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2025년(을사년)은 백암 박은식이 순국한 지 일백주기년(一百周忌年)이다. 그리고 통분의 을사늑약 120주년이자, 환희의 광복 80주년이다. 심지어 일본으로 쫓겨 가면서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던 일본이 한일국교정상화로 과거사 사과 없이 20년 만에 돌아온 지도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나 지난 3년여간 윤석열 정권에 의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특별히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올해 2월 중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친일 정권을 탄핵 파면하여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필자는, 2025년은 식민역사와 식민문화의 잔재를 타파하는 첫 해가 되어야한다. 진정한 역사광복을 위하여 백암 박은식의 일생과 20세기 전반기의 민족사학에 관하여 살펴보자.
1. 일제하 민족운동의 전체를 본다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역사관은 우리 민족사관의 효시이다. 그들의 영향을 호암 문일평, 산운 장도빈, 애류 권덕규, 민세 안재홍, 위당 정인보 등이 받았다.
이들 민족사학자의 역사 정신은 일제하에서의 조선어학회 학자들, 즉 한힌샘 주시경, 열운 장지영, 한결 김윤경, 외솔 최현배, 일석 이희승 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하자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사관의 형성 발전’과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은 우리 민족운동의 두 축이자, 핵심이었다. 그들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독립운동의 한길로 나갔다. ‘민족사관의 형성 발전’과 ‘조선어사전’ 편찬에 공감한 많은 지식인이나 문학가들은 그 두 축을 연결하고 지지하는 구동축(驅動軸, drive shaft)의 역할을 하였다.
2. 민족의식에 눈 뜬 유학자 백암 박은식
백암 박은식은 민족주체의 개혁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황해도 황주군 주남방에서 1859년(기미년) 9월 30일(음, 양력 10월 25일)에 농촌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성칠(聖七)이며, 호는 겸곡(謙谷)과 백암(白巖)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할 때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하였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백암은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으나, 과거 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성균진사 안태훈(安泰勳, 1862~1905 : 안중근의 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兩) 신동이라는 평을 듣는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丁若鏞)의 제자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며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된다.
1882년에 상경해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귀향한다. 이후 태천(泰川)의 학자 박문일(朴文一, 1822~1894)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다시 연구한다. 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고, 그 후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관직 생활을 한 전부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개혁사상으로 전환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한다. 그러고는 11월에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한다.
곧이어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하자, 그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며, 교육 진흥책을 논구(論究)하는 『겸곡문고(謙谷文稿)』와 『학규신론(學規新論)』(1904, 박문사)를 저술한다.
그리고 1902년에는 비밀결사 개혁당(改革黨)에 가입하며 완전한 항일 독립운동가 성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당시의 개혁당은 민영환 이준 이상재 이상설 이용익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3. 언론인으로 거듭난 백암 박은식과 계몽운동
1898년 9월 남궁억(南宮檍) 유근(柳瑾) 나수연(羅壽淵) 등이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한 후에 그는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주필(主筆)을 맡는다. 1904년 7월에는 양기탁(梁起鐸)과 베델(Bethell, E. T., 裵說) 등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맡는다. 그리고 이 시기(1904년 8월)에 조직된 대한국민교육회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한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일제를 비판하고,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을 정간시켰다. <황성신문>은 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백암은 <황성신문>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주필로 활동한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에는 주로 객원으로 논설을 기고한다.
백암 박은식은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을 비롯해 다수의 신문과 잡지에 많은 논설을 썼다. 이로써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 실업 구국사상, 사회관습 개혁사상, 애국사상, 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대한제국 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1906년 이후 광범위한 부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며, 그는 이 시기부터 완전히 변법적 개화사상가가 된다. 위정척사사상과 유림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권 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계몽한다.
1906년 3월 창립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을 발표한다. 1906년 10월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조직하고, 서우학회의 기관지인 <서우(西友)>의 주필을 맡아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진력한다. 백암 박은식은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낸 <서우(西友)>를 모두 직접 편집하고 지도한다.
