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구속된 뒤 우리 4남매에게 방학은 특별한 의미가 됐다. 방학이 되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1년에 두 번씩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에게 가는 날은 며칠 전부터 마음이 설렜다.

1981년 7월 말, 우리는 전주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버스 첫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전라선 통일호 첫차에 올랐다. 4시간여가 지나 전주역에 내린 뒤 다시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가 한참을 달려 평화동에 있는 전주교도소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높다란 담장으로 세상과 벽을 쳐놓은 하얀 콘크리트 건물은 위압적이었다. 구치소는 매일 같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에다 접견과 재판 출정으로 항상 북적였다. 하지만 기결수가 모여 사는 교도소는 달랐다.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기약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가 뜨거운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를 이끌고 낯선 곳을 찾아가느라 새벽부터 긴장한 어머니는 교도소에 도착해서도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날은 우리 4남매가 구속된 아버지를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교도소에 특별면회를 신청했다. 아버지와 우리를 유리벽과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특별면회를 하면 사무실 같은 곳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남민전 서건의 김남주 시인과 이수일 선생, 그리고 아버지와 정종희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뒤쪽에 양복 입은 이들은 교화위원).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친 보성의 명문가 출신 봉강 정해룡 선생의 나이 어린 삼촌이었던 정종희 선생은 6.25때 토벌군의 총탄에 맞아 실명한 채 사셨는데, 월북한 정해룡 선생의 동생이 고향을 다녀간 이유로 온집안이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무기형을 받았다. 광주교도소에서 아버지는 정종희 선생과 한 방에서 살며 두 눈이 되어 드렸던 인연이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남민전 서건의 김남주 시인과 이수일 선생, 그리고 아버지와 정종희 선생이 함께 찍은 사진(뒤쪽에 양복 입은 이들은 교화위원). 독립운동에 전 재산을 바친 보성의 명문가 출신 봉강 정해룡 선생의 나이 어린 삼촌이었던 정종희 선생은 6.25때 토벌군의 총탄에 맞아 실명한 채 사셨는데, 월북한 정해룡 선생의 동생이 고향을 다녀간 이유로 온집안이 가족간첩단 사건으로 엮여 무기형을 받았다. 광주교도소에서 아버지는 정종희 선생과 한 방에서 살며 두 눈이 되어 드렸던 인연이 있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특별면회는 교도소장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저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계속 시간만 끌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겨우 특별면회가 허용됐다. 그런데 대뜸 다섯 명이 모두 접견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면회는 규정상 네 명까지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아이를 한 명 놔두고 들어가라고 했다. 이 말에 어머니가 폭발했다.

“당신들도 자식을 키우지 않소?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서울에서 새벽같이 달려왔는데, 애를 하나 빼놓고 들어가라고요?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하지만 저들은 규정을 들먹이며 끝끝내 안 된다고 했다. 옥신각신하다 결국 내가 빠지기로 했다. 더 시간을 끌다가는 당일로 서울에 올라가는 게 어려울 것 같아서도 그랬다. 그런데 접견실에 들어온 아버지가 내가 빠진 것을 알고는 당장 아이를 데려오라고 호통을 쳤다. 뒤늦게 교도관이 밖에서 기다리는 나를 데리러 왔다.

규정은 핑계였다. 애초부터 충분히 해줄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식으로 애를 먹인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알았다. 군사독재의 충실한 하수인들이 모인 이곳이 비인간적일뿐더러 야비한 곳임을…….

속상한 마음은 전동성당에 들러 문정현 신부님을 만나 뵙고 풀어졌다. 신부님은 “원래 교도소가 그런 식으로 괴롭힌다”며 우리를 위로해주셨다.

“다음부터 면회 마치면 성당에서 식사도 하고 쉬었다 가세요. 사제관에 어머님이 함께 계시는데 말씀해 놓겠습니다. 제가 없더라도 꼭 오세요.”

