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동학(東學)은 조선말기 우리 민족사상의 핵심이다. 동학은 우리 민족 전래의 홍익인간(弘益人間) 경천애인(敬天愛人) 민중정신(民衆情神)이 서학(西學)의 자극을 받아 동학(東學)으로 개화(開花)한 것이다.

동학의 개벽사상은 증산도와 원불교 등에게 큰 영향을 주며, 또한 동학의 민족의식은 대종교의 중광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다. 그러니만큼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 1824~1864)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 근대 사상사는 삭막하였을 것이다. 그 동학을 정통 계승한 것이 천도교(天道敎)이다.

1. 2024년은 민족사상과 민족종교의 해

2024년은 계묘~갑진년이다. 갑진년 설날은 2월 10일이니, 오늘 양력 1월 1일은 아직 계묘년이다. 그러나 우리는 통상적으로 양력 새해 인사에 음력 간지(干支)를 쓴다. 아직 계묘년이 40여 일이 남았는데도 갑진년 인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2024년 갑진년은 민족종교의 해이다.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은 1824년(갑신) 음력 10월 28일에 탄생하셨으니 2024년 갑진이면 탄신 200주년이고, 1864년(갑자) 음력 3월 10일에 서거하셨으니 서거 160주년이며, 1894년(갑오) 음력 1월 10일에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으니 그 시작 130주년이다.

년월일순(年月日順)으로는 음력 1824.10.28.·1864.03.10.·1894.01.10.의 순이나, 월일순(月日順)으로 한다면 1894.01.10.·1864.03.10.·1824.10.28.의 순이 된다. 이를 당시와 금년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아래의 표와 같이 된다.

간지

서력

음력 월일

당시 양력

금년 양력

비고

갑신

1824

1028

1218

1128

탄신 200주년

갑자

1864

310

415

418

서거 160주기

갑오

1894

110

215

219

혁명 130주년

 

이에 당시의 양력으로, 2월 15일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은 근대 민족운동의 기념일로 하자. 4월 15일은 수운 선생 서거 160주기로 추모하고, 12월 18일에 수운 선생 탄신 200주년을 민족 축제로 맞이하자. 그리하여 동학의 의미를 음미하고, 우리 민족정신의 부흥을 꿈꾸자.

2. 증조부와 천도교, 3.1만세시위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한 가정이 겪었던 지워져 온 역사의 흔적을 찾아 스스로 자아를 확립한 사실을 이제 말하고자 한다. 내가 우리 집안과 천도교의 인연에 대하여 우연히 들은 것은 20대 초반에 부친으로부터이다.

부친은 자신이 조부 이병식(李秉植, 1861~1942) 옹에게서 유아기부터 천도교의 주문(呪文)을 배워 외우고 있었다. 그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다.

나는 집안이 천도교에 관련된 사실을 조부 이종래(李宗來, 1906~1987) 옹에게 물었다. 조부는 1936년을 전후로 하여 포천으로 귀향하여 유학자로 활동하면서 천도교와의 연을 끊었다. 그 이유는 최린(崔麟, 1878~1958) 등 상당수 천도교인들이 친일로 변절하였고, 조부가 천도교인으로 남아 있는 한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일제가 지목한 천도교측 불령선인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부는 20대 초반의 내가 종교에 몰입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경계하셨다. 고조부와 증조부의 예를 들며 내가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조부의 말에 자극을 받은 나는 “증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이 사실인가?”의 확인에 들어갔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독립운동가 이병헌(李炳憲, 1896~1976, 천도교인)의 편저 『삼일운동비사(三一運動秘史)』를 찾아보니, 경기도 가평군의 3.1만세시위로 구속된 분들 명단에서 증조부님의 함자(銜字)가 들어 있었다. 천도교와 우리 집안의 연결 고리를 찾은 셈이다.

그러한 자료를 찾은 나는 조부에게 당시의 원호처(지금의 국가보훈처)에 증조부의 서훈을 신청하자고 하였으나, 조부는 나를 강하게 타이르셨다. “보상을 받으려 하신 일이 아니다. 네 증조부를 욕되게 하지 말고 그냥 놔둬라.” 이에 나는 증조부님의 서훈 신청을 포기하였다. 노태우 정부 때의 일이다.

이후 나는 1991년경부터 수년간 나는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의 수운회관 1111호에 미술연구소를 개설하였다. 당시 증조부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는가를 ‘천도교유지재단’에 문의하였으나,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당시 천도교측에 확인한 사실은, “1919년 3.1운동 당시, 각지의 천도교 교구장이나 유력자들은 ‘만세시위를 조직하여 나가며 시위 현장에서는 뒤에서 몰고 나갔다’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듬해(1992년) 나의 증조부님은 6촌 형의 서훈 신청에 따라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당시 6촌 형은 나와 아무런 상의 없이, 즉 증조부의 충분한 공적을 심사할 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둘러 서훈을 신청하였다.

