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1993년과 1994년에 우리나라의 초상화에 관하여 각 한 편의 글을 쓴 바 있다.

①1993년 9월에는 「단원 김홍도의 초상화를 찾아서」를 탈고하여 월간 『미술세계』에 기고하였더니, 편집부에서 (1)과 (2)로 나누어 10월호 pp.160~163에 전반부를 게재하였고, 후반부는 두 달을 건너뛰고 이듬해 1월호 pp.138~143에 게재하였다.(그 사이의 11월호와 12월호에서는 필자의 다른 글 「혜원 신윤복을 찾아서」를 나누어 게재하였다.)

②1994년 7월에는 월간 『서화정보』 pp.105~108에 「15세기의 다섯 초상화와 초상화가에 대한 일 고찰」을 기고하였다.

또한 내가 ③2000년 4월 6일 자로 발행한 ‘고려미술연구소 뉴스레터 제1호’(총8면)에 게재한 글 「최경의 인생과 예술」은 15세기의 유명한 초상화가 최경(崔涇)에 관한 종합적인 연구이다. (이 글은 1997년 3월 30일 자에 탈고한 논고로 2000년 4월에야 공개하였다.)

이러한 초상화에 관한 세 편의 글은 매우 중요한 논고였으나, 최근에 나는 한 고문헌에서 「신숙주 초상화」의 작가가 최경(崔涇)이라는 기록을 보았기에, 글②와 ③의 논지를 수정하고자 한다.

1.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

「신숙주 초상화」, 최경, 1453년, 견본채색, 167㎝ × 109.5㎝. 1977년 11월 15일자 보물 제613호로 지정. 작가가 최경으로 규명된 이상, 국보로의 승격이 필요하다. 고령신씨 문중 소장. 사진 제공, 고령신씨 보학자 신경식.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숙주 초상화」, 최경, 1453년, 견본채색, 167㎝ × 109.5㎝. 1977년 11월 15일자 보물 제613호로 지정. 작가가 최경으로 규명된 이상, 국보로의 승격이 필요하다. 고령신씨 문중 소장. 사진 제공, 고령신씨 보학자 신경식. [사진 제공 – 이양재]

현동자 안견(安堅)과 인재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근재 최경(崔涇)은 세종~세조조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원화가(畵員畵家)이다. 이른바 이들을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로 칭한다. 하지만 안견이나 강희안의 작품은 전존하고 있는데 비하여, 최경의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 및 고증된 것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최경의 예술세계에 대해 깊이있게 고찰해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최경의 경우와 같이 전존작품이 거의 없는 화가들의 인생과 예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문헌을 찾아 분석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경의 경우 안견이나 강희안에 비하여 언급한 문헌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를 연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삼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세종~세조조의 회화사가 올바르게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최경에 대해 안휘준(安輝濬)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5세기에 활동했던 화원(畵員)으로는 산수의 제1인자였던 안견(安堅), 인물화의 제1인자 최경(崔涇), 산수와 인물을 모두 잘 그린 배련(裵連)과 안귀생(安貴生)‥‥‥”(p.127) “최경은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보면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과 북송의 이공린(李公麟)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전혀 없어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p.128) “15세기의 화단에서 안견에 버금가는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은 선비화가 강희안과 인물화를 전문으로 그렸던 화원 최경일 것이다. 안견과 이 두 사람은 족히 조선 초기의 3대가(三大家)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경은 북송대(北宋代) 이용면(李龍眠)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구체적인 논의를 할 수 없다.”(p.135) / 안휘준,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 일지사 발행.

즉, 우리 회화사에서는 최경이 인물화에 능하다는 것으로, 그가 인물화만을 그린 양 축소 평가한 감이 있다.

반면에 김용준(金瑢俊: 1904-1967년)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편으로는 초기에 있어서도 北畵風의 그림이 성행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남북화를 혼합한 화풍과 純南畵系의 그림도 행하였다. 安堅 崔涇 姜希顔 李上佐 李楨 金明國 같은 이는 북화산수로 유명하였고‥‥‥”(p.213) “초기의 三大家는 安堅 崔涇 姜希顔이니‥‥‥, 崔涇은 安堅과 함께 명성이 높은 화원으로 산수 외에 인물도 入神한 작가이며 나이 70이 넘도록 筆力이 쇠하지 않았다 한다. ‥‥‥(중략)‥‥‥ 이 三大畵家는 中國 北畵派의 거장인 馬遠과 夏珪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들이나 세 사람의 특색은 각기 다르다.”(p.214) / 김용준, 『조선미술대요(朝鮮美術大要)』, 범우사 발행.

즉 김용준은 최경이 “산수외에 인물도 입신한 작가”로 일단은 상당히 높여 평가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최경의 인생과 예술에 관한 필자의 관점을 논하고자 한다.

