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갑진년에도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던 세상이
다시 뒤집어지는 반전이 계묘년 끄트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갑진년 봄에 결실을 맺는 위대한 반전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올해도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새아침이 오는 것을 거부하며 거부권을 남발하는 이들을
거부하는 이들의 힘찬 아우성과 몸부림으로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갑진년 한 해는
그야말로 값진년이 되리라 믿습니다.
갑진년에는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고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 건강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4. 1.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 동네에 편의점이 새로 생겼다. 신돌석씨 동네라 하면 대로에서 꺾어져 들어와 마을버스만 다니는 곳을 일컫는다. 마을버스가 다니는 양쪽 길로 상점이 죽 늘어서 있는데 거기에 편의점이 무려 세 곳이나 있고, 나들가게라고 하는 가게들이 세 곳이 있었다. 길가 양쪽 뒤와 로터리가 있는 위쪽으로 집들이 적지 않게 있기는 하지만 가게가 이렇게 여러 곳 있는 것은 누가 보아도 많았다. 그런데 하나가 더 생긴 것이었다.

새로 생긴 편의점은 나들가게 하나가 문을 닫고 편의점으로 바뀐 것이었다. 주인도 바뀌었다. 원래 가게는 온 식구가 가게 일을 하였다. 주인 부부, 아들, 며느리까지 친절하고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신돌석씨는 그 가게를 잘 다녔었다. 물론 집에서 거리도 제일 가까웠다. 3년 정도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분위기가 이상하더니 끝내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한 달 정도 비어있다가 편의점이 들어섰다. 그래서 편의점이 이 동네에 네 개나 된 것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원래 이 동네에 편의점이 네 곳이었는데 대로 쪽으로 세 곳이 아주 근거리에 있었다. 그중 한 곳에 ‘여기서 가게 새로 하실 분 있으면 말립니다. 제발 하지 마세요. 모두 죽어요. 정 하시겠다면 제가 그냥 이곳에 하시라고 내놓겠습니다.’라는 안내문이 문 앞에 붙었다.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하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심드렁했다. 그 편의점은 결국 문을 닫았다.

이번에 새로 생긴 편의점도 그곳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는 유지되는 것 같았다. 밤 늦게 가보면 70이 넘은 것 같은 할머니가 있었다. 조금 걱정되었다. 아내도 거기를 다녀와 보고는 할머니가 무섭지 않을까 하고 걱정 어린 말을 했다. 몇 차례 가보니 젊은 남자가 같이 할 때도 있었는데 주로 그 할머니가 가게를 지키곤 했다. 손님이 드문드문 오니까 할머니는 무료한지 핸폰에서 동영상을 틀어놓고 보곤 하였다.

신돌석씨는 그 편의점을 드나들면서 다른 지역에서 편의점을 하고 있는 친구가 생각났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있고, 아직까지도 연락이 되어 가끔 만나는 친구였다.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였는데 어느 날부터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알고 보니 편의점을 해서 시간 내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편의점 경영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길 아닐까 생각했었다. 건설현장이나 공장처럼 위험하고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를 보면 허구한 날 대낮에 막걸리 마시고 늘어져 잤다. 다른 집 사람들은 주로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고생했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신선놀음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 집 아줌마가 대신 가게를 보는 일이 잦았고, 아들이나 딸이 가게에 나와서 보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세상 편한 직업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돈을 못 버는지는 몰라도 동네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궁색한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친구한테 들어 보니 옛날 구멍가게와 편의점을 똑같이 생각하는 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일이었다. 편의점이란 것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정확하지 않다. 30년쯤 전에 아는 후배 하나가 편의점을 냈다고 개업식을 한다고 해서 간 기억이 났다. 그 후배는 교정 공무원이었는데 하루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쉰다면서 이른바 투 잡으로 그걸 하겠다고 했다. 마누라와 둘이서 교대하면서 알바를 쓰면 된단다.

