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던 세상이
다시 뒤집어지는 반전이 계묘년 끄트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갑진년 봄에 결실을 맺는 위대한 반전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새아침이 오는 것을 거부하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이들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찬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갑진년 한 해는
그야말로 값진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갑진년에는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고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 1.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형수가 박성환의 회사를 그만두고 계속 편의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 5년 계약을 두 번 한 2021년에 편의점 문을 닫았다. 동창들이 하는 회사에 다시 들어가 볼까 생각도 했고,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라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업을 해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자본이 문제였다. 공인중개사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큰형이 개인택시면허를 사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막내인 형수에게 큰형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나이도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중견기업을 경영했다. 막내가 실직을 하고 있어서 안타까웠는지 그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회사택시를 6개월 정도 해서 택시기사로서 준비된 자세를 보여주면 사주겠다는 것이었다.

형수는 처음에 망설여졌다. 해보지 않은 일이라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바로 개인택시를 모는 것이라면 모를까 회사택시를 6개월씩이나 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가 적극적으로 해보라고 권했다. 친구들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동창들 중에는 일류대학을 나왔는데 중년 이후에 택시기사가 된 사람도 있었고, 고등학교 교장 선생 출신이 개인택시면허를 사서 택시기사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형수가 마음 먹고 회사택시기사가 되었다. 이전에는 택시기사 되기가 꽤 어려웠었다. 프랑스 파리 같은 경우는 시험을 본다고 어느 책에서 봤다. 그런데 요즘은 면허가 있고 지원만 하면 거의 채용이 되었다. 택시기사의 노동조건이 워낙 열악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기왕 하게 된 것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길을 잘 못 찾아서 손님한테 꾸지람 듣기 일쑤였고, 그러다 보니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사납금 제도는 택시 기사가 번 돈 중에서 일정액을 회사에 내고 나머지를 받는 제도이다. 형수처럼 길 찾는 일에 서툰 사람은 형편없는 돈을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첫 달 월급을 보니 100만 원도 안 되었다. 이건 정말 도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편의점을 할 걸 하는 후회도 생겼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문제는 형수의 마음 밑바닥에 남아 있는 정의감과 상식이엇다.

형수가 알기에 사납금은 폐지되었다. 형수는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시사프로그램을 찾아서 보고 들었고, 유튜브도 많이 보았다. 시사주간지도 열심히 읽는 편이었다. 진보적인 매체를 늘 가까이 했던 것이다. 사납금이 택시기사들에게 너무 가혹하고, 건강을 해치는 일이 많다고 하였다. 나아가서 그것 때문에 서비스도 엉망이 되고 교통사고를 유발할 위험이 높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었다.

2020년부터 사납금은 전면 폐지되었다고 형수는 언론 보도를 통해 알았다. 시사에 깊은 관심이 있지 않으면 대부분 흘려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택시회사에 취직해서 일해 보니 사납금제는 폐지되었지만 전액관리제라는 것이 있었다. 수입을 모두 회사가 받아서 관리하는 제도이다. 거기에 기준운송수입금제라는 것이 있었다. 기준운송수입금에 미달하는 금액을 납입하면 불성실 근로로 간주되고, 급여지급을 보류하고 승무 정지 및 배차 중지를 행하였다.

기준운송수입금에 미달하는 금액은 기사가 책임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사실상 사납금제였다. 한 달 지난 뒤 월급을 계산해 보니 100만 원이 채 안 되었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왜 월급제로 하지 않냐고 회사측에 따졌다. 관리자는 싫으면 그만두라고 하였다. 화가 나서 욕을 해주고 그 길로 나와 버렸다. 회사에서 나온 뒤 아내한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내 얼굴 보기도 민망했다.

형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기가 고생할 각오가 덜 되어서 그런가? 젊은 날에 게으르게 살다가 이렇게 되었는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억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택시회사가 법으로 금지된 사납금제를 변형해서 시행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 아닌가? 그것을 그냥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그렇다고 돈이나 제대로 주는가? 그런 걸 묵인한 대가로 받는 돈조차 너무나 적은데도 그렇게 해야 하는가?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집에 밤늦게 들어가서 아내에게 말하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뒤 답답한 마음으로 집에서 죽치고 있다가 공사판에라도 나가보려고 했지만 나이도 들었고 병든 몸으로 할 엄두가 안 났다. 다시 편의점을 해볼까 하고 고만하고 있는 차에 큰형한테서 연락이 왔다. 편의점을 차려 줄 테니 열심히 일해 보라는 것이었다. 큰형은 형수를 못 믿겠는지 아내에게 그런 말을 하고 오라고 했다고 한다.

큰형한테 아내와 함께 불려 가서 일장 훈계를 들었다. 너는 말만 앞서고 어떻게 먹고 사는지에 대해 진정성이 없는 자식이다. 개인택시를 사주는 것은 안 되겠고, 편의점을 차려 줄 테니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열심히 일해 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편의점을 차릴 때도 형들과 누나들이 도와주어서 시작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웬일인지 큰형 혼자 나서는 것 같았는데 형수에게 각서를 쓸 것을 요구했다. 아내 이름도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편의점 10년을 하는 동안 사실 둘 다 고생을 했지만 누가 보아도 아내가 훨씬 더 일을 잘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형수가 꼭 필요한 점이 있다면 야간에 가게를 지키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것만으로도 형수가 더 중요한 일을 한다고 추어주곤 하지만 본사를 대하는 것이나 손님을 맞이하는 일 등에서 아내가 훨씬 큰 역할을 한다고 형수는 늘 생각했다. 그 점에서 아내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각서를 쓰라고 하고, 아내 이름까지 쓰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버지 같은 큰형이지만 참기가 어려웠다. 그냥 뛰쳐나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그런 형수의 마음을 알았는지 얼른 각서에 서명을 하고, 형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형수도 별 수 없이 각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편의점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형수 표현에 의하면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시기였다. 편의점을 찾는 손님이 많이 줄어든 때였다. 게다가 동네에 편의점이 둘이나 더 늘었다. 그 중 하나는 형수네와 본사가 같은 곳이었다. 거기서 다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본사에서는 상관없다며 그곳에서 다시 하기를 권했다. 좀 화가 났다. 이전에도 형수가 하고 있는 곳에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하나 더 차리게 한 회사였다. 그래서 본사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형이 투자한 돈하고 이전에 했던 자본금을 합해서 좀더 확장하고 이웃동네로 옮겨서 다시 시작했다. 수입은 이전보다 나았다. 무엇보다 알바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비용이 주니 수입도 늘었지만 몸은 더욱 피곤해졌다. 아주 급할 때는 아들이 도와주었다. 그럭저럭 괜찮아져서 친구들 만나러 나오는 것도 1년에 한 번에서 한두 번 더 늘었다. 아내가 허락했고, 아들이 자기가 대신 일하겠다고 해서 그럴 수 있게 되었다.