2. 최경의 본관과 가문, 그리고 생존연대

『신숙주 선생묘』, 경기도 기념물(1985년 9월 20일 지정),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 163번길 34-39 (고산동). 필자는 보한재 신숙주의 묘소가 있는 의정부시가 나서서 『신숙주 기념관』을 지었으면 싶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신숙주 선생묘』, 경기도 기념물(1985년 9월 20일 지정),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로 163번길 34-39 (고산동). 필자는 보한재 신숙주의 묘소가 있는 의정부시가 나서서 『신숙주 기념관』을 지었으면 싶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최경의 자는 사청(思淸), 사청(四淸), 여청(汝淸) 등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다. 그는 화원(畵員)으로서 도화원(圖畵院) 별제(別提)를 지냈다. 그의 본관은 탐진(耽津)인데, 탐진은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에 속해 있던 옛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百濟) 동음현(同音縣)이었고, 신라(後期新羅)의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쳤으며, 고려때는 영암(靈岩)과 장흥(長興)으로 나뉘어 이속되었다가, 1417년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康津)으로 고쳤다. 즉 탐진은 지금의 강진 일부를 신라 경덕왕 이후 고려초까지 부른 호칭인 것이다.

탐진최씨의 시조는 고려 인종(仁宗)때 이자겸(李資謙: ?-1126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공신(功臣) 최사전(崔思全)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려의 명문(名門)이 고려말에 이르러 국운의 쇠퇴와 함께 기울게 된다.

최경의 출신을 살펴보기 위한 아주 좋은 기록이 「세조실록」 권30, 세조9년(癸未, 1463년) 3월 병신조에 올라 있다. 그에 의하면 최경은 “안산군(安山郡) 염부(鹽夫)의 아들인데 어려서 그 아비를 따라 관(官)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즉, 최경은 소금을 만들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가 그 아비를 따라 관에 들어 갔다는 것은 그의 부친과 그가 한때는 관청(官廳)의 일(役)에 종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천민(賤民) 출신임을 이야기하여 준다. 그러던 그가 도화원 생도가 되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아직 우리나라의 미술사학계에서는 최경의 생존년대가 전혀 규명되지 않았으나, 필자는 1997년 3월 30일 자에 탈고한 글③에서 필자는 최경이 1420년경에 태어나 1470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규명하였다. 그 근거로 『성종실록(成宗實錄)』 권244, 성종21년(1490년) 9월(丙子) 20일조와 27일, 28일조 기사를 보면 화원으로 사과(司果)직에 있는 최경의 노승직(老陞職)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제시하였다.

『성종실록』의 그 기사는 최경에게 고희(古稀)의 노인들에게 내리는 가자(加資)를 내린 것을 언급한 기사이다. 최경에게 가자한 연도를 역산하여 보면 최경은 1420년경에 태어났고, 그는 만 70세이던 1490년에도 화원으로서 현직에 근무하고 있었음을 보면, 그는 1490년 이후에 사망하였다. 이는 그가 “나이 70에 이르도록까지 눈이 밝아 능히 그림을 그렸다”는 이육(李陸, 1438-1498년)의 「청파극담(靑坡劇談)」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여 준다. 이렇게 보면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는 안견(1418년) 강희안(1419년) 최경(1420년) 순으로 연년생(連年生)이 된다.

3. 도화원 생도를 거쳐 화원으로

앞서 언급한 『세조실록』 권30, 세조 9년(癸未, 1463년) 3월 병신조에 의하면 근재 최경은, “어려서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 소뿔로 땅에 인물이나 당나귀, 말 등의 모습을 그렸는데, 제법 생기가 있어 촌부(村夫)들이 최경은 그림으로 뛰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도화원(圖畵院)의 생도(生徒)로 뽑혀 그 업에 정진하였고, 여러 차례 각별한 은전을 입어 5품직에 한정되는 화원이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는 ‘최경이 그림에 타고난 소질이 있었으므로 도화원의 생도로 뽑혔으며, 후에 화원으로 나가게 되었다’라고 한 것이다.

세종때(1419~1450년)는 도화원 생도를 뽑기 위한 시취(試取) 제도가 있었고, 또한 도화원 생도를 거쳐 화원이 되는데도 역시 시취를 거쳐야 했다. 최경과 안견은 세종조부터 활동한 화원 화가인데, 이들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 1440년대 초에 도화원의 화원으로 출세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세종조에는 화원의 직책을 맡아 출사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30세 이전이어야 했다. 위에서 고증하였지만 최경은 1420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그는 8품직인 도화원의 대교(待敎)를 거쳐 화원(畵員)이 된 이후에, 세조조(1455~1468)에 이르러 화원화가(畵員畵家)로서의 최대의 영예인 어진화사(御眞畵師)가 되며, 5품직에 한정되는 화원으로서는 파격적으로 정4품 호군(護軍)을 거쳐 말년에 정3품 당상관(堂上官)에 제수(除授)된다. 즉 최경은 조선시대에 화원으로 최고의 품계(品階)를 가진 가장 출세한 화가인 것이다. 물론 이는 그가 어진을 그린 공로로 주어진 것이다.

4. 최경과 어진, 그리고 산수

최경을 언급한 문헌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성현(成俔: 1439~1504년)의 「용재총화(?齋叢話)」에 보이는 다음와 같은 단편적인 기록이다. “‥‥‥其後安堅崔涇齊名 堅山水 涇人物 皆入神妙‥‥‥涇晩年亦畵山水古木 而當讓於堅矣‥‥‥”, “‥‥‥그 후에 안견과 최경이 이름을 날렸는데, 견은 산수에 경은 인물에 신묘의 경지에 들었다‥‥‥ 경이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렸는데 당연히 견에게는 물러나야 한다‥‥‥”.

