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역 인민위원회와 소련의 점령정책

해방, 그것은 한국민중에게 자유의 종소리였습니다.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민중은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활화산처럼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해방의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권기관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자생적인 정치조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소련군이 평양에 들어오기 전부터였습니다. 일제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권력의 공백상태가 생기자 독립운동가들이나 지방 유지들이 나서서 치안을 확보하고 일본인의 재산을 접수, 관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자치조직들의 성격은 지방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그 지방에서 전개되었던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평안도 지역에서는 자치조직에서 우익의 영향력이 강했고, 항일무장투쟁과 적색노조 등 좌익의 영향력이 강했던 함경도 지역에서는 그와 반대였습니다. 황해도는 그 중간으로서 좌우익의 영향력이 비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흐름을 살펴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평안남도에서는 일제가 항복하자 8월 16일 수백명의 정치범이 석방되었고, 8월 17일 민족주의자들의 주도로 평남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한 이 조직에는 일제시대부터 활동하고 있던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망라돼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 명칭입니다. 서울의 여운형과는 전혀 사전 교감이 없었음에도 그 이름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이었던 것입니다.
평안북도에서는 8월 16일 민족주의자 이유필을 중심으로 신의주자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별도의 움직임을 가졌습니다. 8월 17일 2만여명이 모인 군중집회가 열렸으며 사상범과 경제범이 석방되었습니다. 이어 자치위원회가 전도로 확산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8월 26일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가 조직됐습니다. 위원장에는 임정계의 이유필이, 부위원장에는 좌익의 백용구가 뽑혔습니다.

공산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함경남도에서는 좌익이 주도했습니다. 8월 16일 정치범·경제범 200여명이 석방되자 석방된 정치범들과 이미 활동하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좌익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2, 3일만에 100여명에 가까운 활동가를 규합해 함경남도 공산주의협의회를 결성하는 한편, 대중조직 건설에 착수해 흥남화학 노동조합, 함흥지구 금속노동조합과 함흥 주변의 농촌에 농민위원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또 이것과는 별도로 중도 좌파인 도용호가 중심이 돼 함경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황해도는 처음부터 여러 단체가 분립되어 세력이 혼재되어 나타납니다. 8월 16일 해주에서 군중집회가 개최되었고, 17일에는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여러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김덕영을 위원장으로 한 공산당 황해도지구위원회, 이형택을 대장으로 한 해주보안대, 김응순을 위원장으로 한 건준황해도지부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들 조직들은 그 어느 것도 주도력을 행사하지 못한 채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됩니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자치조직들이 광범위하게 결성되고 있는 가운데 소련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하게 됩니다. 소련군의 진주로 북한 지역의 정치단체들의 세력 판도도 새롭게 정비됩니다. 소련군 점령정책의 기본은 자치조직을 지원하면서 간접적으로 북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소련군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소련군은 좌익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기존의 조직을 그대로 두었지만, 우익이 우세한 지역에서는 좌우세력이 연합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렇게 해서 좌익이 열세인 지역은 좌우세력이 비등하도록 적극 방조한 것이지요. 그리고 지역마다 난립돼 있는 조직들을 하나로 통합해 `인민위원회` 형태로 체계화시킵니다.
이를테면 조만식의 평남 건준과 현준혁의 평남 지구위원회의 합작을 종용해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하고,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각각 16명씩 동수로 배치하였습니다.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에는 현준혁이 각각 선출됩니다. 이것은 대중적 명망이나 정치적 영향에서 조만식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뒤지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함남 인민위원회(9월 1일, 좌익 중심), 평북 임시인민정치위원회(8월 31일, 좌익 우세), 황해도 인민위원회(9월 13일, 좌익 중심), 함북 인민위원회(9월 말), 강원 인민위원회(9. 15)가 조직됐고, 계속해서 시·군·면 단위의 조직 작업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평남 정치위원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좌익이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각급 인민위원회가 급속히 조직돼 가자 북한 지역의 통일적인 연결망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10월 8일에는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게 됩니다. 회의에는 치스차코프 대장, 로마넨코 소장, 이그나치에프 대좌 등 소련군 간부와 각도 대표 75명(평남 31명, 평북 15명, 황해 11명, 함남 11명, 함북 7명)이 참석했습니다.
회의에서는 각급 지방인민위원회를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통일적으로 다시 조직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도 차원의 인민위원회에는 19명의 인민위원을, 군 위원회에는 15∼17명, 동 인민위원회에는 7∼9명의 위원을 둔다. 리(동) 인민위원장은 과거의 많은 경우처럼 유지나 원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주민들에 의해 선거된다. 리에서 뽑힌 위원들이 면 인민위원회를 선출하며, 다시 면 인민위원들이 군 인민위원들 선출하고 , 군 위원들이 도 위원을 선출한다. 시 인민위원은 시 전체 주민들에 의해 실시된다."

이런 원칙에 의거하여 1945년 10월 11일에 북한에서는 면 인민위원회와 구장들의 선거가 실시됩니다. 그러나 이날의 회의는 원래 5도 행정을 통일하고 명령계통을 세울 체계적인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끝납니다. 겨우 11월 19일에 가서야 조직구성을 완료하게 되는데 이것이 5도행정국입니다.
5도행정국은 산업국(정준택), 교육국(장종식-공산당), 보안국(최용건, 조선민주당), 사법국(조송파-소련계, 후임에 최용달), 교통국(한희진, 함남 출신), 농림국(이순근), 재정국(이봉수, 돌립동맹계), 체신국(조영열), 보건국(의사, 윤기녕, 조선민주당), 상업국(한동찬, 치과의사, 무소속) 등이었습니다.(괄호 안은 국장과 소속)
5도행정국은 대체로 공산당, 독립동맹, 무소속, 조선민주당 등으로 각 세력이 망라돼 있었습니다. 좌우익 연합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소련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였습니다. 말하자면 소련은 그때까지 북한에서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지 않고 좌우연합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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