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 초기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판본들 가운데 권제3의 말미(末尾)에 “황진손서(黃振孫書)”라고 필서자(筆書者)를 밝히고 있는 고본(古本)이 있다. 그러나 황진손에 대한 인적 사항은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를 규명하는 일은 이 판본의 츨판 연대와 가치를 규명하는 일이기도 하기에 황진손에 대하여 탐색하고자 한다,

1. 황진손에 관한 『세조실록』 기록

황진손(黃振孫)은 『조선왕조실록』에 단 한 곳 나온다. 『세조실록』 권2, 세조1년(1455년) 12월 27일 무진(戊辰) 3번째 기사이다. 이 기사는 수양대군이 1455년 9월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데 공을 세운 신하 44명을 ‘좌익공신(佐翼功臣)’으로 녹훈하면서, 원종(原從)한 사람들을 원종공신에 올리도록 한 기록이다.

세조가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 1415~1462, 세종의 부마) 등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할 때 “권지 훈련녹사 황진손(權知 訓鍊錄事 黃振孫)”을 포함하였다. 즉 황진손은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다. 그런데 훈련녹사(訓鍊錄事) 직위에 권지(權知)를 붙인 것으로 보아 그의 훈련녹사 직위는 임시직위였다. 1455년 9월에 황진손이 ‘좌익원종공신’에 녹훈된 것은 그의 생존연대에 관한 가장 절대적인 기록이다.

2. 황진손과 우주황씨 가문

황진손은 『우주황씨족보(紆州黃氏族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주황씨족보』에는 그의 벼슬이 ‘참군(參軍. 7품직)’이며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贈職) 받았다는 것과 그의 아내 순흥안씨(順興安氏)의 부·조·외조만이 기록되어 있다.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묘소는 없는 것 같다.

족보에 의하면 황진손은 우주황씨 12세(世)인데, 그는 조선초기의 명인(名人) 황거중(黃居中, ?~?)의 손자이자 황균(黃均, 1388~1445)의 아들이다. 족보에 의하면 황균은 홍무(洪武) 무진생(1388년)이며 세종(世宗) 을축졸(1445년)이다. 또한 황균에게는 장손(長孫) 명손(明孫) 진손(振孫) 등 세 아들이 있는데, 황진손은 그의 셋째 아들이다.

그리고 황진손의 증손자는 좌의정을 지낸 황헌(黃憲, 1502~1574)이다. 황거중으로부터 황헌에 이르기까지의 6대 동안 생졸년이 분명한 인물은 황균과 황헌뿐이다. 즉 1388년생인 황균과 1502년생인 황헌 사이, 즉 114년 사이에 황진손 황인(黃璘) 황유조(黃胤祖)가 태어난 것이다.

114년간 4대가 출생했다면 1대가 평균 28~9세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황진손은 황균의 삼남(三男)이지만, 황진손으로부터 황헌까지는 모두 장남(長男)이다. 조선시대에 장남이면 부자간 연령차가 대체로 최소 15세부터 25세 정도였다. 황진손으로부터 증손자 황헌까지 부자간의 연령차를 28세로 보면, 삼남인 황진손과 그의 부친 황균은 30~32세 정도의 연령 차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균이 1388년생이므로 황진손은 1418년부터 1420년사이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유추하였을 때 황진손은 1418년부터 1420년(세종초) 사이에 태어나서 세조 때 활동한 인물로서 그가 ‘좌익원종공신’이 되었던 1455년에 32~35세쯤 되었을 것이다. 황진손이 “‘좌익원종공신’이었다”는 것은 그가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편에 서서 단종(端宗, 재위 1452~1455)을 몰아내는데 적극 가담하였다는 의미이다.

