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던 세상이
다시 뒤집어지는 반전이 계묘년 끄트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갑진년 봄에 결실을 맺는 위대한 반전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새아침이 오는 것을 거부하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이들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찬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갑진년 한 해는
그야말로 값진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갑진년에는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고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 1.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3.1혁명이 105주년이 되었다. 신돌석씨는 100주년이었던 2019년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곧 수구세력은 몰락하고, 제대로 된 사회로 가는 길이 열리는 줄 알았다. 당시는 촛불 정부라고 자임하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였다. 정부에서도 3.1운동 100주년 기념위원회를 만들어서 정부 행사도 크게 진행하고, 광화문에 탑도 세운다고 하였었다. 희망에 들떴지만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서 있기를 기대한 탑이 임시적인 홍보탑에 지나지 않아서 실망한 기억이 있다.

그날 풍물팀들이 일찍부터 광화문 네거리 각 방면에서 행진해 왔다. 그리고 네거리 한복판에서 한판 신나게 놀았다. 하지만 광장을 민주진보진영이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 조직화된 수구세력들이 훨씬 더 많이 광장을 점령하였다. 신돌석씨 일행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어대는 수구세력들에 갇히는 꼴이 되었다. 그들이 행진을 하면서 마구 위협적인 언사를 하는데 정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때 그들의 무대가 바로 옆에 있어서 연설하는 내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연사는 신돌석씨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고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문재인 당시 대통령이 좌익이란 걸 확실히 증명할 수 있단다. 신영복 교수가 자기 선배인데, 그는 북한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문재인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했으니 그가 바로 좌익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열변을 토하였다.

신돌석씨는 뭐 저런 인간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말의 내용도 문제이지만 자기가 옛날에 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선배를 그런 식으로 간첩으로 몰다니 정말 인간말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신돌석씨가 처음 노동운동을 할 때 그가 지역에 와서 노동자들이 삼민헌법쟁취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고 무리한 요구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것 때문에 몇 명 되지도 않는 해고노동자 중에서 차출된 적이 있었다.

그때 신돌석씨와 함께 뽑혔던 최윤호라는 친구는 고문 후유증으로 몇 차례 병원을 드나들더니 시골로 내려갔다. 그 뒤로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짓을 수도 없이 했을 텐데 자기는 변신해서 수구정당의 국회의원도 하고, 도지사도 하더니 저런 식으로 수구 집회에서 옛 동지들을 팔아서 연명하고 있다. 그의 연설을 들으면서 울분이 치솟았던 기억이 있다.

그 뒤 5년이 지났다. 이제 ‘100년도 더 지난 일을 무릎 꿇고 사죄하라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일본의 과거를 덮어주려는 자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는 3.1절을 두 번 맞이했다. 작년 3.1절 직전에는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도 무시하고 ‘제3자 변제’라는 엉뚱한 해법을 내놓아서 공분을 샀었다. 하는 짓마다 친일행각이었다. 그리고 임명하는 핵심 관료들마다 친일파들이다. 이명박 정권 때 친일행각을 벌이던 뉴라이트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

물론 윤석열 자신도 그 아버지가 일본 유학생 1호라고 한다. 아버지 따라 일본에 가서 지낸 적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친일적이다. 그런 자가 대통령이 되다 보니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도 묵인하고, 세금을 들여서 일본의 만행을 옹호해주는 홍보를 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 어민과 시민들의 반대는 물론 자국 어민들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마 전 4차 방류를 감행하였다. 과거를 팔아먹는 자가 지금 우리의 현재를 팔아먹고 있다.

그런 가운데 자위대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그들의 군홧발이 우리 강토를 짓밟고 지나갈 날이 이대로 가면 멀지 않았다. 그뿐인가?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면서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다. 우리 강토를 지키고 있는 군인들의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의 지도에서 독도를 삭제하고, 영토분쟁지역이라고 기술하기까지 했다. 이 정도 되면 독도를 일본에 넘기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행히 여론이 너무 안 좋으니 정신전력교육 기본교재는 전량 회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한 국방장관은 여전히 건재하다. 미국이 동해를 일본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데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에 순응하고 있다. 이제는 독도까지 팔아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본 군대인 자위대에 이 강토를 짓밟게 하는 것이나, 우리 민족이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독도를 일본에 넘길지도 모르는 일이나, 그 모두 미래를 팔아먹으려는 짓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런 상황 속에서 3.1혁명 105주년을 맞이하였다. 신돌석씨 지역의 노동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2월 초부터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대중집회로 3.1운동 105주년 자주평화대회를 한다고 했다.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서 집결해서 일본대사관->조계사->보신각 사거리->르메이에르->미대사관 옆->미대사관 맞은편(광화문광장쪽)으로 행진한다는 계획까지 세워졌다.

