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북으로 간 우리 민족의 현대 유화가 이쾌대(李快大, 1913~1965). 한마디로 그는 전설적인 천재화가였다. 그런데 그가 1988년 해금 작가가 된 이후 남쪽에서 그의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는 몇몇 미술평론가와 근·현대미술사가(近·現代美術史家)에 의하여 시도되어 왔다.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시”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연구는 이쾌대의 남쪽 활동에 국한된 면이 있다. 이쾌대가 북으로 간 이후의 활동과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는 접근 자료의 한계로 인하여 거의 없다.

필자 역시 북의 문화재와 작가애 대한 연구를 시도하던 초기부터 그를 주목하여 자료를 탐색했으나, 북에서 이쾌대를 언급한 문헌은 북의 미술평론가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증보판 1999년) pp.289~292 정도였다. 이후 최명수의 『민족수난기의 회화』(2017년) pp.125~133에서도 그를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북에서 그에 관한 연구는 심화한 연구라 볼 수는 없다.

1. 이쾌대가 북으로 간 이유

이쾌대는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 남은 그는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부역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유엔군의 인천 상륙 직후 후퇴하는 인민군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가 곧이어 국군에게 체포되었다 한다. 인민군과 함께 있어 포로로 오인되었고 거제도 포로수용소로까지 가게 된다.

이쾌대는 1950년 11월11일 포로수용소에서 부인(유갑봉)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중략) 9월20일 서울을 떠난 후 5,6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중략)” 즉 이쾌대는 9월 25일이나 26일쯤 잡힌 것이다.

이쾌대의 이 시기에 대하여 남측의 유족은 북으로 끌려갔다고 납북을 주장하며, 북에서는 의용군에 자진 입대하여 포로가 된 후 북송을 택했다고 주장(의거 입북)한다. 이러한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은 정치적인 것일 뿐 그의 예술 세계를 논하는 데는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나 거제도 포로수용소애서 그와 함께하였던 이주영의 두 아들(이명학·이영학)에 의하면 이쾌대가 북송을 택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자신을 목표로 한 우익 테러로부터의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다는 발언은 참고해야 할 사항이다.(참조 : 『한겨례신문』, “이쾌대 선생 월북은 이념 아닌 생존이었다”, 노형석 기자. 2010.10.7)

2. 이쾌대의 재남(在南) 활동

이쾌대는 경상북도 칠곡에서 창원현감을 지낸 대지주 경주이씨 이경옥(李敬玉)의 2남4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이경옥의 장남이자 12세 연상의 맏형 이여성(李如星, 1901~?)은 이쾌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데, 우리는 이여성의 친지 근원(近園)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쓴 「오원질사(吾園軼史)」에서 언급하고 있는 근원이 오원의 병풍을 본 집은 칠곡의 이경옥가(李敬玉家)이다. 즉 이경옥의 집에는 수량 미상의 조선후기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이쾌대는 미술 및 복식사, 민속사에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던 형 이여성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이쾌대는 1928년 대구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미술교사로 재직 중이던 화가 장발(張勃, 1901~2001)에게 미술을 배운 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쾌대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이던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하고, 그해 가을에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 회화부 2등상을 수상했다. 1934년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했다. 1941년 도쿄에서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는데 이때 협회 구성원들은 이중섭, 최재덕, 문학수, 김종찬, 김학준, 진환이다.

광복 후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 회화부 위원에 선임된다. 같은 해 조선미술동맹의 서양화부 위원장에 선임되며, 조규봉, 김정수, 리석호 등과 함께 해방 직후 강원도에 건립할 해방탑 문제로 북행길에 올랐고 그후 가족이 있는 서울로 리석호와 함께 나왔다. 1947년 8월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했고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 서울지검에서 운영하던 좌익인사 사상전향기구 보도연맹에 가담한다.

이후 홍익대학교 강사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자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한다. 이후 9·28 직전에 서울을 탈출했으나 국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구금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쾌대는 1953년 남북 포로교환 때 북을 선택하여 북으로 갔다.

3. 이쾌대의 재북(在北) 활동

북으로 간 이쾌대는 1953년부터 몇 년간을 제자 리병효(李炳孝, 1916~1981)의 집에서 생활한다. 1954년부터 미술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가 ‘전후 건설성 미술제작소’의 미술가, ‘조선미술가동맹’ 평양시, 자강도 현역미술가로 선출되는가 하면, 1957년 조선미술가동맹 유화분과 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1957년에 제자 리병효의 주선으로 재혼한다. 1958년에는 ‘동맹 역사편찬위원회’의 ‘해방 후 남반부 편집 그룹’의 위원을 역임했다.

