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던 세상이
다시 뒤집어지는 반전이 계묘년 끄트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갑진년 봄에 결실을 맺는 위대한 반전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새아침이 오는 것을 거부하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이들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찬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갑진년 한 해는
그야말로 값진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갑진년에는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고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 1.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형수가 편의점주가 된 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신돌석씨는 형수를 거의 1년에 한 번 정도 만났다. 대부분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연말 송년회였다. 어느 때는 한 해를 전혀 못 본 때도 있었다. 24시간 영업을 하면서 아내와 둘이 하려고 하니 밖에 나올 시간이 없었다. 대학 다니는 아들한테 부탁해서 연말 송년회 때 하루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마저도 안 되고 그 해는 거를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 유행 이전에는 알바를 고용하였다. 그때 최저임금 만원 이야기가 나오고 자영업자 다 죽는다는 비판도 나왔다. 형수는 자영업자이지만 최저임금은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친구들 모인 자리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편의점주들 때문에 최저임금을 인상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과장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현재 여건에서 그 이상을 혼자서 줄 수는 없지만 본사가 가져가는 것을 알바 임금으로 돌릴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팬데믹이 되면서 알바를 고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끼고 있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술을 마시거나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도 끊어지다 보니 정말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 기간을 아내와 둘이서 버티면서 살았다. 코로나19가 끝났지만 알바를 다시 고용할 엄두가 안 났다. 매출도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서 경제는 정말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형수의 말이었다.

송년회는 대체로 중국집에서 했다. 당산역 부근에 있는 곳에서 하다가 최근에는 광화문에 있는 곳에서 했다. 고등학교 동창 중에 이렇게 계속 모이는 친구들도 드물었다. 모두 11명인데 송년회 날에는 거의 대부분 나왔다. 그때마다 옛날 이야기들을 많이 했다. 고등학교 때 중국집에서 고량주 마시면서 담배 피우던 이야기도 했다. 그때는 짜장면에 군만두 놓고 그 독한 고량주를 마셨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아하다고들 했다. 신돌석씨 생각에도 그랬다.

고등학교 졸업한 뒤에는 종로에 있는 다방에서 주로 만났다. 전통미가 넘치는 다방이었다. 얼마 전에 지나가다 들렀더니 현대식 카페로 변해 있었다. 이름은 그대로였다. 매주 만났던 것 같다. 그리고 안국동에 있는 막걸리집에 갔다. 주인아줌마가 꽤 괄괄한 사람이었다. 물론 신돌석씨는 매주 볼 수는 없었다. 당시에 공장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대학 들어간 친구, 재수하는 친구들이었는데, 신돌석씨만 직장을 다녔는데 한동안 그냥 재수한다고 이야기했다.

그 친구들이 모임을 안 하게 된 것은 군대 때문이었다. 하나 둘 군대를 가기 시작했다. 신돌석씨는 늦게 군대에 갔지만 다치기도 하고 친구들도 안 나오기 시작해서 점점 친구들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형수도 마찬가지였다. 형수는 큰 수술을 여러 번 해서 군대에 가지 않았다. 늦게 대학에 들어가서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만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만나게 된 것이 1990년 연말에 신돌석씨가 조직 사건으로 수배되었을 때였다.

조직 사건이 터지고 조직에 속했던 사람들은 다들 흩어졌다.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아내와 어떻게 연락을 취해 보니 경찰이 직접 찾아오지는 않았는데 집 앞에 수상한 세단이 서 있으니 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다 보니 갈 데가 없었다. 약속을 정해 놓고 함께 보기로 했는데 10분이 지나도록 한 사람이 안 와서 바로 흩어졌다. 2차 약속까지 하루를 어디서 견뎌야 했다. 그런데 정말 단 하루를 잘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눈 내리던 날이었던 것 같다. 버스 정류장에서 눈을 맞으며 서성이는데 누가 툭 친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혹시라도 짭새인가 하고 치고 튀자는 생각을 하며 돌아봤는데 뜻밖에도 형수였다. 돌석아 오랜만이다. 그러더니 자기네 집에 가잔다. 형수는 신돌석씨가 수배된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신돌석씨는 그 무시무시한 대공분실에 수배되었었다. 그런데 친구 중 누구한테 그들이 찾아간 모양이고 그것이 친구들 사이에 이야기가 되어서 아는 듯했다.

