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가 또 묵직한 책을 냈습니다. 교수 정년을 2년 앞두고 은퇴해 집필에 집중하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한길사, 2023.11)을 펴낸 겁니다. 1990년대 초 백낙청 선생이 제기해온 ‘한반도 분단체제’를 넘어, 2000년대 초부터 “좁은 한반도적 시각을 벗어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 관해 깊이 연구해왔거든요. 미-중 갈등과 신냉전,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동아시아 냉전, 한국전쟁과 정전체제 및 평화체제, 그리고 한미동맹 등의 굵직한 주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삼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한길사, 2023.11)
이삼성,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한길사, 2023.11)

이삼성 교수는 제가 1980년대 말 미국에서 공부할 때부터 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외래어·영어 쓰기를 자제하느라 ‘선망과 존경’이라 했는데 흔히 ‘롤 모델’이라 하죠. 연식은 제가 두세 살 위라도, 학식으로는 그가 대선배요 큰 스승이거든요. 제가 1990년대부터 주로 비밀 해제된 미국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남한-미국-북한 관계를 공부해온 것도 그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암튼 198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한 세대 넘도록 그는 저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자극 그리고 즐거움과 뿌듯함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의 글은 잡문이 아니고 깊이 있는 학술논문이라 좀 딱딱하고 깁니다. 책을 펴내면 대개 500쪽을 훌쩍 넘기죠. 독서가 벌어먹고 사는 일의 중요한 부분인 저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지만, 그보다 훨씬 큰 충만감을 줍니다. 제가 관심 갖고 공부하는 분야의 책이라 꼭 읽어야 하는데 1,000쪽 가까운 책을 정독하는 게 좀 고통스럽더라도, 읽는 동안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으며 새로운 것을 많이 배우고 알게 되는 즐거움을 맛보게 되니까요.

이 책 말고 이 교수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펴내고 제가 깊이 감명 받은 책도 소개해볼까요? 차례대로 제목만 알려드릴게요. 내용은 짐작하실 테니까요. 『미국의 대한정책과 한국 민족주의』, 『현대 미국외교와 국제정치』, 『한반도 핵문제와 미국외교』, 『미래의 역사에서 미국은 희망인가』,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2』,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이삼성 교수와의 인연을 포함한 일화도 곁들입니다. 제가 1980년대 미국에서 석사과정 밟을 때 미국 정당제도에 관해 논문을 쓰고 싶었습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1820-50년대 만들어져 무려 150년 이상 이름도 바뀌지 않은 채 유지돼오는 게 흥미로웠거든요. 한국 정당들의 평균수명은 1-2년밖에 되지 않는데 말이죠. 그러나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1980년대 내내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된 건, 미국을 동경하며 친미주의에 기울었던 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제 석사·박사 논문 주제가 반미주의로 바뀌도록 이끌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대 말 한국 학술지에 실린 ‘광주와 미국’ 관련 논문들을 접하며 이 교수의 글을 처음 읽게 됐습니다. 1989년 미국 정부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와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관한 공식 성명을 발표하며 미국의 개입과 역할을 어느 정도 밝혔지만, 그가 이를 반박하며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맞짱’ 뜨는 모습은 몹시 통쾌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제가 그를 흠모하게 된 거죠.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2020년에야 저는 “5.18민주화운동 전후 한국정치와 미국의 개입: 박정희 암살, 전두환 쿠데타, 광주 학살, 김대중 구명과 미국의 역할”이란 논문을 발표했고요.

이 교수가 1998년 펴낸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이란 책엔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이 담겨 있습니다. 극우신문 ‘조.중.동’까지 그 책을 소개하면서 그는 출판 관련 큰 상을 두 개나 받았고, 한국 평화운동가들을 포함한 진보적 언론인·지식인들이 베트남 현지조사에 나서도록 했지요. 저는 2015년에야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하여: 남한의 적극적 제안, 미국의 무리한 요구, 북한의 필사적 대응”이란 논문을 발표하며, 베트남 답사를 구상해왔는데 아직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을 지난 11월 말 받았으니 거의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 끝내지 못했습니다. 저도 번역·출판에 매달리며 매주 강연·토론 맡아 쏘다니느라 절반밖에 읽지 못한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연말연시 앞두고 즐거운 시간 많이 보내시는 가운데 차분한 독서 기회도 가져보시라고 서둘러 소개·추천의 글을 썼네요. 묵직한 내용에 900쪽 두터운 분량과 38,000원 책값이 쪼끔 부담스럽겠지만, 특히 미국 대외정책에 관심 갖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힘쓰시는 분들은 꼭 읽어보시길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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