북에서 알려진 이쾌대의 대표작은 유화 「대대장고지방어전투」(1955, 291×218cm), 「온포계곡」(1955, 20호), 「3.1봉기」(1959, 150×227cm), 「박연 초상」(1956, 20호), 「복숭아」(1957, 20호), 「농악」(1957, 155×235cm), 「우의탑벽화」(1958, 13×2m), 「소녀」(1959, 30호), 「수봉이」(1960, 20호),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1961, 50호), 「송아지」(1961), 「방목」(1961) 등이 있다.

그중 「송아지」는 국가미술전람회에서 2등상을 받았다. 이 가운데 「박연 초상」은 조선력사박물관의 주문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그런데 북에서 1958년 종파분자 숙청사건에서 김두봉이 숙청되자, 이쾌대의 친형인 이여성이 숙청에 휘말리게 된다. 이러한 여파가 이쾌대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쾌대는 1965년 위천공으로 사망한다. 사망 당시 그의 집에는 적지않은 유작이 있었으나 많은 미술가가 참고품으로 가져갔고 30여 년 세월이 지나는 과정에 많은 작품이 유실(遺失)되었다고 한다.

이쾌대는 뛰어난 인물화 역량으로 조중우의탑(朝中友誼塔) 벽화 제작에 참여하여 한국전쟁 중 북한과 중국의 우의를 벽화로 나타냈다. 이쾌대는 총괄을 담당했으며, 당시 화가인 김진항, 류현숙, 민병제, 임병삼, 최창식, 한기석, 홍성철 등이 참여해 우의탑의 좌측에 <전후복구건설 원조>를, 우측에 <조선인민군대와 중국인민지원군의 협동작전>을 묘사했다. 이 조중우의탑은 이쾌대 사후 1984년 탑을 허물고 재건축되었으므로 이쾌대가 총괄했던 벽화의 형태만 띠고 있을 뿐, 그의 손에 의해 직접 그려진 것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참조 : 『조선향토대백과』, 평화문제연구소, 2008년)

4. 분단시대의 민족 화가들에 대한 종합적 연구가 필요하다

북에서 남으로 온 화가로 대표적인 두 분의 유화가를 꼽자면, 이중섭(李仲燮, 1916~1956)과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이 있다. 현재 이 두 분의 화가는 대표적인 현대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반면에 남에서 북으로 간 대표적인 두 분의 유화가를 꼽자면 이쾌대(李快大, 1913~1965)와 임군홍(林群鴻, 1921~1979) 등이 있다. 이쾌대와 임군홍도 남쪽에 남은 작품 수량은 적지만 역시 대표적인 현대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중섭의 1951년 이전의 황소 유화가 어떠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반면에 이쾌대의 1953년 이후 작품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도 알지를 못한다. 중국을 통하여 남측으로 온 황소 그림 가운데 이중섭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유화가 시중에 여러 점 있고, 이쾌대의 작품으로 주장하는 유화가 여러 점 있으나, 북에서 그려진 그들의 작품 실물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어, 남에서 유통되는 그 작품들은 대체로 진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진위를 분별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현대미술의 풍부한 가지를 되찾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농악」, 이쾌대, 1957, 전국미술전람회 출품작, 155×235cm. 북에서 그린 이쾌대의 작품으로는 최대작이다. 이 작품은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농악」, 이쾌대, 1957, 전국미술전람회 출품작, 155×235cm. 북에서 그린 이쾌대의 작품으로는 최대작이다. 이 작품은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3.1봉기(삼일운동)」, 이쾌대,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 출품작, 150×227cm. 이 작품은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3.1봉기(삼일운동)」, 이쾌대,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회 세계청년축전 출품작, 150×227cm. 이 작품은 『조선미술』 1957년 4호에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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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나는 사람들」, 이쾌대, 1961년, 50호. 이 작품은 리재현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재판본(1999년) p.291에는 흑백으로 게재되어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필자 역시 1988년 상당수의 재북작가들이 해금되면서 그들에 관하여 꾸준한 관심을 가져 왔다. 그동안 몇 편의 논고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자료의 부족이 연구를 가로막기가 일쑤였다. 수년 전 중국의 어느 미술대학의 교수로부터 이쾌대에 관한 북측 자료를 일부 입수하였기에, 상세한 논평은 후일로 미루고 이쾌대가 북에서 창작한 대표작 세 점을 우선 여기에 소개한다. 이 작품들은 국내로 유입되지 않은 작품들 가운데서 엄선한 작품이다.

앞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있는 이쾌대가 재북시에 그린 다른 여러 작품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필자는 고대한다. 그리하여 이쾌대의 종합적인 연구가 시도할 수 있었으면 하며, 머지않은 미래에 남과 북에 있는 그의 통합 작품전이 그의 고향(칠곡)이나 대구시에서 열렸으면 한다.

분명한 것은 이쾌대의 미술 연구는 우리 민족의 현대미술을 남북 모두에서 찾는 의미 깊은 연구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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