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음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율성은 지난 제109회 연재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항일 음악에서 북의 정률성, 남의 한형석”을 묶어서 논할 만한 그러한 인물이다. 원래 한형석과 정율성을 함께 묶어 지난 회에서 연재할 생각이었으나, 원고를 작성하면서 중국에서 음악을 하며 정율성의 딸 정소제(鄭小提, 1943~, 작곡)와 외손녀 정은주(鄭恩珠, 바이올린)를 가까이하였던 필자의 아내에게서 중국에서 정율성의 위상과 가족(부안과 딸, 외손녀)에 관하여 듣고 이 둘을 분리하여 탈고하였다.
사실 말하자면 정율성이 한형석보다는 여러 수가 높은 음악가였다. 정율성은 일제강점기 때 민족혁명당⁃중국공산당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해방후에는 한때 북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작곡가로 활동한 음악가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러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혁명가 정율성의 일면에 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1. 정율성의 집안 사정
음악가 정율성(鄭律成, 鄭富恩, 1914~1976, 바이올린)은 1914년 8얼 13일(음력 7월 7일)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 양림동 79번지)에서 한학자 정해업(鄭海業, 1873~1931)과 지방 명문가의 딸인 최영온(崔英溫, 1873~1964) 사이의 5남 3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다. 그의 아명(兒名)은 정부은(鄭富恩)이고, 별명은 유대진(劉大振)이다.
그의 첫째 형 정남근과 둘째 형 정인제, 셋째 형 정의은 등이 모두 독립운동에 몸을 담은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부친 정해업은 한학을 배운 지식인으로 전라도 관찰부 공방 서기직, 대한협회 광주지회 회원, 광주지역 신간회 간사, 광주 수피아여고 교직에 있었으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보낼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했다.
정율성의 큰 외삼촌은 최흥종(崔興琮, 1879~1966) 목사이다. 그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崔泳旭, 1891~1950) 박사로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낸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 YWCA 설립자 중 한 명인 김필례(金弼禮, 1891~1983)는 교육자이다.
이들은 정율성의 청소년 시절에 큰 영향을 준다. 즉 정율성의 친인척 주변은 브르주아지만, 그의 부친과 형제는 민족정신이 투철하였고,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혁명가의 길을 동시에 걸었다. 정율성의 부친과 형제들의 독립운동도 모두 검토해야 한다. 부친과 형제들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보아 정율성의 항일도 독립운동가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
2. 정율성의 교육 상황
정율성은 1917년(4세) 화순군 능주로 이주, 1922년(8세)에 능주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광주로 다시 이주한다. 그는 1928(14세)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929년 3월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닌다.
정율성은 큰 외삼촌인 최흥종 목사의 집에서 축음기를 통해 음악을 듣고 피아노를 치며 놀았고, 그가 활동하던 광주YMCA, 양림교회, 양림동 선교사촌을 통해 서양음악을 접할 기회를 얻게 된다.
정율성의 작은 외삼촌은 최영욱 박사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캐나다에서 수학한 후 광주 제중원 원장을 지냈으며 미군정 하에서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지낸다. 최영욱 박사의 아내이자 한국 YWCA의 김필례는 수피아여학교 교사로 일하며 교회를 빌려 때때로 음악회를 여는 등 정율성은 외가의 영향으로 음악에 친숙한 환경 속에서 자란다.
1933년(17세) 봄 셋째 형 정의은(1912~1980, 조선공산당 당원)이 중국 난징에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2기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 광주에 방문하자, 그는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셋째 형을 따라서 누나 정봉은(1908~1977)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가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제2기(1933.9∼1934.4.)로 졸업한다.
그 뒤 민족혁명당 당무를 보는 한편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음악 공부를 한다. 1936년(20세) 5월에 남경에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에 가담하여 활동하는 한편, 상해에서 김성숙(金星淑, 1898~1969)·박건웅(朴健雄, 1906~?) 등이 건립한 조선민족해방동맹에도 가담한다. 중일전쟁 발발 후 남경을 떠나 1937년(21세) 10월 중국공산당의 본부가 있는 연안(延安)에 도착한다. 연안에서 섬북공학(陝北公學)에 다니고, 1938년(22세) 5월부터는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한다.