3. 황진손과 『묘법연화경』 권제1~3

조선초기에 출판된 수십(數十) 종의 『묘법연화경』은 성달생(成達生, 1376~1444, 성삼문의 祖)과 그의 삼남 성개(成槪, ?~1440)가 쓴 서체(書體)를 저본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부가 황진손 서체로 된 간년(刊年) 미상의 『묘법연화경』 권제1~3이다. 성달생이 고려시대에 태어난(1376년) 인물이라면 황진손은 위에서 논증한 대로 대체로 1418년부터 142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황진손은 세종조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서지학계에서 이 황진손 서체본은 “세조~성종 연간(1455~1494)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하여 왔으나, 황진손 가문의 계대를 미루어 보아 성종 연간까지로 간행시기를 늦추어 보기에는 무리가 크다. 황진손 서체의 ‘『묘법연화경』 권제1~3’은 성달생이 사망한 1444년 이후에…. 그것도 세조(世祖, 재위 1455~1468)가 왕에 오르던 1,455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런데 황진손의 조부 황거중은 이성계(李成桂)의 황산전투(荒山戰鬪)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정당문학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부양하는 것을 제일 우선책으로 삼아 주·군에 교수·훈도를 둘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은 척불(斥佛)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러한 황거중의 손자 황진손이 조부의 뜻과는 달리 『묘법연화경』 권제1~3의 판하서(板下書)를 쓴 것이다.

4. 황진손 『묘법연화경』 권제1~3의 서지 사항

『묘법연화경』 권제1과 권제3의 각 시주기 부분, 목판본, 3권1책, 백민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1과 권제3의 각 시주기 부분, 목판본, 3권1책, 백민본. [사진 제공 – 이양재]

본 연구에 저본으로 한 백민 소장의 황진손 서체본 ‘『묘법연화경』’ 3권1책(이하 백민본), 권제1의 마지막 장(장63)과 권제3의 마지막 장(장59)에 시주기(施主記)가 있다. 이 책은 본문의 한 면이 10행20자로 사주단변(四周單邊)이며 계선(系線)은 없다. 판심에는 권수와 면차를 적었다. 이 백민 소장본의 중요성은 ‘먹으로 구결과 글자의 뜻을 한글로 적어 넣어 조선전기의 문자의 쓰임새 연구에도 중요한 참고 자료로 평가된다’라는 데 있다. 지질은 조선초에 성달생 판하서본 『묘법연화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세종~세조조에 불서 인출에 흔히 사용된 아주 미색(米色)의 엷은 인경지(印經紙)를 사용하고 있다.

황진손 서의 『묘법연화경』은 현재 권제1~3까지만 발견되어 있고, 아직은 권제4~7까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책은 대체로 성달생 서체의 『묘법연화경』 권제4~7, 4권1책과 함께 짝을 이루어 나오며, 현재 황진손 서체의 『묘법연화경』 권제4~7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황진손 서체의 『묘법연화경』 권제4~7은 간행한 적이 없을 수도 있다. 즉, 이 판본은 『묘법연화경』 전7권 가운데 권제1~3, 3권1책만 전하는 결본이기는 하지만, 고려말 조선초의 명필가(名筆家) 성달생의 서체를 바탕으로 새긴 『묘법연화경』 7권2책과 구별되는 조선초기의 독자적인 판본이다.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묘법연화경』 권제3 시주기,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793호, 일괄하여 지정한 오대산 상원사본.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진 제공 – 이양재]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묘법연화경』 권제3 시주기,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793호, 일괄하여 지정한 오대산 상원사본.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사진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사진 제공 – 이양재]

현재 이 판본의 국가지정문화재로는 평창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上院寺木彫文殊童子坐像腹藏遺物, 보물 제793호, 이하 상원사본) 가운데 한 책(3권1책)이 끼어 있으며, 또한 보물 제1153호(한솔제지박물관 소장, 이하 힌솔본)로도 3권1책이 지정되어 있다. 그 동안 이 두 점이 동일한 판본으로 알려져 왔으나, 이번 연구에서 검토한 즉 상원사본과 한솔본은 동일 판본이 아니다. 오히려 상원사본과 백민본은 동일 판본이다.