1907년 4월에 양기탁(梁起鐸) 안창호(安昌浩) 전덕기(全德基) 이준(李儁)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회영(李會榮) 이갑(李甲) 유동열(柳東說)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백암은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한다.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해 1908년 1월 서북학회(西北學會)가 창립한다. 백암 박은식은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로 적극 활동한다.
또한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한다. 처음에는 이종호(李鍾浩)를 교장으로 추천했으나,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 기지의 창설을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하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한다. 이어 서북학회 담당 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支校)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63개 지교를 설립한다.
이 무렵 일제는 신기선(申箕善) 등의 대동학회(大東學會)를 내세워 유교계를 친일화 하려는 정치공작을 전개하자, 이에 대항하여 장지연 이범규(李範圭) 원영의(元泳儀)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한다. 박은식은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근거해 유교를 개혁해서 유교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서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유교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이다. 당시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의 특징은 “애국계몽운동을 의병운동과 연계지을 것을 강조했다”라는 점이다. 백암은 이것을 “일제의 검열하에서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무장운동(의병운동)과 연계해 함께 나란히 전진한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상과 활동으로 인하여 박은식은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에 활동한 사상가 중에서 “전 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강제점령한 직후 <황성신문> <서북학회월보>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한다. 또한 박은식이 저술한 거의 모든 저서와 당시까지 발행한 대한제국의 모든 역사 교과서를 ‘금서(禁書)’로 묶는다. 그런데 당시의 역사 교과서는 우리 민족사학의 변천을 살펴보는 데 매우 중요하다.
[표 1] 대한제국의 중요 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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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 인물 |
저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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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01.10 |
전봉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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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봉기 - 동학농민혁명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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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
대조선국 학부 |
조선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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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대한제국 학부 |
동국역대사력 |
2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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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김택영 |
동사집략 |
2책, 학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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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8 |
김교헌 등 33인 |
증보문헌비고 |
개화기까지의 조선 역사와 문화를 결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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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 |
최경환 정교 편 |
대동역사 |
2책, 학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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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06.10 |
현채 |
동국사략 |
2책, 재판(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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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 |
오성근 |
대한약ᄉᆞ(상) |
1책, 상권만 편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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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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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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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교(대종교) 중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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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04,05 |
유근 |
신찬 초등역사 |
3책, 광덕서관. |
4. 해외 망명후 백암 박은식의 민족역사운동
백암 박은식은 일제의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민족의 우리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를 매우 우려한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復活)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탄식한다.
백암은 마침내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한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서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동지 윤세복(尹世復, 1881~1960)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윤세복의 영향으로 대종교 신도가 된다. 그리고 민족사관에 의한 역사 저술에 집중한다.
백암이 당시 저술한 책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등이다.
이후 1912년에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 1879~1922)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한다. (이후 박은식은 1914년에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어 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된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탕사오이(唐紹儀) 징메이주(景梅九)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는다. <향강』> 통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해로 돌아온다.)
백암 박은식은 상해에서 『안중근전(安重根傳)』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완성해 상해의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에 초판을 간행한다.
『한국통사』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 측면에서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①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②대내적으로 국민에게 ‘통(痛)’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③‘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④자손만대에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반성을 촉구한다.
『한국통사』는 간행 직후 중국 노령 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朝鮮半島史編纂委員會: 1925년에 朝鮮史編修會로 개칭)를 설치한다. 처음에는 『조선반도사』를 준비하였으나 계획을 수정해 『조선사(朝鮮史)』 전 35책 편찬으로 확대하여 식민사관에 의한 우리 역사 왜곡을 시도한다. 일제는 『조선사』의 편찬 동기를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같은 독립을 추구하는 역사서의 해독을 소멸시키는데 있다’라고 밝혔다. 여기서도 당시에 『한국통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 수 있다.