아버지는 감옥에서도 부당한 처우에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의 끝은 항상 이감이었다. 골치 아픈 사람은 다른 데로 보내버리는 게 저들의 특기였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적응하며 산다는 게 갇힌 자들에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라는 걸 저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전주를 거쳐 광주, 대전, 그리고 마지막 대구에 이르기까지 아버지는 여러 차례 이감을 다녔다. 덕분에 우리는 방학 때마다 전국의 도시로 특별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래도 광주는 우리에게 큰 힘을 주었다. 한 번은 면회가 늦게 마쳐 서울로 올라갈 길이 막막했다. 요새처럼 KTX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통일호로 5시간씩 걸렸다. 좀 더 빠른 새마을호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한테는 경제적인 부담이 컸다. 전남대 해직교수인 이광우 교수님이 사정을 알고는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괜찮습니다. 밤차를 타고 가도 되니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밤차 타고 새벽에 내려서 또 어떻게 집에 갑니까? 우리 집에도 안 교수님 자제분들과 또래들이 있습니다. 그냥 편하게 지내다 가세요. 그냥 가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어머니도 더는 거절을 못 했다. 늘 주눅이 들고 우울했던 우리도 그날 밤 모처럼 사람 사는 기분을 느꼈다.

광주의 민주 인사들은 이 교수님처럼 구속자 가족을 자기 가족같이 챙겼다. 교도소에서 뭔가 문제가 터지면 그들이 먼저 달려가 싸웠다. 광주교구의 윤공희 대주교님은 구속자 가족들이 면담을 원하면 일정을 바꿔서라도 먼저 만나주셨다. 구속자 가족들이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지 꼼꼼하게 챙겨주셨던 광주YWCA 조아라 총무님은 광주의 대모이자 구속자 가족의 대모이기도 했다.

“광주에 가면 늘 마음이 푸근해졌어. 다들 우리한테 뭐라도 하나씩 챙겨주려고 했고. 그분들의 위로를 받으면 절로 힘이 났지.”

광주는 택시 기사들도 친절했다. 면회를 마치고 당일로 집에 돌아오자면 늘 시간에 쫓겼다. 그래서 광주역에서 문흥동 교도소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하지만 다섯 명이라 정원을 초과했다. 어머니는 고심 끝에 기사에게 부탁했다.

“아저씨, 저희가 다섯 명인데 어떡하죠?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아버지 면회 가는 길이에요. 새벽 일찍 서울에서 왔어요.”

어머니는 다른 지역과 달리 광주에서는 숨김없이 말하곤 했다.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그러면 택시 기사들도 선선히 승낙했다. 가는 도중에도 “고생이 많겠습니다. 빨리 나오셔야 할 텐데……”하며 우리를 위로했다. 이처럼 1980년 5월의 아픔을 지닌 광주는 시대의 아픔을 지닌 모든 사람을 품어 주었다.

형(안세민)의 고려대 경제학과 입학 사진. 형은 단과대 차석으로 입학해 4년간 학비 면제와 생활지원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사진 제공 – 안영민]
형(안세민)의 고려대 경제학과 입학 사진. 형은 단과대 차석으로 입학해 4년간 학비 면제와 생활지원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사진 제공 – 안영민]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4남매도 점차 성장해 나갔다. 큰누나는 1983년 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처럼 수학을 전공했다. 형은 1년을 재수해서 1985년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작은누나는 1986년 철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없이 지내야 했던 가난하고 외로운 시절이었지만 돌아보면 다들 꿋꿋하게 살아냈다. 감옥에서 부친 봉함엽서 가득 빽빽한 아버지의 글이 힘이 됐고, 방학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위로가 됐다.

아버지는 1986년 12월에 대구로 이감했다. 이때 나는 큰 결단을 했다. 학력고사를 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 입학원서를 준비할 때였다. 당시 서울의 대학은 데모가 끊이질 않았다. 그 와중에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큰누나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집을 떠나는 일도 생겼다. 어머니는 여러모로 아버지를 닮은 내가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가담할까 염려했다.

“영민아, 기왕이면 경북대 수학과가 어떠냐? 거기 가면 교수님들도 다 너거 아버지 후배고 제자라서 너한테 참 잘해주실 거다.”

대학은 수학과로 가겠다고 진즉부터 생각해왔던 나는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대구로 이감한 아버지 가까이서 지내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어머니 대신 내가 자주 아버지 면회를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중에 어머니한테 더 큰 아픔으로 바뀔 줄은 그때는 나도, 어머니도 생각조차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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