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가 벌써 100여년 전의 일인지라 매해 서거 100주기가 된 독립운동가들도 많아져 그들의 발자취를 돌아보게 본다.

“한국민족주의역사학의 태두(泰斗)요 종장(宗匠)”인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김교현의 생애와 역사인식』이 100주기인 지난해를 넘기고서야 나왔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이 ‘무원 김교헌 서거 100주기를 추모하다’는 부제를 달아 도서출판 선인에서 출간한 것.

김교헌은 경주김씨 명문가 장손으로 18세인 1885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 길에 올라 1910년 종2품 가선대부까지 지낸 전통 관료 출신이다. 그의 7대조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사가(私家)는 99간을 넘을 수 없다는 법에도 불구하고 왕의 각별한 은총으로 하사받은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3백 40간에 이르는 대저택, 전동가(磚洞家)가 그의 집이었다.

김동환, 『김교현의 생애와 역사인식』, 선인, 2024. [자료 사진 - 통일뉴스]
김동환, 『김교현의 생애와 역사인식』, 선인, 2024. [자료 사진 - 통일뉴스]

전형적인 중화사관(中華史觀)을 배우고 익혔고, “벼슬 말기 『문헌비고』 속찬위원으로의 참여(1904)와 『국조보감』 찬입위원 및 감인위원으로 발탁(1908, 1909)은 성리학적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최고조를 의미했음을 보여준다”는 저자의 평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45쪽)

여기까지가 김교헌 일생의 1막이었다면 2막은 극적 반전이 이루어진다. “나철을 종교적 스승으로 확신한 김교헌은 1910년 음 1월 15일에 대종교에 정식으로 입교한다”, 이후 홍암 나철이 1916년 폐기절식(閉氣切息)으로 자결하자 그해 음력 9월 1일 대종교의 2대 교주, 도사교로 취임한다.(61쪽) 대종교는 단군을 민족 구심점으로 삼는 민족종교로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선다.

“제2세 교주로 취임한 김교헌은 1917년 봄 만주 화룡현으로 활동의 거점을 옮겼다”, 대종교가 주도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첫 번째 서명자가 김교헌이고, 여기서 선포한 ‘무장혈전주의’는 역시 대종교가 주도한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의 1920년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졌다. 대종교 도사교 김교헌과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지도하에 김좌진 등이 쌓은 금자탑이다.(61~69쪽)

항일투쟁 과정에서 김교헌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민족주의적 국사(國史)의 정립에 있었다. “김교헌은 그의 저술인 『단조사고』·『신단민사』·『신단실기』·『배달족역사』에서 대종교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神敎史觀)을 정립한다”.(76쪽)

이 책은 다른 평전류와 달리 김교헌의 생애 만을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그의 ‘역사인식’을 소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교헌의 위 주요저술 4책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그의 역사인식을 ‘신교사관’, ‘남북조사관(南北朝史觀), 부여정통론(扶餘正統論)으로 정리, 소개하고 있다. 나아가 부록으로 『단조사고』 번역문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단조사고』는 “수많은 사서들의 단군 관련 기록을 통하여 단군에 대한 자취의 시종(始終)과 문화적 흔적을 망라한 것”이고, 『신단실기』는 “단군을 종조로 내세워 민족종교의 교리와 단군역사를 체계화시킨 것”이며, 『신단민사』는 “단군에서 갑오경장에 이르는 통사 체계의 구성에 목적을 두고 교과서용으로 편찬된 저술”이고, 『배달족역사』는 『신단민사』를 요약 정리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소학생용 교과서로 편찬한 것이다.

’신교사관‘에 대해서는 “일제는 조선 식민지배의 완성을 신도의 국교화로 이루려하였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총체적 저항의 중심에 선 집단이 우리 전래의 신교(대종교)였다”며(113쪽) 김교헌의 저술들이 ‘단군’과 우리 전통 신앙인 ‘신교(神敎)’에 근거해 있음을 상세히 논술하고 있다.

‘남북조사관’은 “족통개념(族統槪念)을 통한 대종교의 역사인식”으로 “남북강역의 세력과 집단을 단군 후예들의 역사 활동으로 간주하는 역사관”이다.(133쪽) “역사상 통일시대는 신시시대(환족시대)·배달조선(단군조선)시대 뿐이며, 소위 삼국시대는 열국시대로, 통일신라시대는 남북조시대로, 그리고 고려와 조선도 각각 남북조시대로 취급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도 만주에는 배달족 국가인 발해·요·금·청이 계속 건설되었던 까닭이다”,(138쪽) “고려와 조선시대도 여요시대(麗遼時代)·여금시대(麗金時代)·조청시대(朝淸時代)로 서술”하는 이른바 ‘대륙사관’의 출발인 셈이다.

‘부여정통론’은 당시 주류를 이룬 유교 세력의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과 대척점에 서 있다. 단군은 ‘형식적·혈연적 시조로 치부’되고 기자조선이 삼한(특히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삼한정통론과 달리 기자는 반배달족(半倍達族)으로 ‘주변인 취급’하고 민족정통성이 ‘단군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는 논지다. 저자는 김교헌의 저술은 물론 「배달족원류단군혈통」 등을 인용, 부여정통론을 풍부하고 세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음수사원(飮水思源), 100년 전의 항일독립운동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강역과 문화의 토대가 되었음을 돌아볼 때 일제의 총칼 밑에서 무원 김교헌이 목숨바쳐 일군 “대종교 정신을 통한 민족주의역사학”의 소중함은 각별하다.

“우리 민족사의 정통을 체계적으로 세워 종래의 사대주의사상을 불식하고 민족주체사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의 학문은 후에 박은식.신채호의 민족사학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최남선 역시 김교헌을 스승으로 섬기며 가르침을 받았고”(156쪽), 그의 죽음에 “대종교의 애도함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정한 애국자요 의(倚)를 구하기 어려운 국학자를 잃은 것에 대하여는 전민족적 손실로 애도의 의(意)를 표할 것이다. 진실로 선생은 추도할 만한 ‘참된 조선 사람’이었었다”(동아일보 2024.1.24.)(161쪽)는 애도가 나온 것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무원 김교헌의 100주기를 기려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한 것은 김동환의 이 책이 그나마 유일무이할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를 문화사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단서를 열었으면서도, 사회사 내지는 정치사의 측면에서 발전적인 성격을 해명하지 못한 것은 김교헌 사학의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작자의 사회과학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160쪽)는 애사롭지 않은 지적도 그래서 설득력있게 들린다.

“단군성조께서 남긴 일은 여러 학자의 책에 번갈아 가며 나오는 것이 적지않다. 그러나 모두 훼손되고 완전하지 못하여 올바른 역사가 없으니 한탄스럽도다. 이에 널리 고증하고 요약하여 채록하였는데...”(278쪽) 부록으로 실린 깨알같은 『단조사고』 번역본은 덤이다. 고문헌들을 전거로 늘어놓은 옛글 읽기란 쉽지 않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래 생존의 버팀목이 무엇인가”를 느껴볼 수 있다면 일독을 권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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