백암 박은식은 상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한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아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으나, 이 신문이 얼마 뒤 정간되자 사임한다.) 백암 박은식은 상해에서 이상설(李相卨) 신규식 유동열 등 동지들과 함께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해 그 취지서를 쓰고 감독으로 선임된다. 이어 다시 상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된다.
1918년 노령 한국인 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으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역사를 강연해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백암이 이준전을 저술한 데는 이준이 간여하였던 독립협회와 개혁당(改革黨), 대한국민교육회 등을 함께 한 독립운동의 동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9년 대종교 신도들이 주도한 무오(戊午)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린다.
5. 상해임시정부에서의 활동과 순국
백암 박은식은 1919년 3·1운동을 노령 해삼위(海蔘威, 블라디보스톡)에서 맞이한다. 이때가 6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동지들과 함께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한다. 당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우규(姜宇奎, 1859~1920)를 국내에 파견해 9월 2일 조선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켰다.
1919년 8월에는 상해로 가서 ‘상해임시정부’와 노령의 ‘국민의회임시정부’와 서울의 ‘한성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때에도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뒤에서 지원한다.
동시에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투쟁까지의 한국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해 한국근대사 체계에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역작이다.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한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국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밝힌다.
1923년에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의 간행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에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한다.
뒤이어 ‘임시정부 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로 추대하였고, 박은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이를 수락한다.
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결단을 내려 수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교란해 온 위임통치청원과 기타 실정의 책임을 물어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일단락한다. 뒤이어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24일 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한다.
백암 박은식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였는데, 그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신헌법에 따라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총재였던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천하였고, 이상룡이 선출(1925년 7월 7일)되자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한다.
백암 박은식이 대통령을 사임하고 은퇴했을 때, 이미 인후염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박은식은 임종이 가까워져 오자 동포들에게 독립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기고, 1925년 11월 1일 67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친다.
6. 대한제국시기의 집단지성과 백암 박은식, 그리고 단재 신채호
대한제국시 애국운동에 관한 집단지성이 모이는 과정에는, 1903년부터 1908년 사이에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홍문관 안에 찬집소(纂輯所)를 두고 박용대(朴容大) 조정구(趙鼎九) 김교헌(金敎獻) 김택영(金澤榮) 장지연(張志淵) 등 33인이 찬집을, 박제순(朴齊純) 등 17인이 교정을, 한창수(韓昌洙) 등 9인이 감인(監印)을, 김영한(金榮漢) 등 3인이 인쇄를 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250권50책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집대성됨으로써, 대한제국시기의 자주적이고 자각적인 지성인들은 곧바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는 관점을 민족주체적인 것으로 승화시키는 집단지성을 끌어낸다.
이준(李儁, 1859~1907)은 헤이그로 떠나기 직전에 『국혼의 부활론』을 탈고하여 후처 이일정(李一貞)에게 준다. 이 원고는 이준이 쓴 것이지만, 1904년 8월 이준 이원긍 전덕기 유성준 박정동 최병헌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설립한 교육 계몽운동단체 ‘대한국민교육회’의 목적과 당위성을 논한 글로 평가할 수 있다.
‘대한국민교육회’는 교육구국운동을 목적으로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에 힘을 기울였고, 일제의 식민교육정책, 을사늑약, 고종의 강제퇴위 등에 반대했다. 1900년 이후 ‘대한국민교육회’와 직-간접으로 연결된 여러 사람이 여러 종의 역사 교과서를 편찬한다. 이를 보면 이준이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는 것은 당대의 집단지성이 모인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대한국민교육회 회장 이준은 나철과 박은식 신채호와도 가까웠다. 이준은 한때 대한제국 말의 거유(巨儒)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문하에 있었고, 나철은 김윤식의 대표적인 제자로 자처한 바 있다. 이렇게 형성된 집단지성이 곧바로 나철의 단군교(대종교) 중광,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민족사관으로 꽃 피운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준의 『국혼의 부활론』은 이준 한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당대 계몽주의자들의 집단지성을 결집한 글이다.