그때만 해도 편의점이 생소했고, 일본 기업의 프랜차이즈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동네도 아니고 해서 개업식 이후로 가보지는 못했는데 뭔가 새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었다. 24시간 영업을 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도 않고, 본사에서 하도 간섭을 많이 해서 할 수가 없더란다. 그것 때문에 마누라와 싸움도 잦아져서 결국 때려치웠는데, 위약금을 어마어마하게 물었다면서 투덜댔다.

그리고 어느새 편의점에 아주 익숙해졌다. 편의점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곳이 아니라, 2차 혹은 3차를 하는 곳으로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관심을 안 두고 살았는데, 어느날 보니 친한 친구가 편의점 점주가 된 것이었다. 이 친구 이름은 이형수였다. 처음에 개업할 때 가봤는데 친구들이 다들 축하하였고, 본인도 열심히 해보면 뭔가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런데 그 뒤 형수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형수는 학교 다닐 때 꽤 부유한 편이었다. 그 친구 집에 놀러가서 2층에 있는 방에 들어가 전축을 들으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에 담임 선생이 과외를 하라고 했는데 안 해서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고 시달렸다는 것은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다. 종로구에 있는 초등학교를 나왔는데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라고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에는 좀 산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로구에 살았었다.

신돌석씨는 그 초등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이름은 굉장히 많이 들었었다. 5학년 때 담임선생이 거기 있다가 왔는데 그 학교와 신돌석씨 학교를 비교하면서 불만을 털어 놓는 것을 수도 없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교 애들은 다 경기 서울 가는데 여기 애들은 똥통학교나 다닌다면서, 사업에 망하거나 실직하고 이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이런 동네라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어린 나이에도 정말 화가 났다. 선생이 애들한테 할 말인가.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60대 중반이 되다 보니 어쩌다 자신은 그런 동네에만 사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리고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다. 형수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형수는 종로구 한복판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지만 그 뒤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중년 이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게 형수의 탓은 아니다. 게을러서도 방탕해서도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사회 탓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형수는 많이 말랐고, 키까지 작아졌다. 원래 마른 체격이었는데 더 말랐다. 키가 작아진 것은 신돌석씨의 착각인 줄 알았는데 본인이 그렇다고 한다. 그 동안 왜 얼굴 보기 힘들었냐고 하니까 감옥 생활에서 1년 만에 나왔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진짜 감옥에 갔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떤 의미인지 다들 어리둥절했다. 그의 말로는 창살없는 감옥에서 1년 동안 살다가 간신히 휴가 받아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창살없는 감옥이 무엇이냐? 어디 아팠냐? 아니면 제수씨가 아프냐? 물정 모르는 친구들이 이런 질문들을 던지자 편의점 점주 생활, 그것이 바로 창살없는 감옥이라고 대답했다. 말을 하는 형수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다들 무슨 말인지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다. 편의점 점주면 이전으로 치면 가게 주인이고 자영업인데 무엇 때문에 감옥생활처럼 해야 된다는 것인가? 어렸을 때 가게 주인처럼 그냥 문 닫고 쉬면 안 되나 하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편의점이 그냥 가게와 다른 점이 있다면 24시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4시간 영업을 하지 않으면 본사에서 제재를 받아야 한다. 경고에서부터 위약금, 심지어 계약 해지까지 당할 수 있단다. 물론 공정거래위에서 강제로 시키지 말라는 결정이 내려져서 계약할 때 24시간과 17시간 중에서 선택을 할 수 있기는 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 24시간을 선택한다. 더욱이 형수가 처음 시작할 때는 그마나도 없어서 24시간 영업이 강제였다.

그날 형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형수는 비교적 잘 사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후에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그 첫 번째 계기가 생각지도 못한 병환이었다. 형수는 공부를 썩 잘하지는 않았었다. 중학교 때는 전교 10등 안에 들었다고 본인이 말하는데 하도 그런 애들이 많아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무난히 들어갈 정도는 됐었는데 그만 예비고사 보기 며칠 전에 맹장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재수를 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가슴과 배에 칼자국이 나 있는데 그것이 때로는 괜찮게 쓰인 적도 있다고 한다. 진짜인지 농담인지는 모르겠는데 편의점을 하다 보면 밤중에 술 취한 인간들이 와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있단다. 그럴 때 웃통을 딱 벗어주면 그냥 조용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애환도 있구나 생각하니 쓴웃음이 났다.

