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대한제국 말과 일제강점 초기에 활동한 우리 문학사상 최초의 신소설가(新小說家) 이해조(李海朝, 1869~1927)는 민족 지조를 지킨 첫 근대 소설가이다. 계몽주의자이기도 한 그는 일제의 회유에 변절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반면에 같은 신소설가로서 이완용의 비서를 지낸 이인직(李人稙, 1862~1916)은 일제의 조선 강점에 앞장서 협력한 철저한 친일파였다. 이해조의 신소설이 이인직의 신소설보다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가 작품의 우수성에도 있지만, 민족의 지조를 지킨 그의 애국 애족의 정신에 있다.

신소설가 이해조의 뒤를 이은 근·현대의 소설가로서 민족의 지조를 지키거나 열혈 독립투사로 활동한 문학가였으나 해방을 맞이하지 못한 문학가는 우선 사학자이기도 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소설가),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 1900~1943, 소설가), 해풍(海風) 심훈(沈熏, 1901~1936, 시인 겸 소설가) 등을 들 수가 있다.

반면에 살아서 해방을 맞이한 민족주의 성향의 근·현대 소설가로는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 소설가)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 소설가) 등이 있다. 특히 월탄은 작품을 통하여 두드러진 민족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제 이들을 살펴보자.

1. 소설가이자 의열단원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기에 언론인으로 1905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논설을 쓰기 시작했고, 이듬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주필로 활약했으며,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이후에는 항일단체 권업회(勸業會)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권업신문(勸業新聞)』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를 문학가로도 평가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가 양계초(梁啓超)의 『의태리건국삼걸전(意太利建國三傑傳)』을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1907)을 비롯하여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1908), 『수군제일위인이순신전(水軍第一偉人李舜臣傳)』(1908),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1909) 등 일련의 역사 전기소설을 저술하여, 당시에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한 민족영웅의 위인전을 남겼다는 사실에 있다.

필자가 보기에 단재 신채호의 역사 위인 전기소설은 『임경업전』이나 『곽재우전』 등의 우리 고전군담소설(古典軍談小說)의 맥을 이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위인전은 근대 역사 위인 전기소설의 효시(嚆矢)라 할 만하다.

또한 단재 신채호는 1928년에 장편소설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우화 형태를 취하고 있는 풍자 소설이지만, 한국 최초의 근대적 판타지 소설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의열단원 단재 신채호를 위인전과 판타지 소설을 창작한 민족문학가로도 기억하여야 한다,

단재는 1907년 항일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가담하였으며, 이와 관련한 다수의 글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 발행했고, 또한 『대한협회보(大韓協會報)』 『기호흥학회보(畿湖興學會報)』 등에 논설을 발표한다. 1909년에는 친일조직인 일진회(一進會) 성토에 앞장섰다.

특히 중요한 것은 단재는 사학자로서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여 우리 민족 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라는 점이다.

필자가 단재 신채호를 무엇으로서 더 설명할 수 있을까? 광복된 우리나라에서 그의 업적과 정신을 파괴하여 온 일제의 식민사관과 그를 우습게 만들어 온 친일파의 황당사관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은 현대의 민족주의자들에게 주어진 민족적 지상 과업이다.

2. 소설 『상록수』의 작가 해풍 심훈

해풍(海風) 심훈(沈熏, 1901~1936)은 『상록수』, 『영원의 미소』, 『황공』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한때 영화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해풍 심훈은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고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귀국하여 연극과 영화, 소설 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 역으로 출연하기도 하였고, 1926년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 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원작을 집필하고 각색하였고, 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영화이다. 심훈의 영화제작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당하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당한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된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을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한다.

해풍 심훈은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한다.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하여 연재된다. 그는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한다.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 두 번의 연재 중단과 민족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지식인의 계급적 저항 의식과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 정신이 들어있으며,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 의식을 고취한다.