그런데 민족사관을 견인한 국혼의 부활을 갈구하는 집단지성은 언제 나왔을까? 1906년에 대한국민교육회가 편찬한 『보통교과 대동역사략』을 검토하여 보면, 놀랍게도 이 책은 당시의 다른 교과서와는 달리 기자조선과 한사군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혼 부활을 꿈꾸는 민족사관에 관한 의지는 1905년에 대한국민교육회에서 형성 및 결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국민교육회는 국민의 교육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므로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7. 백암 박은식의 민족사학 동지들
백암 박은식은 단재 신채호와 더불어 한국 근대의 민족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현대의 우리나라 근대 사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읽지 않고는 역사 연구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백암은 『동명성왕실기』나 『발해태조건국지』 같은 고대사 저술도 남겼다. 특히 항일전쟁의 민족영웅 안중근(安重根, 1879~1910)에 관한 역사적 조명도 박은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국혼(國魂)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國魄)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또한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우리 민족사학의 출발점은 해외에 망명하여 활동한 ①백암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②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 주로 조선 안에 있으면서 활동하던 ③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1888~1939)과 ④산운(山耘)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조선어학자이기도 한 ⑤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1890~1950), ⑥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 1891~1965)과 ⑦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1892~1950) 등등은 백암과 단재의 민족사학을 계승한 사학자이다. 이들 국내 거주의 민족사학자 가운데 장도빈과 권덕규는 각기 ‘고려관(高麗館)’과 ‘상문관(尙文館)’의 이름으로 자비 출판하여 자신의 민족사학을 소개하였다.
이들 민족사학자의 역사정신은 일제하의 대표적인 조선어학자 ①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 ②열운(洌雲) 장지영(張志暎, 1887~1976), ③한결 김윤경(金允經, 1894~1969), ④외솔 최현배(崔鉉培, 1894~1970), ⑤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 1896~1989) 등등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민족사관의 형성 발전과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은 일제하 우리 민족문화 정신운동의 핵심이었다. 이 둘은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양대 축으로, 실제로는 구동축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독립운동의 한길로 나갔다. 민족사관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조선어학회 활동에 공감한 당대의 수많은 지식인과 문학가들은 이 두 축을 연결하고 지지하는 구동축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일제 식민지시대에 우리 민족의 정체성은 이렇게 자주적 문화운동을 바탕으로 하여 이어져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자주적 문화운동과 무장투쟁의 독립운동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단재 신채호는 사학자이기도 하였지만 열혈 독립운동가로서 의혈단의 『조선혁명선언』(1923.01)을 썼다.
표(2)-1은 을사늑약이 있던 1905년 집단지성으로 민족 역사관이 필요함을 자각한 이후 20년간의 민족역사 및 문화운동을 정리한 표이다.
이 시기의 압권은 단재 신채호가 1908년 8월 27일부터 9월 15일까지, 그리고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50회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던 논설 『독사신론(讀史新論)』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논설에서 기자(箕子)와 위만(衛滿)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와 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주로 대종교의 민족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가 민족사관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조선어에서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 김두봉(金枓奉, 1889~?)이 조선어 말본 연구를 상당히 진척시킨 시기이다.
그리고 192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조선사 35권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단재 신채호가 해외에서 간고한 역사투쟁을 하던 시기이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산운 장도빈과 애류 권덕규 등이 자신의 역사서를 자비(自費) 출판을 하여 보급하면서까지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와 강하게 대립하며 역사운동을 하던 시기이다.
우리의 민족사학자들은 일제 강점시기를 무력하게 보낸 것이 아니다. 생명과 재산을 바쳐 항거하였다. 제 정신을 가진 민족주의자라면 이를 어떻게 폄훼한다는 말인가?