이 문헌으로 하여 최경은 인물에 능하였고 산수는 말년에 가서야 시도한 듯한 오해가 우리 미술사학계에서 생겨났다. 그런데 지난 1994년 안견 논쟁시에 세종조인 1442년부터 144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어진(御眞)이라든가 왕실의 초상화 제작에 안견이 깊이 간여되었음이 주장된 바 있고, 그 한 증거로 1442년에 안견이 안평대군(安平大君)과 광평대군(廣平大君)의 초상화를 그린 바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산수화가로 특정을 지었던 안견이 여러 왕들의 어진(御眞)과 광평대군, 안평대군 등의 초상을 그의 창작초기인 1442년에 그리는 등 사조(寫照) 능력이 상당했음을 미루어 볼 때, 최경 역시 그의 창작초기부터 산수화를 그렸고, 그의 산수화 수준은 상당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용재총화」에서의 이러한 평가는 당대에 선호되었던 회화에 대한 시각에서 화가 각자의 특장점을 비교 언급하여 만들어진 상대적인 평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최경은 안견에 필적하는 화가였으나 그 장기는 인물화에 있었던 것이다.

안견은 조숙형(早熟型)의 천재 화가이나, 최경은 만성형(晩成型)의 노력 화가이다. 이 두 사람이 한 시대에 활동하였던 만큼 상호간은 최대의 경쟁 관계였다. 이러한 경쟁 관계를 의식하여 한 세대 이후의 사람들이 산수는 안견, 인물은 최경하는 식의 대비적 고정 관념을 만들어 냈음이 분명하다.

안견은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몰락과 함께 도화원에서의 활동 입지가 상당히 좁아진다. 따라서 세조초에 이르러서는 어진(御眞)이라든가 왕실 초상화 도사(圖寫)의 주도권(主導權)이 최경에게로 돌아가며, 안견은 산수화를 위주로 그린다. 이를 보면 산수는 안견, 인물을 최경하는 식의 고정관념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린 훨씬 이후에 최경이 덕종의 어진을 그린 세조초를 전후로 하여 발생한 관념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최경의 초상화 작품으로 고증된 작품은 없었다. 원래 초상화란 그린 작가보다 그려진 인물이 중요하므로, 많은 경우 특정 초상화를 그린 작가의 이름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최경이 세조초부터 어진과 초상화 제작을 주도하였다면 의당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그려진 작자미상(作者未詳)의 초상화들 가운데는 최경의 작품이 끼여 있을 수가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필자는 월간 『서화정보』 1994년 7월호에 기고한 글③ 「15세기의 다섯 초상화와 초상화가에 대한 일 고찰」에서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에 활동한 초상화가(어진화사)들과 전존하는 여러 초상화를 아래와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초상화가

1) 안견(安堅) : 1442년 안평대군과 광평대군의 초상화를 그렸다.

2) 최경(崔涇) : 1456년 9월이전에 최경과 안귀생은 덕종의 어진 초본을 그린다. 이 초본은 1472년본 덕종어진을 최경과 안귀생이 다시 그리는데 바탕이 된다. 또한 1472년에 최경 안귀생 배련 등이 세조와 예종 소헌왕후의 어진을 함께 그린다.

3) 안귀생(安貴生) : 전항의 ‘최경’ 참조.

4) 배련(裵連) : 전항의 ‘최경’ 참조.

 

세종조부터 성종조 사이의 현전 초상화

1) 「최덕지 초상화」 : 1445년 이전.

2) 「신숙주 초상화」 : 1455년 추정 (실제 1453년).

3) 「오자치 초상화」 : 1476년.

4) 「손소 초상화」 : 1476년.

5) 「장말손 초상화」 : 1482년 이후.

 

이러한 탐색을 통하여 필자는 「최덕지 초상화」와 「신숙주 초상화」는 안견의 작품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주장하였으며, 아울러 「오자치 초상화」와 「손소 초상화」는 최경과 안귀생·배련 가운데 한 두 사람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조선조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고려시대로부터 조선초기로 전해져 내려온 전신 사조법은 세종조에 들어서면서 화풍면에서 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에 대해 조선미 교수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초상화」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② 제2단계의 공신도상 ; 제1단계의 도상형식은 15세기 중엽에 이르면, 그 중 몇 가지 특징은 퇴화되어 버리고, 새로운 표현양식이 이에 대체되어 점차 나타나서 15세기 말엽까지 지속된다. 따라서 이를 제2단계의 功臣圖像群으로 묶어서 고찰해 볼 수 있는데, 공신칭호로서는 靖難功臣 佐翼功臣 敵愾功臣 翊戴功臣 佐理功臣像이 포함되며, 현존하는 화상으로서는 申淑舟像을 효시로 하여 張末孫 吳自治 孫昭像이 이에 속하는데 모두 원본으로 믿어진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조선초기 초상화 화풍의 변화는 안견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안견은 전신법에 있어서 동국(東國)의 오도자(吳道子)가 되었네”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이는 안견이 초상화의 전신사조(傳神寫照)에 있어 한 전형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초기 초상화의 한 전형은 최경에 의하여 발전한다. 더욱이 최경은 70세때(1490년)에도 눈과 필력이 쇠하질 않아 화원으로서 계속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1420년생이므로 현전하는 「오자치의 영정」과 「손소의 영정」이 그려진 1476년에 그는 57세때이고, 이 시기에 ‘최경은 능히 이 초상화들을 그릴 수 있었다’라고 보았다.