『묘법연화경』 권두 서문,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1153호, 한솔본. 인쇄된 상태를 보면 15세기 말의 후쇄본이다.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두 서문,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1153호, 한솔본. 인쇄된 상태를 보면 15세기 말의 후쇄본이다.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3 시주기,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1153호, 한솔본.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묘법연화경』 권제3 시주기, 목판본, 3권1책, 보물 제1153호, 한솔본. 사진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 – 이양재]

한솔본의 시주기는 상원사본과 백민본의 시주기와 다르다. 한솔본은 권제3의 끝에서 황진손이 글씨를 썼음을 밝히며 첫 번째 행의 인물이 “옥룡사대사신민(玉龍寺大師信敏)”이라 밝히며 시주한 사람 35인의 이름을 적고 있다. 반면에 상원사본과 백민본은 권제1과 권제3의 끝에 시주기가 있는데, 권제1 시주기 두 번째 행의 인물이 “전개천사대선사신민(前開天寺大禪師信敏)”이라 되어 있다. 이 글에 첨부한 시주기 사진을 참조해 보기를 바란다.

상원사본과 백민본에 나오는 개천사 대선사 신민과 한솔본 권제3의 시주기에 나오는 옥룡사 대사 신민이 동일인인지는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조선 명종(明宗) 21년(1556)에 승과(僧科)가 완전히 폐지되기까지 승과의 합격자에게 차례대로 대선(大選)·중덕(中德)이 주어졌고, 그 위로 교종승에게는 대덕·대사, 선종승에게는 선사·대선사의 법계가 주어졌다.

이에 따르면 개천사의 신민은 선종승(禪宗僧)의 최고 법계(法階)를 받은 승려이고, 옥룡사의 신민은 교종승(敎宗僧)의 최고 법계를 받은 승려였던 것으로 보인다. 개천사의 신민과 옥룡사의 신민은 법계가 같은 최고(最高)임에 따라, 이들은 동일인이 아닌 것 같다.

5. 문화재적 가치

따라서 한솔본과 상원사본·백민본 중 어느 판이 먼저 나온 것인지의 여부는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이 두 판본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간행되었을 것인데, 어느 한 판이 다른 한 판의 복각본일 수도 있어 두 판의 정밀 대비가 필요하다.

한편 상원사본과 한솔본은 저지(楮紙)에, 백민본은 미색(米色)의 엷은 조선초기의 인경지(印經紙)를 사용하고 있으며, 사주의 선과 글자의 모서리를 보면 백민본은 거의 초쇄본(初刷本)에 가깝고, 상원사본은 백민본 보다는 후쇄본(後刷本)이다. 즉, 백민본은 판각 초기의 인쇄본으로 상당히 양호하다.

백민본 『묘법연화경』의 조선전기 한글 현토 부분. 권1의 첫장 앞면(오른쪽)과 셋째장 앞면(왼쪽)의 부분 사진. 이 책에 현토는 구결과 한글로 달고 있다. 한글 현토를 한 책은 매우 드물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백민본 『묘법연화경』의 조선전기 한글 현토 부분. 권1의 첫장 앞면(오른쪽)과 셋째장 앞면(왼쪽)의 부분 사진. 이 책에 현토는 구결과 한글로 달고 있다. 한글 현토를 한 책은 매우 드물다. [사진 제공 – 이양재]

황진손 판하본 『묘법연화경』 권제1~3, 1책은 조선초기의 매우 희소한 불서로서 현재 다른 판본 두 종의 인쇄본이 각기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더군다나 백민본 3권1책은 구결(口訣) 현토(懸吐)와 한글 토(吐)를 부분적으로 기입하고 있어 주목된다. (필자는 이 책을 무상으로 양여하고자 신설 예정의 지자체 박물관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적절한 기증처가 나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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