3. 음악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그 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서 활동했으며, 1939년(23세) 1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해 12월부터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 배치되어 음악을 가르쳤다. 연안에 있을 때, 「연안송(延安頌)」과 「팔로군군가(八路軍軍歌)」를 작곡한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앞서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정설송(丁雪松, 1918~2011, 중국인)을 만나 1941년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결혼한다.
정율성은 연안에서 혁명 음악을 작곡하는 한편 1941년(25세) 7월부터 화북조선청년연합회 섬감녕분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陝甘寧分會)에, 이듬해 12월부터 태행산(太行山)의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는데, 그는 당시 의열단(義烈團)에 들어가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항일 정탐 활동을 하게 된다. 정율성은 1944년(28세) 4월 다시 연안으로 돌아온 뒤 해방을 맞이한다.
4. 광복후 북과 중국에서의 음악 활동가로
정율성은 해방 후 북으로 귀국, 해주에서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한다. 이때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음악 인재를 양성하였다. 1947년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구락부의 부장을 지냈고, 인민군협주단을 창단하여 단장이 된다. 그가 북에서 작곡한 노래로는 「3.1 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두만강」 등이 있다.
당시(1948년) 남의 한형석은 귀국한 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보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당시 북에 있던 정율성도 그러한 심경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격화하던 1950년 9월 정율성은 중국으로 갔다가, 중국 국적을 취득한다. 12월에 북으로 돌아와 전선 위문 활동을 한다. 그러나 곧이어 1951년 4월에 중국으로 귀환한다.
정율성은 1.4 후퇴시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장교로서 서울에 주둔한다. 그는 서울의 관공서 등 주요 시설에서 1.4 후퇴시 버리고 간 ‘조선궁정악보’들을 발견하여 이를 수습하여 가져 간다. 그가 서울에서 가져 간 궁중악보는 북측에 인계하지 않고, 중국으로 반출한다. 그리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그의 아내 정설송이 한국 정부에 반환한다.
이 궁중악보에 관하여 정율성이 약탈해 갔다느니 하는 부정적인 말을 하는 이가 있으나, 정율성은 중국으로 귀환할 때(1951년 4월) 그 악보를 전쟁터에 버려둘 수 없었던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이 휴전된 후 그는 중국에 남아서 모택동과 주은래 정부의 공산주의 혁명음악 분야에서 계속 활동하지만,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수색으로 인해 많은 악보와 작품들을 잃어버렸다. 남의 한형석과는 달리 중국의 정율성이 남긴 유필(遺筆)은 매우 희소하여 시중에 전혀 나오지를 않는다. 중국으로 귀환한 정율성은 1976년 12월 7일 북경에서 사망할 때까지 400여 곡의 작품을 남긴다.
5. 맺음말
정율성은 1976년 12월 7일에 중국 베이징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이 안배한 팔보산혁명공묘(八寶山革命公墓, 北京市石景山区石景山路9号)에 묻혔다. 그의 아내 정설송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중공 외사판공실 비서장을 거쳐 1979년과 1982년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역임한다.
정율성은 군가와 어린이 노래, 합창곡에서 뮤지컬 드라마, 서정적인 노래에서 영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400여 곡의 작품을 작곡한다. 평화를 향한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抗日) 혁명과 운명을 공유하며 군가를 작곡하고, 민족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는 2009년에는 “새로운 중국 건국에 탁월한 공헌을 한 100명의 영웅과 모범적인 인물”로 선정되었다. 2014년 7월 4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서울대학교에서 “한-중협력의 미래를 공동으로 창조하고 아시아의 번영을 축하하며 번영하자”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면서 양국 국민의 깊은 우정을 돌아보면서 특히 한국에서 태어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의 작곡가 정율성을 언급했다.
정율성은 중국에서는 인민음악가이다. 음악가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념의 잣대로 그를 저평가 받도록 제한하여 놓고 있다. 근시안적 평가이다. 부산의 한형석, 광주의 정율성을 함께 평가하자.


광주사람들은 원하지 않아요.
빨갱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