3. 『매일신보』 보도를 통해 본 증조부 이병식옹

나의 집안에는 동학과 초기 천도교에 관한 자료들이 얼마간 남아 있었다. 포천 집안 전래의 자료가 6·25 때 거의 모두 사라졌지만, 『동경대전』 등등을 가까운 친족 집안에서 3~4차에 걸쳐 입수한 바 있다.

증조부 이병식옹이 직접 소장한 자료라기보다는 그 시대 그 언저리에서 사용된 자료들이다. 증조부가 천도교인으로 가평교구장을 역임한 사실은 3.1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인한 재판 판결문에 명백하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가평군에서의 증조부 이병식옹에 관한 직접적인 자료는 몇 점 발견되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1919년 4월 3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사에서 의외의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京城地方法院에서 지난 3월 14일 加平郡독립만세운동 관계자 天道敎徒 李秉植 외 28명에 대한 판결이 있었는데 형량은 다음과 같다.”라는 보도와 함께 “懲役 4年 張基榮, 懲役 3年 鄭聖敎, 懲役 2年 李胤錫 鄭興龍, 懲役 1年6月 鄭在明 李萬錫, 懲役 1年 李炳賛 崔宗和 崔容和 李弘福 李英憲 張浩利 李致榮 洪鍾先, 懲役 8月 丁李燮 申鉉成 崔仁和 崔基榮 權仁相 金昌鉉 金定鎬 崔基弘 李秉植, 懲役 6月 張順賢 張貴男 李道奉, 笞50 李敎成”라고 명단을 싣고 있는 사실이다.

이병식옹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는데,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장기영의 언급은 기사의 서두에 언급하지 않고, “加平郡독립만세운동 관계자 天道敎徒 李秉植 외 28명에 대한 판결”이리고 이병식옹을 앞세워 지목하고 있다(『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4권 참조, 국사편찬위원회).

왜? 그렇게 『매일신보』는 이병식옹을 앞세워 기사화하였을까? 나의 조부 이종래옹은 “가평군독립만세운동의 실제적인 주모자가 내 부친이었지만, 가장 연장자(당시 59세)이고 천도교 교구장으로 있었던 분이라서 다른 가담자들이 감싸고 보호하였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더구나 이병식옹은 당시 천도교의 최고 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과 동갑이다.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손병희를 비롯해 권동진 최린 오세창 이종일 이인환(이승훈) 함태영 한용운 등 핵심 8명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는데, 기평지역의 만세시위 주모자인 장기영(張基榮, 1887~1950, 당시 33세)에게는 징역 4년을, 정성교(鄭聖敎, 1893~?, 당시 26세)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한 것은 가평군에서의 만세시위가 상당히 엄중하였음을 의미한다.

가평군의 3.1만세시위운동의 전개는 다른 지역보다 그 특성에서 큰 차이가 난다. 우선 ①천도교 가평교구, 특히 가평군 북면 목동리 거주의 천도교인들이 주도하고 기독교가 이에 따랐다. ②3월 15일, 1차로 체포된 주모자들을 탈옥시키기 위한 강렬한 투쟁을 16일 날 시도하였다. ③그 과정에서 일제 헌병과 투석전도 벌였다. ④가평에서는 28명이 구속된 큰 규모의 투쟁을 했으면서도 의외로 사망자가 없다.

나의 조부는 이병식옹은 “가평군에서 3.1만세시위가 일어나던 1919년 3월 이전부터 일제 헌병대가 주시하고 있었고, 이후에도 천도교 제4대 대도주 박인호(朴寅浩, 1855~1940) 체제의 천도교와도 가까웠다”라고 말한 바 있다.

4. 고조부 이정회옹의 몰락

그런데, 우리 집안사에서 나의 증조부님이 조선말기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가평군으로 이주한 원인은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내가 조부에게서 확인한 단편적인 사실은 조부의 조부(나의 고조부 李鼎會옹)께서 동학혁명의 와중에 죄(보부상 인명 살상)를 짓고 칼을 목에 차고 옥에 갇혔다가 파옥(破獄)하고 탈옥하여 묘소가 없다는 사실과 고조부께서 탈옥하자 보부상(褓負商) 무리가 가택(家宅)으로 쳐들어와 기둥을 도끼로 찍어 넘겨 버렸다는 사실, 그러자 증조부 이병식옹이 집 안식구를 인솔하고 가평으로 도주하였다는 사실이다.

조선말기의 보부상 상단(商團)은 왕족과 민씨 일가들에게 붙어서 왕권을 수호하며 수구의 이익을 추구하였고, 동학농민혁명 시에는 동학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들은 후일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직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고조부가 보부상들의 표적이 된 시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와중이나 그 직후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에 대한 상세한 사실은 가내사(家內史)에서는 언급을 꺼려왔다. 신체가 장대(長大)하였다는 고조부 이정회옹은 파옥을 한 후 어디로 갔을까? 족보에는 고조부 이정회옹의 묘소가 포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나, 사실 선영에 고조부 이정회옹의 묘소는 없다. 탈옥하여 도망가신 후 유체(遺體)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증조부는 다른 곳이 아닌 가평군으로 피했을까? 포천군은 동학농민혁명 가담자가 확인되지 않지만, 가평군은 많은 가담자가 확인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동지들을 찾아 도피한 것이 아닐까?