그때 신돌석씨는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드러나게 찾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수배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저들도 힘에 겨울 정도로 많은 수의 노동자, 학생들이 수배되던 때였다. 그래서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신돌석씨는 들어가야 별로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걸 노리고 안심시킨 뒤 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도 있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형수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자기네 집에 가는 버스를 타자고 하였다. 그래서 참으로 요행이다 싶을 정도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형수네가 짭새들의 감시 반경은 아닌지 걱정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형수네 집은 버스 종점이었다. 마지막 내릴 때 신돌석씨와 형수, 그리고 학생인 듯한 여자 하나가 있었다. 그 여자가 먼저 내리면서 앞서서 자기 갈 데로 가니까 미행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았다.

형수네 집은 2층집이었다. 고등학교 때 갔던 집과 구조가 비슷한데 물론 다른 집이었다. 들어가기 전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가 없는지 형수가 한번 둘러봤다. 형수의 배려가 고마웠다. 사실 신돌석씨를 잡으려고 형수네까지 와서 잠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매사에 조심하는 것이 좋은 일이지. 2층에 형수 방이 있었다. 조용히 형수 방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꽤 늦기는 했지만 아무도 부딪히지 않았다.

형수 방에는 고등학교 때 그랬듯이 전축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지 않고 오디오라고들 부르는 것이었다. 형수가 이미 한잔 마신 상태인데도 맥주를 들고 왔다. 형수는 수술한 뒤 독한 술은 마시지 못해서 이전에 볼 때도 맥주를 마시곤 했었다. 신돌석씨도 한잔 마신 상태지만 별로 많이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형수가 자기 사는 이야기를 했다. 그때쯤에는 친구들 대부분이 결혼했는데 아직 미혼이라고 하였다.

노래를 틀었다.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야’였다. 형수가 말했다. 우리가 먹고 사느라고 바빠서 결국 노태우 정권을 인정하고 살 수밖에 없는데 돌석이 너는 그래도 일편단심으로 싸우고 있구나. 그러면서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같이 부르자고 하였다. 신돌석씨도 은근히 술이 올라오기 시작해서 함께 불렀다. 그러다가 어깨동무를 하고도 불렀다. 나중에 노래방에 갈 때만 되면 형수는 신돌석씨에게 이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하곤 하였다.

노래를 하다가 별안간 전화를 걸었다. 신돌석씨는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다가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됐다. 신돌석씨의 표정이 걱정스러워하는 것 같았는지 형수는 친한 친구들한테 하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도청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은 빼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전화를 도청해서 검거하는 수법도 쓴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형수가 전화 건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형수네 반 반장을 한 적이 있는 친구인데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경제부처에 근무하는 고위공무원이었다. 형수와는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다고 하였다. 아무리 도청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고위공무원한테 전화를 거니 식겁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더니 신돌석씨를 바꿔 주었다.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안부만 묻는 식으로 하고는 끊었다.

형수는 신돌석씨가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전화는 하지 않았다. 사실 신돌석씨의 걱정이 과대망상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형수 말로는 밤마다 친구들한테 열 통 이상 전화를 한단다. 그만큼 아는 친구들이 많았다. 동창 소식은 형수한테 물어보면 된다고 할 정도였다. 다른 반 반창회에도 자주 가서 그 반 애들이 형수가 자기네 반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 형수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서 친구들을 못 만나게 된 것이었다.

사실 편의점주처럼 자영업자이면서도 본사에 종속되어 있는 직종은 단지 편의점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프랜차이즈라는 미명 아래 묶여 있는 브랜드가 7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자영업자이면서도 종속되어 있다. ‘종속된 자영업자’라는 것은 ‘검은 백마’처럼 모순되는 말이다. 이들은 자영업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율이라는 것이 사실상 없다. 그러면서도 노동자로서 보호를 받지 못한다. 미숙련 업종일수록 더욱 그렇다.