지역에서도 3.1절 기념식이 시민단체 중심으로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때는 3.1만세운동을 재현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그런 행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모이지를 않는다. 신돌석씨와 같이 활동하는 노동자들과 가까운 시민단체 등은 이번에는 지역행사보다 서울에서 하는 자주평화대회에 참여하자고 하였다. 그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누군가의 제안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였기 때문이었다.

3.1절 당일 무엇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합의를 보고 난 뒤 최미숙이 3월 2일이 토요일인데 좋은 행사가 있다고 소개했다. 서울 동작동에 위치한 현충원을 전문가의 해설을 들으며 탐방하는 것이란다. 이름하여 ‘현충원 역사산책’이라고 하였다. 해설자는 같은 이름의 책을 냈다. 신돌석씨는 그 책을 선배한테 선물로 받았는데 제대로 읽어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였다.

최미숙은 해설자의 안내로 전에 한번 탐방한 적이 있단다. 거기 가서 그의 해설을 듣고 나니 현재 친일파들이 설치는 것이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단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는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들을 국민 세금으로 기리고 있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려면 그 나라의 국립묘지에 가보라’는 말을 해설자가 했단다. 우리 현실의 뿌리를 바로 현충원에 가서 깨달아 보자고 하였다. 그래서 3월 2일 행사 참여가 결정되었다.

토요일에는 촛불대행진이 있다. 벌써 80회쯤 한 것 같다. 추운 겨울을 두 번이나 넘겼다. 신돌석씨는 그 집회에 참가할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촛불행동이라는 단체가 주최하는데 신돌석씨의 지역에도 지역촛불행동이 있었다. 주말마다 집회에 가서 깃발을 올렸다. 그런데 언론에는 단 한 줄의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희한한 일이다. 그 많은 사람이 시내 한복판에서 매주 집회를 하고 행진을 하는데 웬일인지 없는 사람들 취급을 했다.

3월 2일은 토요일이라 촛불대행진 집회가 있다. 그런데 현충원 탐방은 오전이라서 큰 지장은 없었다. 늘 그랬듯이 촛불대행진에 참가할 사람들은 2일 행사가 끝난 뒤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3월 1일에 이어 2일까지 이틀 동안 서울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다. 그래서 이틀 중 하루를 선택해서 나가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이틀 다 나가기로 하고, 2일에는 현충원 탐방을 하고 집회 참가는 그때 상황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신돌석씨는 현충원 탐방 가기 전에 해설자가 쓴 책을 미리 보고 가기로 했다. 사실 신돌석씨는 현충원이 그리 낯선 곳은 아니다. 외삼촌이 월남에서 전사한 뒤 그곳에 안장되어서 어린 시절에는 매년 가던 곳이었다. 또 소풍 겸해서 현충원에 송충이를 잡으러 가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현충원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신돌석씨는 국군묘지라고 알고 있었다. 책을 읽어 보니 원래 국군묘지에서 출발했는데 국립묘지가 된 것이 1965년이란다.