3. 소설 『임꺽정』의 벽초 홍명희

『임꺽정(林巨正)』 화적편3 속표지, 홍명희, 1948년 2월 15일, 을유문화사 발행. 크기; 18.4×12.9cm,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으로 다시 『조광(朝光)』에 옮겨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쓰여졌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의 북한문학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문학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겉 표지가 없는 책을 1985년 8월 5일자에 대구의 어느 고서점에서 낙질 1책을 매입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임꺽정(林巨正)』 화적편3 속표지, 홍명희, 1948년 2월 15일, 을유문화사 발행. 크기; 18.4×12.9cm,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으로 다시 『조광(朝光)』에 옮겨 연재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기에 쓰여졌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현대의 북한문학이라기 보다는 일제 강점기의 우리 민족문학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겉 표지가 없는 책을 1985년 8월 5일자에 대구의 어느 고서점에서 낙질 1책을 매입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일제 강제 점령 시기에 조선의 3대 천재로 손꼽힌 세 사람이 있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1968)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 그리고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이다. 이들은 두 살 터울로 태어났는데, 모두 문학에 소질이 있었다.

벽초는 『임꺽정』을 지었고, 육당은 최초의 신체시(新體詩)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잡지 『소년(少年)』 창간호(1908년)에 발표하였으며, 이광수는 수많은 작품을 발표한 일제 강점시기 문단 최고의 소설가이다.

그러나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일제의 회유에 친일파로 변절하지만, 벽초 홍명희만은 민족의 지조를 지키며, 일생 동안 소설창작, 언론활동, 정치활동, 독립운동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벽초 홍명희(洪命熹)의 장편 역사소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일보』에 1928년 11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연재되다가, 일제의 『조선일보』 강제 폐간으로 다시 『조광(朝光)』에 옮겨 연재했으나 미완성으로 끝났다. 미완성으로 끝난 부분은 화적편(火賊篇)의 마지막 일부로 작품 전체 분량에 비추어 대략 10분의 1 정도 분량에 해당한다.

『임꺽정』은 전체 구성이 「봉단편(鳳丹篇)」 「피장편(皮匠篇)」 「양반편(兩班篇)」 「의형제편(義兄弟篇)」 「화적편(火賊篇)」 등 모두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꺽정』은 광복 전에는 조선일보사에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4권으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광복 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역시 「의형제편」과 「화적편」 일부가 출간된 바 있다. 1992년 ‘사계절출판사’가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을 포함하고 광복 전에 간행된 단행본과의 대조 과정에서 발견된 누락 부분을 되살려 전체 10권으로 복간하였다.

벽초의 이 작품은 우리 근대 역사소설에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벽초는 첫째, 민중의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둘째, 당시의 상·하층에 걸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관습을 재현하고 있다. 셋째, 우리 고유어를 풍부히 되살려내고 있다. 넷째, 봉건적 요소에 저항하는 반봉건적 움직임의 강한 생명력을 드러내어 건강하고 낙천적인 민중 정서를 형상화하고 있다.

벽초 홍명희는 1948년 월북하여 9월 9일 북의 정부 수립시 부수상이 된다. 이후 그의 손자 홍석중(1941~ )에 의하여 미완성의 소설 『임꺽정』은 『청속골대장 임꺽정』(1985년)으로 완결된다. 우리 문학사에서 “벽초의 『임꺽정』은 민중 정서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역사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이 역사소설의 전통은 최근 황석영(黃晳暎)의 『장길산(張吉山)』이나 김주영(金周榮)의 『객주(客主)』 박경리(朴景利, 1926~2008)의 『토지』 등을 낳게 하는 밑거름”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4. 월탄 박종화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 1901~1981)는 창작 초기에는 현실과 거리가 먼 1924년의 처녀시집 『흑방비곡』을 발표했지만, 차츰 조선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관한 관심과 창작 욕구가 커지면서 시인 활동을 접고 소설가가 된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주제로 한 『금삼의 피』는 박종화의 첫 장편 역사소설로, 1936년 3월 20일부터 12월 29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되고 1938년 박문서관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그의 작품은 1940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하고 1942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를 그린 『다정불심』을 비롯하여 거의 다 역사소설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 문단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으로 인하여 순수문학이 크게 약화하여 있었고,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민간의 설화나 일부 가문에 전해오는 사찬 역사서를 제외한 국가의 역사기록, 즉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은 접근할 수 없으므로 국민의 역사의식이 약해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월탄은 일제강점기부터 우리 역사를 소설로 써냈고, 광복 이후에는 우리 문단에 역사소설을 부활시킨 대표적인 문학인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관찬 사서를 열람하기 힘들었던 당시에 나온 작품들이라, 고증이 잘못되었거나 잘못 알려진 사례를 그대로 인용하는 등의 오류가 일정 부분 있지만,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은 일제 치하에서 잊고 있었던 우리 역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월탄은 「금삼(錦衫)의 피」(1936)와 「대춘부(待春賦)」(1937)로부터 역사소설로 전환하였으며, 단편 「아랑의 정조(貞操)」 · 「전야(前夜)」(1940) 등과 장편 「다정불심(多情佛心)」(1940)을 잇달아 발표하여 역사소설 작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는 1942년에는 수필집 『청태집(靑苔集)』을 발간하였다.