반면에 안견은 1470년을 전후로 한 시기 이후에는 작품을 남긴 것 같지가 않다. 안견의 이러한 공백기에 최경은 산수화가로서의 활동을 재개한다.

5. 「신숙주 초상화」는 최경의 작품

『영천세승(靈川世乘)』의 「호촌유사(壺村遺事)」 부분. 8행10자부터 10행2자까지를 주목. “文忠公畫像 在申僉知洬泥洞家廟 文忠年三十七 以同副承旨參靖難勳 畫師崔所寫 今猶有生色眼彩..”. 서지학적 검토를 하여 보면 『영천세승(靈川世乘)』은 미완의 편성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고문헌이다. 사진에서는 “文忠公三十二”라 되어 있는데, 보한재가 동부승지가 된 해는 37세시이므로, 이것은 『영천세승』의 원본을 베끼면서 실수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영천세승』은 2014년 8월 22일자에 전북 정읍시 신한의원 원장 신당식씨 소장본이 신경식과 신방수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이후 사단법인 송헌문화재단(이사장 신화수)에서 영인·번역본을 발행(2018년 10월 31일자)하였고, 그 영인·번역본을 고령신씨 보학자 신경식 선생이 필자에게 제공하였다. 자료 제공에 감사드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영천세승(靈川世乘)』의 「호촌유사(壺村遺事)」 부분. 8행10자부터 10행2자까지를 주목. “文忠公畫像 在申僉知洬泥洞家廟 文忠年三十七 以同副承旨參靖難勳 畫師崔所寫 今猶有生色眼彩..”. 서지학적 검토를 하여 보면 『영천세승(靈川世乘)』은 미완의 편성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고문헌이다. 사진에서는 “文忠公三十二”라 되어 있는데, 보한재가 동부승지가 된 해는 37세시이므로, 이것은 『영천세승』의 원본을 베끼면서 실수한 오기(誤記)로 보인다. 『영천세승』은 2014년 8월 22일자에 전북 정읍시 신한의원 원장 신당식씨 소장본이 신경식과 신방수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이후 사단법인 송헌문화재단(이사장 신화수)에서 영인·번역본을 발행(2018년 10월 31일자)하였고, 그 영인·번역본을 고령신씨 보학자 신경식 선생이 필자에게 제공하였다. 자료 제공에 감사드린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45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었던 「신숙주 초상화」는 1453년에 최경이 그린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이 여러 해 전에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은 『영천세승(靈川世乘)』에 수록되어 있는 「호촌유사(壺村遺事)」이다. 『영천세승』은 필사본 1책(본문 83장)으로, 영천(靈川)은 고령(高靈)을 의미한다.

이 필사본의 끝에는 ‘서신재휘격자서(書紳齋諱氵+格自序)’가 있는데, 이는 신격(申氵+格, 1723~1782)의 자서(自序)를 후인이 베끼면서 부친 제목이다. 즉 『영천세승』은 1779년에 신격이 편(編)한 고령신씨의 세승(世乘), 즉 고령신씨 인물들의 행적 문헌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편찬이 완성된 책이라기 보다는 비망록의 성격이 짙은 책이다.

이 『영천세승』에는 「호촌유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호촌은 신포시(申包翅, 1361~?)로서 그는 신숙주의 조부이다. 이 「호촌유사」는 호촌 신포시와 그의 자손들을 언급한 비망록의 성격의 글이다. 그 글에 “文忠公畫像 在申僉知洬泥洞家廟 文忠年三十七 以同副承旨參靖難勳 畫師崔所寫 今猶有生色眼彩”라고 하였다.

즉 “문충공(신숙주)의 화상은 첨지 신속(申洬, 1600~1661)의 니동(현재의 서울 종로구 운니동) 가묘(家廟)에 있었는데, 문충공이 나이 37세에 동부승지로서 정난공신에 녹훈되어 화사 최가 그린 것이니, 지금까지도 안색에 생기가 있고 눈의 광채가 서린다”라고 한 것이다.

이 「호촌유사」를 기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글에서 신속의 근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속과 동시대 사람이다. 그리고 「호촌유사」의 끝 부분에서 을미년(乙未年, 1655년) 봄의 문중사(門中事)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호촌유사」는 1655년부터 1660년 사이에 고령신씨 누군가가 저술한 글이다.

즉 17세기 중기에 『신숙주 초상화』는 ‘화사 최(畫師 崔)’ 즉 ‘최씨 성을 가진 화사’가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고령신씨 문중 전래의 공식적인 견해였다. 이는 매우 중요한 언급이다. 화사(畫師)란 어진(御眞)을 그린 화원을 지칭하는데, 15세기에 최씨 성을 가진 어진화사(御眞畫師)는 최경이 유일하다.