지쳐 있는 듯하다가도 형수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원래 개그맨 기질이 있어서 좌중을 앉혀 놓고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형수 하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고2 때 해운대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호텔 앞에서 있었던 장기자랑 때 평안도 사투리를 써가며 ‘밤을 잊은 인민에게’라는 개그를 했던 일이었다. 그때는 개그라는 말은 안 썼던 것 같은데 아무튼 형수가 당시 노래들을 북한식으로 바꿔서 순위를 매겼는데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런데 서울에 올라와서 당시 학생주임이 이걸 두고 화를 내면서 그런 코메디를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지금처럼 안보가 엄중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해 농담을 해서 되겠냐는 것이었다. 아마도 형수가 단단히 혼이 났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도 못하나? 재미있기만 한데 무엇이 문제가 되나? 당시에는 세대차가 그렇게 난 것 같고, 그 중에서도 경직된 사람들이 목소리를 크게 내던 때였다.

나중에 그 생각을 하면서 신돌석씨가 처음 노조를 만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사장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이 부장이고, 작은아들이 과장이었다. 그걸 보면서 신돌석씨가 속해 있던 프레스반 사람들이 큰아들을 정일이, 작은아들을 평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노조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해고된 뒤에도 무심코 그런 말들을 하다가 지역 해고자한테 심한 비판을 받았다. 남북의 화해가 중요한 때에 그런 식으로 북을 희화화해도 되냐는 것이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신돌석씨가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별로 좋은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농담식으로 이야기한 것을 두고 북을 희화화한다는 둥 하는 것은 심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경직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신돌석씨는 북을 비난하든지 아니면 조금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만 강제받아온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대학에 단번에 들어가지는 못했어도 형수는 결국 대학에 들어갔고, 당시에 대학에 다녔던 사람들 대다수가 그랬듯이 안정적으로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신돌석씨 또래가 대기업에 들어갔을 때는 안정적으로 정년까지 보내는 것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경제 성장이 더디어지면서 기업에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사원들을 정리해고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정년까지 다닐 수 있다는 기대는 극소수 간부급에 해당되었다.

형수를 스트레스 받게 만든 것은 형제들이 모두 일류대학 출신이고, 중산층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산다는 것이었다. 막내였던 형수는 학교도 일류를 다니지 못했고, 회사도 중도에 그만두게 되니 여러 가지 눈치를 받고, 집안에서 천덕꾸러기처럼 되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사업을 해보거나 아니면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보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동창 중에서 당시 IT사업에 뛰어들어 재미를 보던 박성환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기서 일할 때가 가장 좋았다고 형수는 말했다. 박성환 바로 밑에서 2인자로 일했는데 회사 내부 일은 거의 맡아서 하였다. 사원 근태에 관한 것은 오로지 형수가 알아서 하는 일이었다. 워낙 친하기도 했고 박성환이 넉넉한 성격을 가진 인품이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친구가 한 사업체에서 일하면 의리마저 손상된다고들 하는데 전혀 그럴 일이 없었다.

그런데 그만 사고가 났다. 협력업체라는 형식을 갖고 있지만 사실상 더 많은 주식을 갖고 있어서 본사와 마찬가지이던 대기업이 결국 박성환을 그만두게 하였고, 형수도 따라서 그만두게 되었다. 형수 생각으로는 사고가 난 것은 구실이고, 사실은 다른 협력업체에 비해 좋은 근로조건 유지를 고집하는 박성환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박성환은 그 뒤 사업할 때부터 후원하던 시민단체에서 일했고, 지금은 거기 대표로 일하고 있다.

박성환의 회사에서 2인자로 있다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니 막막했다. 박성환이 퇴직금은 두둑히 주었다. 그때 이미 나이가 50줄에 접어들었고, 새로 취직을 하기도 힘들었으며, 그렇다고 사업을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뒤 몇 년 동안 방황하다 편의점 점주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창살 없는 감옥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형수는 말했다. 그런 말을 한 때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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