광복 뒤의 감격과 흥분 속에서 쓰인 「민족(民族)」(1945)은 앞선 「여명」 · 「전야」와 함께 3부작에 해당하는 작품이고, 「홍경래(洪景來)」(1946)와 「청춘승리(靑春勝利)」(1947) 및 단편 「논개(論介)」를 통해서도 민족적 울분을 토하였다. 1954년 서울신문사 사장을 사임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쓰기 시작하면서 전란과 공무로 잠시 중단되었던 창작 생활을 다시 계속하였다.

월탄은 「임진왜란」을 『조선일보』에 전 946회 연재하였고, 단편 「황진이(黃眞伊)의 역천(逆天)」(1955)과 장편 「벼슬길」(1958)·「여인천하(女人天下)」(1959) 등을 거의 같은 무렵에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다. 1961년에 회갑 기념으로 『월탄시선(月灘詩選)』을 출간하였다. 다음 해 『조선일보』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부산일보』에 「제왕삼대(帝王三代)」를 각각 연재하였고, 1964년 「월탄삼국지(月灘三國誌)」를 『한국일보』에 4년에 걸쳐 연재하였다.

그 뒤 수상록 『달과 구름과 사상(思想)』을 출간하였다. 1965년 「아름다운 이 조국(祖國)」을 『중앙일보』에, 1966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을 『부산일보』에 연재하였다. 칠순을 맞는 1970년 제3 수필평론집에 해당하는 『한자락 세월(歲月)을 열고』와 기념 사화집(詞華集) 『영원(永遠)히 깃을 치는 산(山)』을 내놓았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신문소설 사상 2,456회라는 최장기록을 남겼다. 그 뒤 발표한 수상록 『화음 · 격음(和音 · 激音)』과 회고록 『역사(歷史)는 흐르는데 청산(靑山)은 말이 없네』 등은 그의 문학적 생애를 증언하여준다.

1920년대 낭만주의 시인으로 출발했던 월탄은 시대고인 고독과 절망, 좌절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1930년대의 식민지 현실에서의 이상 추구를 역사소설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이나 민족혼을 부각하는 데 주력하였다. 월탄은 대단한 역사소설가이다. 월탄 박종화는 빙허 현진건과 사돈이기도 하다.

5. 맺음말

필자는 2022년 10월에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 제24회 연재에서 「포천 출신의 계몽기 신소설가 동농 ‘이해조’를 기억하라」를 다루었다. 그리고 지금 연재하는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의 제7회 연재 「소설가 빙허 현진건 80주기에 역사유적기행문학을 생각한다」에서는 빙허 현진건(玄鎭健)을 다룬 바 있고, 이후 제46회 연재 「육사와 만해의 순국 80주기에 부쳐」에서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상화(尙火, 想華) 이상화(李相和),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 해환(海煥) 윤동주(尹東柱) 등 네 분을 다룬 바 있다.

이제 이번 제52회 연재에서는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해풍(海風) 심훈(沈熏),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와 월탄(月灘) 박종화(朴鍾和)를 다루었다. 즉 필자는 2022년 10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이해조 현진건 한용운 이상화 이원록 윤동주 신채호 심훈 홍명희 박종화 등 근·현대의 문인 열 분을 민족 지조를 지킨 문학가로 언급한 것이다.

근·현대의 우리 문학사에 많은 시인과 소설가 등등의 문인들이 나왔으나, 민족 지조를 지킨 분은 많지 않다. 물론 민족 지조를 지킨 문학인이 더 있으나, 일제 식민지 시대에 지조를 지키고 더 나아가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문학인들은 많지 않다. 이에 필자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보다 이들에게 더 애착을 갖는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