『영천세승』은 1779년에 신격이 채집하여 편찬한 기록이고,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호촌유사(壺村遺事)」는 1655년부터 1660년 사이에, 곧 「신숙주 초상화」가 그려진 200년 후에 지어진 글이다. 그 글에서 「신숙주 초상화」를 최경의 작품으로 지목하고 있다.

현재까지 미술사학계에서는 「신숙주 초상화」는 1455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호촌유사」에서는 이 초상화가 신숙주가 “37세시 둥부승지(同副承旨)로 정난공신으로 녹훈되었을 때 그렸다(文忠年三十七 以同副承旨參靖難勳)”라고 말한다. 신숙주가 동부승지가 된 시기는 단종1년(1453년) 3월 4일이며, 정난공신은 녹훈된 것은 그해 10월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1453년 작품이다. 즉 최경이 34세시에 그린 작품이다.

신숙주는 회화에 관한 관심이 높아, 『보한재집(保閑齋集)』 권제14에 「화기(畵記)」를 남기는 등 당시대의 회화에 관한 여러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최경 보다도 세 살 위였는데,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최경을 높이 평가하여 가까이 하였던 것 같다. 최경이 「신숙주 초상화」를 그린 것은 신숙주가 최경에게 그려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경이 그린 「신숙주 초상화」는 1977년 11월 15일자에 보물 제613호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세로 167㎝, 가로 109.5㎝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 13번지 구봉영당(九峰影堂)에 소장되어 있다. 초상화는 오사모(烏紗帽)에 녹포(綠袍) 단령(團領)의 관복을 입은 초상화로서,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左顔八分面)있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화폭은 비단을 좌우로 이어 붙여 얼굴 표현이 들어가는 중간 부위는 넓은 폭을 사용하였다.

양 팔꿈치 부분에서 양 끝은 좁은 폭을 사용하여 결국 3폭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연폭(聯幅) 형식은 조선시대 전기의 초상화 가운데 원본(原本)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조선시대 초상화 가운데 이 화상에서 흉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흉배는 바탕천에 직접 금박 혹은 문양을 짠 수법으로 여겨진다. 후대의 자수 방식과 달리 명나라 제도를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흉배의 문양은 구름과 기러기[雲雁]로서 문관의 도상이다.

화면의 오른편 여백에는 “조선 영의정, 고령부원군, 시호는 문충, 호는 보한재, 신숙주, 자는 범옹의 진영(朝鮮領議政高靈府院君諡文忠號保閑齋申叔舟字泛翁眞)”이라는 제기(題記)가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성종조 을미년(1575) 공이 졸거한 후 70년이 지난 을사년(1545)에 개장했다(成廟乙未公卒後七十年乙巳改粧)”라고 적고 있어, 1545년에 개장(改裝)하였다.

화법에 있어 안면은 음영 처리가 되어 있는데, 후에 보채(補彩)되었다. 그 표현 기법으로 미루어 보아 개장 이후에 다시 가채(加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살색은 선염이나 준찰(皴擦)로 이루어져 있다. 눈꺼풀 및 동공 처리의 묵선에도 섬세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안면이 지닌 굴곡에는 자연스러운 선염 효과가 이루어져 착색(着色)의 묘를 살리고 있다.

의복의 윤곽선 및 옷주름 처리 역시 절묘하다. 의복의 윤곽은 각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옷주름 처리는 필요한 부분에만 강인한 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보다 의미 있는 것은 녹의(綠衣)에는 진녹색 선으로, 빨간 내공(內工)에는 붉은 선으로, 남색에는 진남색 선으로, 보라색에는 진보라 선 등으로 이른바 동색계(同色系)의 짙은 색선으로 처리하여 색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띤다. 족좌대(足座臺) 역시 남색에는 짙은 남색선을 두르고 고동색 나무에는 까만 선으로 테두리를 지워 윤곽선이 의식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필(筆)과 묵(墨)에서 모두 세련된 기법을 연출하였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안면과 옷주름에 구사된 선의 성격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얼굴은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옷주름은 빳빳한 선으로 처리되어 그 다양함을 보여 준다. 신숙주 영정은 전신(傳神)의 묘미·필법·설채의 완전함이 전화면에 미친 가작(佳作)으로서, 작품 자체로서도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 이는 필경(畢竟) 근재 최경의 솜씨인 것이다.

6. 문헌을 통한 최경 화풍의 유추(類推)