[표 2-1] 민족사관 등 민족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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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 인물 |
저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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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경 |
대한국민교육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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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의 필요성이 대두(擡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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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
대한국민교육회 |
보통교과 대동역사 |
2책, 대한국민교육회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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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04 |
이준 |
국혼의 부활론 |
당시의 집단지성을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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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05 |
신채호 |
을지문덕전(국한문본) |
1책, 광학서포 발행, 한글본은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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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01.15 |
나철 등 |
단군교 포명서 발표 |
단군교(대종교) 중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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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 |
주시경 |
국어문법 |
1책, 박문서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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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04~1912 |
박은식 |
동명성왕실기 |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한 후 만족사학서 저술에 몰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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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4.07 |
김교헌(발행인) |
삼일신고 |
여순 감옥에서 순국 (뇌일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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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03.20 |
김교헌 |
신단실기 |
1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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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06 |
박은식 |
한국통사 |
1책, 상해 유신사에서 초판본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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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09.12 |
나철(나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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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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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 |
조선총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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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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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1.15 |
장도빈 |
조선연표 |
1책, 장도빈 발행, 신문관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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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경 |
이원태 |
배달족강역형세고 |
1책, 김교헌 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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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02 |
김교헌 등 39인 |
대한독립선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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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06.07 |
홍범도 최진동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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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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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
이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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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하여 상해에서 경성으로 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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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신채호 |
조선상고사 |
집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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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05 |
이광수 |
민족개조론 |
월간 개벽 1922년 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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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01 |
신채호 |
조선혁명선언 |
의열단 선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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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09.10 |
권덕규 |
조선유기 |
1책, 재판(1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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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
조선총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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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 조선사편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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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02.12 |
장도빈 |
개소문(연개소문) |
1책, 고려관 발행 |
표(2)-2는 1925년 이후 20년간의 민족역사 및 문화운동을 정리한 표이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라는 당대의 천재는 한때 민족사학을 추구하다가 일제의 회유에 변절하였고, 무능거사(無能居士) 이능화(李能和, 1869~1943)도 친일 빈민족행위자가 되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표(2)-2. 민족사관 등 민족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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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주요 인물 |
저서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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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
한용운 |
시집 님의 침묵 |
1책, 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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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07.30 |
최남선 |
아시조선 |
식민사관으로 변절 이전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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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 |
장도빈 |
조선역사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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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05 |
신채호 |
조선사연구초 |
10년형을 받고 려순감옥에 수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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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06 |
신채호 |
조선사연구초 |
조선사연구초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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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06 |
신채호 |
조선상고사 |
조선일보 103회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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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8.3 |
조선사편수회 |
조선사 |
35권, 조선총독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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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07~11 |
현진건 |
단군성적순례 |
동아일보 51회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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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
백남운 |
조선사회경제서(일문) |
1책, 동경의 가이조사(改造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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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03 |
이시영 |
감시만어 |
1책, 상해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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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11.09 |
신태윤 |
도해 삼일신고 |
1책, 곡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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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02.21 |
신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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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감옥에서 순국 (뇌일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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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06.07~08.10 |
수양동우회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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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구속 석방후 1938년 3월 순국. 대다수 친일로 변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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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01 |
김윤경 |
조선문자급어학사 |
1책, 조선기념도서출판관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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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04.03 |
문일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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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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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
최현배 |
한글갈 |
1책, 정음사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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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02.11 |
조선총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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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간의 창씨개명 기간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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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
김산 (장지락) |
SONG OF ARIRANG |
1책, 님 웨일즈 공저, 미국에서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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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0~ |
조선어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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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탄압 시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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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 |
최남선 |
고사통 |
1책, 삼중당서점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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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08.15 |
광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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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03.15 |
박은식 |
한국통사 |
1책, 달성인쇄주식회사 재판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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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07.20 |
정인보 |
조선사연구 (하) |
1책, 서울신문사 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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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2.23 |
현진건 |
단군성적순례 |
1책, 예문각 발행., |
국내-외의 민족운동 세력과 친일파 세력의 대결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1933년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경제사학자 백남운(白南雲, 1895~?)과 사학자 문석준(文錫俊, 1894~1944)이 출현한다. 그런데 조선어학회 탄압사건이 가시화된 1943년초부터는 민족사학 및 민족문화 운동이 거의 전멸한다. 밤이 너무 깊어 간 것다.