편의점이 그런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작년 9월 말쯤 형수가 신돌석씨에게 전화를 했다. 택시기사로 분신한 방영환 열사에 대해 물었다. 밤샘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아내와 교대한 뒤 방영환 열사의 분향소가 있는 택시회사 앞에 갔다 왔다고 하였다. 그 분이 요구한 것이 바로 자기가 말했던 변형된 사납금제인 기존운송수입금제 폐지하고 완전월급제를 시행하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자기가 그냥 화만 내고 나온 것이 잘한 일인지 괴롭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형수의 전화를 듣고 당황하였다. 그 마음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편의점을 다시 하게 된 마당에 잠깐 지나쳤던 택시기사의 문제에 대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법인택시들의 문제는 공감한다고 하면서도 네가 어떻게 할 일은 아닐 것 같다고 하였다. 형수는 신돌석씨의 그런 응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할 수는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수긍하였다.

그 뒤 형수는 편의점주들도 단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서 보았는지 일본의 경우 편의점주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본사에 교섭을 요구한 경우가 있다고 하는 것을 신돌석씨에게 이야기했다. 2009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본사는 거부하였고, 편의점주들은 지방노동위원회에 판단을 요구했다. 지방노동위원회는 편의점주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 다른 회사가 또 다른 지역에서 같은 요구를 했고, 역시 편의점주들의 노조가 맞다는 판단을 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일본의 두 지역노동원회가 편의점주를 노동자로 본 까닭은 아주 분명했다. 점주가 영업시간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고, 본사 직원이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관리감독을 하고, 신제품을 도입하라는 본사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그리고 그날 그날 매출을 송금해서 잔액을 받는 등 노동 제공의 대가를 받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들은 우리나라의 편의점주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일이다.

형수는 일본의 경우를 알게 된 뒤 우리나라에서도 편의점주들이 노동자라는 것을 인정받고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본사와 교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막막하였다. 동네 편의점주들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하면 좋을 텐데 시간이 서로 맞지 않았다. 간단하게 나눈 이야기로도 절벽을 느꼈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본사 사람이 와서 돌려서 말했지만 경고성 말만 하고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의점주가 노동자라는 생각은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고객들도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런 점이 우리가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진척되었다고 해도 진짜 민주주의가 되려면 많은 변화가 필요한 까닭일 것이다. 법 제도의 변화도 필요하지만 국민들의 인식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자본의 요구를 무방비 상태에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자본의 이윤을 위해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일본의 두 지역노동위원회에서 판단했듯이 편의점주와 본사의 관계는 고용관계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본사는 가맹점주를 자영업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라고 본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하였다. 그리고 2019년 중앙노동위원회는 본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가맹점주가 독립성을 지닌 자영업자라는 것이었다. 결국 편의점주들의 노조 결성과 그를 통한 단체교섭은 일본에서도 좌절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편의점주만이 아닌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이 단체를 만들어서 본사와 교섭하는 일은 가능하다. 2013년 가맹사업법이 개정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본사에 압력으로 작용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가맹점주들의 단결을 무력화시킬 힘이 본사에는 무궁무진하게 있다. 계약을 해지시킬 수도 있고, 위약금을 물릴 수도 있다. 피자 프랜차이즈 점주협의회를 만들었던 점주가 바로 계약해지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계묘년의 송년회는 찐 송년회라고 해서 음력 설 직전에 했다. 해외에서 선교사를 하는 친구가 귀국했다가 설 전에 다시 나가게 돼서 날짜를 그렇게 잡았다. 형수도 나왔고, 박성환도 나왔다. 이런저런 안부들을 주고 받았고, 빠질 수 없는 정치 이야기도 하였다.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신돌석씨가 형수와 길게 깊게 이야기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간단하게 지나가는 이야기식으로 하였다.

1차가 끝나고 2차로 갈 때 형수가 신돌석씨와 나란히 걸으면서 말했다. 자기가 젊은 날에 말만 앞서고 게으르게 살다가 지금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2년 뒤면 출소한다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그때면 계약이 끝난단다. 이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한다. 오로지 그것을 희망으로 삼고 하루하루 지낸다고 하였다. 신돌석씨는 갑자기 갑갑해졌다. 하지만 무엇도 책임있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신돌석씨는 형수에게 말했다. 너는 말만 앞선 것도 아니고, 게을렀던 것도 아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보는 너의 심성이 이 사회에서 살기 어렵게 한 것이다. 어쨌든 좋게 풀리면 좋겠다. 그러면서 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편의점주는 노동자이고, 이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은폐된 고용은 더욱 확대되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은 현재로서는 그렇게 그에게 설득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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