문헌에 의하면 최경은 안평대군의 명을 받아 「삼소도(三笑圖)」를 그린 바도 있다. 그런데 조선초기에 일본으로 간 “문청(文淸)”과 조선중기의 김명국(金明國, 1600~?) 역시 「삼소도」를 그린 바 있다. 최경의 「삼소도」가 이들의 「삼소도」와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나는 격월간 「한국고미술」 1997년 3-4월호에서 “문청(文淸)”을 다루며 언급한 바 있듯이 “문청작 「호계삼소도(虎溪三笑圖)」는 「삼소도(三笑圖)」 또는 「삼교도(三敎圖)」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작품에 그려진 세 노인은 유불선 삼교의 학자와 승려, 도사를 의미한다. 그 세 노인이 마주하여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印象的)‥‥‥ 마치 삼교의 도(道)가 모두 하나로 귀일(歸一)한다는 자각(自覺)에서의 파안대소(破顔大笑)‥‥‥ 화찬(畵讚)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이 작품에서 무언가 구두선적(口頭禪的)인 의미가 들어 있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화가 연담 감명국(金明國) 역시 「호계삼소도(17.0x10.7Cm., 견본수묵)」를 그린 바 있는데, 김명국의 작품은 문청의 작품과 여러 면에서 상통‥‥‥, 특히 김명국의 작품에 그려진 서 있는 세 노인의 복식을 보면 이는 문청의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각기 유불선 삼교의 학자와 승려, 도사를 의미”한다. “다만 문청의 작품과 김명국의 작품에 다른 점이 있다면 문청의 작품에는 배경이 없는데 비하여, 김명국의 작품에는 절파화풍(浙派畵風)으로 배경에 길 위에서 담론(談論)하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반면에,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의 「삼소도서(三笑圖序)」에 의하면 최경의 「삼소도」는 조맹부(趙孟부: 1254-1322년)가 가지고 있다가 후일 안평대군의 수집품이 된 이공린(李公麟: 1049-1106년)의 「삼소도」를 모사한 것이라 한다. 즉, 최경의 「삼소도」는 그 원류가 북송(北宋)의 이공린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최경의 「삼소도」는 세 노인이 모여 앉아서 웃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문청의 「삼소도」의 경우와 같이 삼교의 세 노인일 가능성은 크다. 그러나 당시에 유불선의 도가 결국에는 하나로 귀일(歸一)한다는 사상이 동양 삼국에 널리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이공린이나 최경의 「삼소도」 역시 삼교의 노인을 그렸을 것이다. 또한, 다음 항목 “최경의 전칭작품”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최경은 유송년의 화법에 따라 세종조에 「채희귀한도」란 인물산수(人物山水)를 그린바 있다.

한편, 「용재총화」에 “경만년역화산수고목(涇晩年亦畵山水古木)”이라 하여, 최경이 마치 만년에 이르러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린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성현이 알기에 경이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렸다는 말이지, 실제로 최경이 만년에 이르러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최경 역시 다른 도화원 생도들과 마찬가지로 인물보다는 산수를 먼저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회화의 여러 분야를 고루 익히고 역량을 키운 다음에야 배우는 우리 전통회화(傳統繪畵)의 가장 어려운 분야이고, 반면에 산수화는 그림을 배울 때부터 우선 익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수는 자기 해석대로 재구성하여 그릴 수 있는 그림인데 비하여, 우리 전통회화에서 초상화는 자기 해석대로 재구성할 수가 없는 그림이다. 그런 이유로 하여 대개의 초상화가들은 만년에 이르러서는 그리기가 힘든 초상화 창작은 가급적 기피하였고, 이는 그들이 창작한 초상화로서의 수작은 대개가 40-50대에 창작한 작품인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또한, 「용재총화(慵齋叢話)」를 쓴 성현(成俔, 1439~1504)은 당시 회화의 보편적 관점을 쓸 수 있었을 뿐 예림(藝林)에서 구체적인 화론(畵論)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성현이 언급한 최경이 만년에 이르러 산수와 고목을 그렸다는 것은 초상화가로 알려지고 있던 그가 만년에 산수와 고목을 그리는데 치중하였으므로 성현은 그가 만년에 와서야 산수와 고목을 그린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찰에서 볼 때 김용준이 언급한 “최경은 안견과 함께 명성이 높은 화원으로 산수 외에 인물도 입신(入神)한 작가이며”라는 것은 최경에 대한 정당한 평가라하겠다. 다만 안견이 산수화 창작의 기량에서 최경을 앞섰고, 최경은 초상화의 창작 기량에서 안견보다 앞섰던 것이다. 안견이 초상화에 있어 최경보다 기량이 뒤졌다고 해서 그가 조선초기의 다른 화가들 보다 초상화를 못 그렸다고 볼 수가 없듯이, 최경이 산수에 있어 안견보다 기량이 뒤졌다고 해서 그가 15세기의 다른 화가들보다 산수를 못 그렸다고 볼 수는 없다.

현재, 최경의 산수화가 전존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는 당연히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 안견이 즐겨 구사한 화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화풍에는 고려시대로부터 전승된 고려화(高麗化)된 마하파(馬夏派) 화풍도 일부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강희안이 절파화풍(浙派畵風)을 묘사한 것을 볼 때 최경 역시 절파화풍도 구사하지 않았나 유추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안견의 전칭작품 「적벽도(赤壁圖)」가 있는데, 안휘준 교수는 이를 “산수화보다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에 의하여 그려진” 작품일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는 다분히 최경을 의식한 주장인 것인데, 안견도 초상화를 그린바 있으므로 인물에 능하였다고 보아야 하므로, 「적벽도」의 작가로 안견을 배제할 수는 없다.

「적벽도」의 주제는 거친 적벽의 거센 물살을 타고 유람하는 인물에 있으므로 이 작품에서의 산수와 격랑은 거칠게 그려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유섭이라든가 최순우는 구전(口傳)에 따라 「적벽도」를 안견작으로 인정하였다. 어쨌든 「적벽도」의 가치는 15세기 중후반에 유행된 절파화풍의 일면을 이 작품에서 엿 볼 수 있다는데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사실은 「적벽도」에서 보여주는 절파화풍은 중국 명대(明代)의 화가 대진(戴進)이 구사한 절파화풍과는 확연히 구분이 되어 진다.