이러한 일제강점기 후반기의 인물로 특히 잊을 수 없는 분이 있다. 민족사학자이자 한글학자 애류 권덕규이다. 애류 권덕규도 조선어학회의 회원으로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위원으로 활약했고, ‘조선어대사전’의 편찬위원을 맡았기에 일제의 탄압은 불가피했다. 1942년 일제의 조선어학회 탄압 사건 때, 일제 형사들이 그를 두 번이나 서울역까지 끌고 갔다가 지병이 있는 것으로 판단해 되돌려 보냈다. 그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5일 흑석동 자택에서 외출한 후에 돌연 행방불명 되었고, 당시 여러 언론에서는 그의 실종 소식을 보도하였다.
해방후 첫 번째 저술되어 출간된 책은 1945년 8월 20일자로 발행한 (정)벽해의 『조선역사』이다. 당시에는 한글 활자가 없어 등사기로 찍어내어 발행하였다. 이듬해부터 일제강점시대에 간행되었던 박은식과 신채호의 저서가 재출판되거나, 정인보나 안재홍의 미발표하였던 연구서들이 출간된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사관을 몰아내고 우리 민족의 참 역사관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도가 컷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80년이 되는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또 하나의 교묘한 신 식민사관이 이 땅을 휩쓸었을까?
8. 맺음말 ; 진정한 역사 광복을 위하여 식민지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온전하게 청산하자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박은식 신채호에 의한 민족사관의 형성 및 발전과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은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양대 문화운동의 핵심 축이다.”
국내-외에서의 이 항일투쟁도 무장투쟁 못지않게 치열하였고, 적지않은 희생자를 내었다. 일제(日帝)는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1925년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식민사관을 집대성한 『조선사』 35책을 1938년 3월에 완간하여 퍼트렸다. 2년후인 1940년 2월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씨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하여 6개월 안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또한 조선어를 말살하기 위하여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하였다.
과거 일제는 단군을 기록한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래된 사료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여러 사료(史料),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민족사관과 조선어학회의 연구성과를 한꺼번에 파괴하려 했다. 지금도 일본의 극우파들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있다. 아주 기가 막힌 일이다.
이제 백암 박은식 순국 백주기와 광복 80주년을 맞아, 일본의 식민사관과 서구의 신 식민사관, 그리고 근래의 황당사관을 몰아내고, 박은식과 신채호의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광복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주(註)
주1) 이 경험은 그가 1904년 8월에 이준, 이원긍, 전덕기, 유성준, 박정동, 최병헌 등이 국민교육 실시를 목적으로 설립한 교육 계몽 운동 단체 ‘대한국민교육회’에 참여하는 기반이 된다.
주2) 백암 박은식과 단재 신채호의 동지적 관계는 1907년에 신채호가 박은식의 도움으로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는 데 있다.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하던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을 개시하고 『이태리 건국 삼걸전』과 같은 전기를 다수 출판한다. 특히 신채호가 민족주의사관에 입각하여 서술한 최초의 한국고대사로 평가받는 『독사신론(讀史新論)』(1908)을 여기에 발표한다.
주3) 『한국통사(한문본)』, 1915년 상해에서 초판본 출판, 1946년 3월 15일 대구의 달성인쇄주식회사에서 재판본 발행.
주4) 『한국독립운동지혈사(한문본)』, 1920년 6월 상해 유신사에서 초판 출판. 1946년 4월 15일 서울신문사 재판 발행.
주5)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을 부정하는 것은 1906년 대한국민교육회가 편찬 간행한 『보통교과 대동역사략』과 같은 관점이다.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우리 민족은 ‘부여족 선비족 지나족 말갈족 여진족 토족 등 여섯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함으로써 우리 민족사의 주류가 되었다’라고 보았다.
주6) 참조 ; https://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06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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