『무체법경(無體法經)』·『후경(後經) 1·2』, 1911년 3월 16일 발행(초판본). 1910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구술한 것을 양한묵(梁漢墨)이 대필하였다. 동학혁농민명운동과 갑진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동학은 사회운동 쪽에 치우쳤으나, 사회운동만으로는 교단을 이끌어가기가 어렵게 되자, 의암 손병희는 종교적 수행에 치중하는 방침을 세우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무체법경(無體法經)』·『후경(後經) 1·2』, 1911년 3월 16일 발행(초판본). 1910년 의암 손병희 선생이 구술한 것을 양한묵(梁漢墨)이 대필하였다. 동학혁농민명운동과 갑진개혁운동을 주도하였던 동학은 사회운동 쪽에 치우쳤으나, 사회운동만으로는 교단을 이끌어가기가 어렵게 되자, 의암 손병희는 종교적 수행에 치중하는 방침을 세우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다.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런데 동학은 손병희(孫秉熙, 1861~1922)가 1905년 12월 1일 자에 천도교로 개명하여 조직화되었고, 그 이듬해에 증조부는 천도교에 신속하게 입교하여 상당 기간 가평교구장을 역임하였다. 이는 우리 집안과 동학의 관련성이 간단치 않음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종교에 몰입하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조부의 말은 증조부께서 고향에 남아 있던 포천에 있는 모든 재산을 팔아 천도교에 들이밀었다는 이유에서이다. 일제 헌병대는 3.1만세시위시에 천도교의 자금 이동을 엄밀히 주시하여 전국적으로 조사하였다. 돈을 낸 분들은 돌려 받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3.1운동을 전후로 한 수년간 천도교 제4대 대도주 박인호의 활동을 탐색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박인호는 상해임정이 수립되자 막대한 독립자금을 보냈기 때문이다. 박인호 이후에 최린 등 천도교측 여러 인사가 친일로 변절하면서 천도교측의 많은 1차 자료들은 폐기된 것 같다.

조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스무살에 기독교로 개종하였지만, 증조부의 열망이 담긴 동학과 천도교, 조부의 유학(儒學)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5. 민족의 격랑 속에서 부침한 민초들

지금은 자유롭게 글을 쓰지만, 나의 증조부 이병식옹이 동학을 신봉했다는 사실은 보수적인 경기도 북부의 포천군에서는 언급할 수 없는 한때는 숨겨진 집안의 비밀이었다. 고조부가 동학과 관련한 직접적인 기록은 아직 찾지를 못하였다. 아니 없는 것 같다.

선영이 있는 증조부의 고향 포천군은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기풍이 있는 조선말기부터의 보수 지역이다.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는 위정척사의 거두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의 고향이다.

면암은 9세 때인 1841년 김기현(金琦鉉)의 문하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했으며, 11세 때인 1843년 경기도 양근(양평)으로 이주하여 14세 때부터 당시 대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세 때 청주 한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22세 때에는 다시 고향 포천으로 돌아와 과거 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면암은 23세 때인 1855년 3월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 11등으로 급제하여 승무원 부정자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를 보듯 해방전 포천군은 보수적 유교 세력이 강한 고장이었다. 현재에도 천도교 교당이 없고, 동학측 민중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포천에서 조부가 1930~40년대에 천도교인으로 행세를 하는 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행위였다.

이렇게 우리 집안은 근대의 나라를 잃은 격랑 속에서 점점 위축되어 갔다. 집안 재산의 보호와 유지보다는 독립이 우선이었다. 조부가 포천으로 돌아온 이후에 집안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제3자가 선영을 팔아먹기까지 하였고, 오랜 소송을 거쳐 해방 후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고통을 겪은 집안이 어찌 한 둘이겠는가? 다행히 증조부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고조부처럼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분들, 특히 후손들이 확인되지도 않은 항일 의병이나 독립운동가들은 얼마나 더 많겠는가?

가평군에서 3.1만세시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정성교(鄭聖敎, 당시 26세)는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해방시에 그가 생존하였다면 52세였을텐데, 지금 그의 후손은 생존해 있을까? 만약 후손이 생존해 있다면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그렇게 잊혔거나 지워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들도 서훈하여야 하고, 서훈받은 날로부터 50~70년간으로 보훈 기간을 상향 조정하여야 한다.

2024년은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의 탄신 200주년이고, 서거 160주년이며,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다. 이후의 격랑의 민족 수난기에 한 민초로서의 필자의 집안을 돌이켜 보았다. 이 보다 더한 민초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간절한 축복의 기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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