이 책에 따르면 국립묘지는 근대국가의 산물인데, 그 전형을 프랑스형과 미국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묘지인 팡테옹은 프랑스 혁명을 통해 탄생한 자유 프랑스가 생긴 이후 위대한 사람들의 유골이 안치되는 장소이다. 반면에 미국의 알링턴 독립묘지는 독립전쟁 과정에 희생된 사람들이 안장되는 곳이 아니라, 남북전쟁 과정에서 전사한 북군을 안장하는 곳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미국의 국립묘지 유형은 연방군사주의의 상징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국립묘지가 바로 이 유형을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는 국군묘지로 1955년에 출범한 뒤 1965년에 국립묘지로 승격했다. 이때부터 군인만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경찰관, 전직 대통령, 향토예비군도 안장 대상에 ‘정식으로’ 포함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신돌석씨가 어렸을 때는 동작동 국군묘지라고 불렀던 것 같다. 1965년은 신돌석씨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해이다. 초등학교 때도 이렇게 불렀다고 기억하는데 아마도 바뀐 뒤에도 국군묘지라는 인식이 바뀌지 않아서 한동안 계속 그렇게 일컬어졌던 것 같다. 이 점에서 우리의 국립묘지는 군인의 묘지에 독립운동가를 끼워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문제는 매국노들까지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언제부터 동작동 현충원에 갔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때일 것 같다. 처음 갔을 때 신돌석씨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은 월남에서 그렇게 많은 우리나라 군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에 월남에 간 사람은 한 다리 건너면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거기 가서 죽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신돌석씨 외삼촌이 전사했지만 운 없는 사람 몇이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국립묘지에 가보니 ‘월남에서 전사’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정말 충격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은 무적이고, 베트콩은 말라비틀어져서 국군이 맨손으로도 때려잡는다고 배울 때였다. 그런데 이렇게 많이 전사하다니 어떻게 된 일인가? 지금은 전사자가 공식적으로 5099명이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전혀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채로 사람들은 그 사실 자체를 몰랐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충격적인 것은 경찰묘역에서였다. 신돌석씨와 형은 어렸을 때 잘 듣던 라디오 프로가 있었다. 동아방송에서 하던 ‘특별수사본부’라는 드라마였다. 그것을 방영할 때면 형과 신돌석씨는 하던 일을 멈추고 라디오 앞에 앉았다. 해방 직후부터 6.25 때까지 남로당을 색출하는 검사와 경찰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드라마를 흥미 있게 들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거기 나오는 경찰들을 영웅처럼 생각하였었다.

그들 중 간부 하나는 남로당 조직원의 총에 맞아 죽었고, 세 사람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뒤늦게 서울을 탈출하려고 했는데 한강 철교가 폭파될 때 다리를 건너다 물에 빠져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들의 묘를 국립묘지에 간 김에 찾아보자고 형하고 함께 경찰묘역을 찾았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먼저 죽은 간부는 경감이고, 두 사람은 경사, 한 사람은 순경으로 되어 있었다. 드라마에 따르면 이들보다 후임들은 서울에 남아서 지하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한강 다리 폭파가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이후 이 다리 폭파를 주도했던 공병대 장교가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나중에 그 부인이 재심을 신청해서 무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수도 서울에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큰 다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다리를 폭파하는 일을 일개 공병대 장교가 결정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국방장관 아니면 더 윗선에서 결정했을 것이다.

결국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그 결정을 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때 그는 이미 수원인지 대전인지에 가서 방송하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신돌석씨는 특별수사본부 형사들이 죽은 것은 애통해 하면서도 이승만의 문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전말을 알게 되었다. 세월호 참사 뒤에는 배를 버리고 도망간 선장 이준석을 이승만에 빗대어 비판하는 글들이 많았다. 그런 그를 지금 기념관을 세운다 어쩐다 하면서 떠들고 있다.

그런데 정작 신돌석씨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그때 같이 갔던 대학생 외사촌형이 그들이 독립군 때려잡던 친일 경찰이었다는 걸 아느냐고 한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나의 영웅이 갑자기 친일파가 되다니. 그것도 악질 고등계 경찰이라니. 아닐 거라고 부인하려 했지만 부인할 수가 없었다. 신돌석씨가 들은 드라마에서도 그런 내용이 나왔다는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중에 경찰 내 침투한 프락치를 검거하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조차 조작일지도 모른다고 나중에 생각했다. 그건 논외로 하고, 일단 드라마에서 검거된 그가 특별수사본부 형사들을 향해 그래도 자기는 너희들처럼 일본놈 밑에서 독립투사 때려잡는 짓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던 적이 있었다. 들을 때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넘겼는데 비로소 그게 떠오른 것이었다.

그런 충격적인 일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은 노동운동을 하면서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책을 잘 읽지 않았던 신돌석씨가 소그룹에서 학습을 하면서 이것저것 많이 읽었는데 노무현 전대통령이 피가 거꾸로 솟아나는 느낌을 가졌다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읽을 때는 정말 기가 막혔었다. 그런데 지금도 모르겠는 것은 어째서 그들을 두둔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이제는 장관도 모자라 대통령까지 되어 그러고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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