 공식을 내심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KAL 858기 사건이 일어난지 15년이 지나고 그때처럼 다시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북일정상회담에서 불거진 일본인 납치 문제가 추측성 기사나 정치적 논란의 꺼리가 되기보다는 KAL 858기 사건에 대한 그동안의 의혹을 조금이라도 풀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구체적 물증에 근거한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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