형수 말대로라면 밤 9시쯤 출근한단다. 그때까지 거의 아내가 가게를 지킨단다. 청소를 하고 물건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밤샘 노동이 시작된다. 자영업자라고 하면서도 자기 가게의 물건값을 정하지 못한다. 본사가 정한다. 어떤 물건을 들여놓을지, 어디다 배치할지도 사장인 자기가 결정하지 못한다. 그 모든 것을 본사가 정해주는 대로 해야 한다. 그걸 어기면 위약금을 물거나 계약이 해지된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옛날 동네 가게 아저씨처럼 술 먹고 낮에 퍼질로 자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형수도 처음에는 지루하고 힘이 들어서 캔맥주를 홀짝홀짝 마시기도 했단다. 그러다가 본사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경고가 들어왔고, 아내한테 혼이 난 뒤에는 마시지 않는단다. 너무 피곤하면 냉장식품들을 진열한 곳 뒤에 창고가 있는데 거기서 잠깐씩 쉬곤 했단다. 그런데 기온이 낮은 곳이었다. 그것이 그렇지 않아도 건강하지 못한 몸을 더 나쁘게 했다고 형수는 말했다.

신돌석씨는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영업자들을 소자산가, 쁘띠부르주아라고 배웠다. 이들은 자기 자본을 갖고 있지만 남을 고용하지 못하고 자기 노동력으로 살아가는 계급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농민이었는데 자본주의화가 진척되고 도시화가 되면서 도시 자영업자들이 대표적인 직종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속성을 모두 갖고 있는데, 노동자와는 달리 자율성이 있기 때문에, 자기 노력 여하에 따라 부르주아로 상승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현실적으로는 그건 거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야 했고, 자율성은 굶어 죽을 자유까지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동요하는 계급이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이 견인하면서도 그들의 변심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프랜차이즈라는 명목으로 묶여 있는 자영업자들에게 자율성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아무것도 자기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면서 묶여 있는데 자본가로 상승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노동자계급은 여전히 비참하고 힘든 상황이지만,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노동법이다. 그리고 단결의 무기인 노동조합이다. 그런데 노동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하는 5인 미만 사업 노동자들이 있고, 노동조합의 조직과 투쟁은 끊임없이 방해를 받고 있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는 요원하기만 하다. 그것이 되어야만 실질적인 노동자계급의 처지 개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달성되기도 전에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가 탄생했다. 바로 자율적이라면서도 종속적인 노동자이다. 이것을 이론가들은 ‘은폐된 고용’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니다. 미국, 일본, 서유럽 등에서 벌써부터 만연되어 있다. 그 중에서 자영업자의 확산은 우리나라가 그 정도가 가장 심하다. 우리나라의 자영업자의 비중은 전체 취업자의 25%에 달한다고 한다.

자영업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IMF사태 이후라고 하는데 기업들의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자영업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IMF사태를 극복한 뒤에도 기업들은 다시 그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았다. 노동자에서 실업자로 변한 그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하고 먹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택하는 것이 자영업이다. 그 조짐은 IMF사태 이전부터도 있어 왔다. 그러다가 IMF사태 이후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1980년대부터 비디오가게, 김밥집 등이 한창 유행했다. 그 뒤 편의점, 치킨집, 피자집, 갖가지 식당, 카페 등이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자영업의 비중도 그렇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5년 내 폐업하는 자영업이 48%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돈을 벌려면 인테리어사업을 하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가 멀다고 문 닫는 가게들이 있으니, 일거리가 계속 있다는 이야기다. 신돌석씨 동네에도 거의 끊이지 않고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상점들이 있다. 웃픈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자기가 자영업을 선택했으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자영업자도 투자를 한 사람인데 자본주의사회에서 흥하든 망하든 투자한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형수는 그런 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책임을 져서 했으면 좋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데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냐. 그야말로 자율적 종속성이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는 노동시장을 건전하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하는 가운데 새로운 착취의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자영업을 통한 것 아닐까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이런 이야기를 형수와 나누고 싶었지만 제대로 하지는 못했다. 형수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신돌석씨 자신이 정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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