한편, 서거정(徐居正: 1420-1488년)의 「사가집(四佳集)」에는 최호군화(崔護軍畵)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제시(題詩) 십수(十首)가 있는데, 이는 최경이 「청산백운도」란 청록산수(靑綠山水)를 그린 바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호군이란 정4품 무관직(武官職)인데, 때로는 화원들에게 품계로 주어지기도 하였다. 서거정은 최경과 거의 나이가 비슷한 한 시대의 인물로서 그가 최경을 정4품인 호군으로 칭한 것을 보면 그가 「청산백운도」의 제시를 지은 때는 최경이 정3품 당상관직에 제수되기 이전인 성종초(1470년대초)로 보인다. 이는 최경의 「청산백운도」가 최경의 50대 작품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최경의 「청산백운도」는 당시에 널리 유행되었던 마하파 화풍을 원용하여 그린 그림일 것으로 유추된다.

7. 최경의 전칭작품(傳稱作品)

안휘준 교수의 저서 『안견과 몽유도원도』 p.64의 註(주)66에 의하면 일본에 최경의 관지(款識)가 들어 있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의 전존사실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일본에 그의 이름이 관지(款署)되어 있는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전해지고 있음을 나라(奈良) 야마또분카관(大和文華館)의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 학예부 차장이 보여 준 사진을 통하여 알았으나 현재로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1997년 3월 26일,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야마또분카관(大和文華館)으로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를 찾아가 최경의 관지가 들어 있는 「백의관음상」의 존재를 확인하여 보았다. 그런데 이 글에서 「백의관음상」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증정고화비고(增訂古畵備考)」에서 언급하고 있는 최경의 「채희귀한도(蔡姬歸漢圖)」)를 검토하여 보기로 하자. 「증정고회비고」에 채록된 「채희귀한도」의 기록은 「백의관음상」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증정고화비고」에는 최경의 「채희귀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崔涇, 蔡姬歸漢圖 大橫披彩色絹本 朝鮮畵細描 劉松年等ニ似, 元末トミユ, 己卯閏四二十八, 大野氏ヨリ來ル” 그리고 이 기록 옆에 「채희귀한도」에 기록된대로 “탐진최경 대교(耽津崔涇 待敎)”라 쓰고 그림에 찍혀진 “팜진최씨(耽津崔氏)”와 “사청(思淸)” 등 두 개의 낙관을 그려 넣었다.

이 문헌을 미루어 보면 최경의 「채희귀한도」는 견본채색의 큰 횡축으로 된 세밀히 묘사한 조선화로서, 유송년 등 원말(元末) 화가의 화풍 즉 북화풍(北畵風)과 유사(類似)한 작품임을 알려 준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채희귀한도」는 「증정고화바고」의 편자 아사오카 쿄오후레에무(朝岡興楨)이 확인한 기묘년(己卯年: 1879년) 윤4월 28일 이후의 전존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 야마토 분카칸(大和文化館)에 소장되어 있는 중국 명초(明初)의 「문희귀한도권(文姬歸漢圖卷)」으로부터 최경의 「채희귀한도」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가 있다. 대화문화관의 「문희귀한도」는 채문희(蔡文姬)가 한나라로 귀환하는 18장면을 보여 주는 견본저색(絹本著色)의 두루마리(橫軸) 그림으로, 그 크기는 25.5×1199.9cm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최경의 「채희귀한도」는 대화문화관에 소장된 중국 명초의 「채희귀한도」와 같은 형태로 — 산수간(山水間)에 -- 그려진 행렬도 형식의 두루마리(橫軸)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최경이 어느 시기에 그린 것인가? 그 탐색의 실마리는 「증정고화비고」에 채록된 최경이 자필로 관지한 “탐진최경 대교(耽津崔涇 待敎)”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대교(待敎)란 예문관(藝文館)의 정8품 벼슬을 의미한다. 즉 “탐진최경 대교”라 씌인 작품은 그가 도화원의 정8품직에 있었던 시기에 그린 작품임을 의미한다.

최경에 대한 왕조실록상의 첫 기록은 『세조실록』 권2, 세조1년(1455년) 12월 무진(戊辰) 27일조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세조는 1455년 12월 27일 의정부에 전지(傳旨)를 내여 최경 등을 정5품의 사직(司直)에 임명한다. 따라서, 이를 보면 “탐진최경 대교”라 쓴 최경의 작품은 그가 세종조에 도화원을 입사한 이후 정5품 사직에 임명되기 이전에 대교(待敎)로 있을 때 그린 작품, 즉 그의 30대 전반기의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최경이 이미 세종조에 인물산수(人物山水)를 그린 바 있음도 입증하여 준다.

현재 최경의 관지가 들어 있는 작품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백의관음상」 만이 전존하고 있다. 어쨌든 야마토분카칸의 일본 내에 전존하고 있는 조선회화에 대한 조사 파일을 보면 「백의관음상」은 1979년 5월 4일 ‘나카가와 쿠니아키(中川邦昭)’씨가 사진을 찍은 것으로 되어 있고, 당시의 소장가는 미술가 ‘타나카 미노루(田中稔)’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작품의 크기는 69.8×33.5 cm이고 견본수묵(絹本水墨)이다.

「백의관음상」의 사진을 통하여 검토해 보건대 이 작품은 인물의 묘사에서 매우 개성이 강하여 크게 인상에 남는다. 사진에 찍혀진 규칙적으로 나타나 있는 좀이 먹은 흔적을 보건대 이 작품은 족자로 보존되어 내려왔다.

작품의 중앙 오른쪽 하단부에 백의를 한 관음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버드나무가지가 꽃혀져 있는 정병이 놓여진 바위에 엎대어 작품의 왼쪽 상단부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바로보고 있다. 후광으로 뒷받침되고 있는 관음의 얼굴은 대부분의 「백의관음도」가 근엄한 무표정인데 비하여 매우 인간적이며 사실적인 고요한(靜的인) 표정을 짖고 있는데, 그 아래 작품의 왼쪽 하단부에는 격랑(激浪: 世波)을 그려 넣어 화면에 동적인 긴장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또한 백의관음은 해변가 벼랑밑 공간에 들어가 있는 감(感)이 들도록 작품의 왼쪽 상단부에서 백의관음이 기대어 있는 바위의 뒷편까지 작은 나뭇가지와 풀을 그려 넣어 격랑과 육지를 대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의 백미는 관음의 인간적이며 사실적인 얼굴 표정과 이 작품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상태가 대비되어 조화를 이루는 구도에 있다.

그리고 이 「백의관음상」에는 「채희귀한도」와 마찬가지로 “탐진최경 대교”라 관지(款識)가 되어 있는데, 그 필적마저도 「증정고화비고」에 채록된 것과 거의 같다. 물론 이 작품의 원본을 보고 실견할 기회가 주어지기 이전에는 이 작품이 그려진 회견(繪絹)의 특성이라든가 관지(款識)의 진실성 여부를 - 안휘준 교수의 언급대로 최경의 작품인지를 - 현재로서는 단정할 수가 없다.

물론 현재로서 이 작품이 최경의 작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이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인물의 모습이 기존적인 일본인들이 그린 「백의관음도」와는 전혀 다른 감을 주고 있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이 작품은 최경의 초년 작품일 확률이 매우 높다.

더군다나 세종과 세조는 조선조의 어느 임금보다도 숭불(崇佛)을 허용하였으므로 이 시기의 화원이 불교를 주제로 하여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최경 스스로도 자신이 “어용(御容)과 불상(佛像) 인물(人物)을 모두 다 그린 것이 다른 화원들과 다르다”고 ‘말한 바 있다.

앞으로 현재 소장처 미상의 이 「백의관음도」 실물이 공개되어 연구될 수가 있기를 희망한다. 설사 이 작품을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 최경의 전칭작품으로 분류를 한다고 해도 이 작품은 틀림없는 조선초기의 「백의관음도」이기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8. 글을 마무리하며

세종조에 있어 최경은 화원화가로서의 위치가 안견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안평대군이 수양대군에 의하여 물러나고 수양대군이 왕위에 즉위하자 도화원에서 안견의 입지는 위축되고 최경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최경은 일찍이 세종조에 도화원 생도가 되었고, 초년부터 산수와 인물을 모두 그렸으며, 1455년 이전부터 어용(御容)과 불상(佛像) 인물(人物) 등을 고루 그렸다. 특히 세조조에 이루어진 어진이나 왕족 및 공신의 초상화 도사를 그가 주도하게 됨에 따라 한 세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의 장기가 초상화인 것으로 비쳐졌다. 실제로 최경은 15세기 중·후반부의 대표적인 초상화가이나, 그는 산수에도 안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히 능하였다.

최경의 인생과 예술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조선초기의 회화사는 올바로 정립될 수가 없다. 안휘준 교수의 지적대로 최경의 “인물화가 백묘화(白描畫)로 뛰어났던 북송(北宋)의 문인화가 이공린(李公麟)과 나한도(羅漢圖)를 잘 그렸던 유송년(劉松年)의 화풍을 수용하여 자기의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이상에서 최경은 도화원에 근무한 초기부터 인물산수를 그렸음을 규명하였으며, 그는 당대의 안견이라든가 강희안이 구사한 산수화풍을 구사하였을 것으로 유추해 보았고, 또한 작자미상의 초상화 가운데 그의 진적(眞跡)일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추려 보기도 하며 안견이나 최경의 작품이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우리나라에 전존하고 있을 가능성을 유추해 보았다. 그리하여 실제로 현전하는 「신숙주 초상화」가 어진화사 근재 최경의 작품임을 규명하였고, 이제 「신숙주 초상화」는 작가가 확인되는 조선시대 최고(最古)의 초상화로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다.

최경의 작품이 「신숙주 초상화」로 국내에 남아 있다. 이 초상화는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초기 최고의 산수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면, 조선초기 최고의 인물화는 최경의 「신숙주 초상화」로 자리매김하여야 할 것이다. 이 초상화의 가치는 인물화로서는 『몽유도원도』에 버금간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고령신씨 문중에서는 문화재청에 「신숙주 초상화」를 국보로 상향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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