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 김교헌 존영. [사진 제공 – 김동환]
무원 김교헌 존영. [사진 제공 – 김동환]

 

역사를 위한 변명

역사는 나와 우리를 위한 변명이다. 또한 사관(史觀)이란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을 말한다. 따라서 역사가의 눈은 ‘주인으로 보는 눈[主視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인 됨을 버리면 기준과 척도를 잴 수 없다.

구차함과 억측이 진실을 가리게 되고 가식과 협잡으로 인해 바로 보는 눈이 무너져버린다. 우리의 과거는 이러한 눈을 잃어버린 노예시대의 여정이었다. 다시금 사관을 시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노예의 눈으로는 주인의 역사를 만들 수 없고, 주인의 눈에서는 결코 노예의 역사가 나올 수 없다. 신채호가 “아국(我國)을 망(亡)하는 자는 정론(政論)도 아니며, 학제(學制)도 아니오, 기백년래(幾百年來) 망필을 휘(揮)한 노사가(奴史家)가 시(是)라.”고 한탄한 것이나,

“조선 백성의 정신이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천여 년 이래의 조선은 단지 형식상이 조선일 뿐이지 정신상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박은식의 말도, 노예적 사필에 대한 일갈(一喝)이었다.

『삼국사기』 이후, 우리의 사서에 담겨있는 역사인식과 기술태도에 안타까움을 갖는 것은 왜일까. 역사가의 가치관 때문이다. 김부식을 비롯해 지은 이(혹은 엮은 이)들 대부분이 유교사관에 함몰된 유학자들이었다.

공자가 쓴 『춘추』는 경전으로 꼽힐 정도로 뚜렷한 사관을 제시한 책이다. 어지러운 춘추시대에 정통을 강조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여지없이 매도하는 사관을 담고 있다. 뒷날 유학자들은 공자의 유교사관을 충실히 따랐다. 유교사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춘추필법(春秋筆法)이다.

춘추필법에 의한 역사 정리는 중국의 자기중심주의적 역사 해석이 대부분이다. 춘추필법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와서 더더욱 화석화되고, 의리(義理)와 대의명분(大義名分), 그리고 중화주의에 따른 정통성 등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대간(臺諫)이나 사관(史官)의 활동 역시 유교의 실천을 위한 것으로, 유교사관의 정당화와 체계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전통시대의 중화적 사대주의사관이 그대로 일제 식민주의사관으로 연결되며 온존했다는 점이다. 노예의 집단의 대물림 속에 주인만 바뀐 양상이다. 다시금 ‘주인의 눈’을 잃어버린 아픔을 곱씹게 된다.

중화에서 민족으로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 19868-1923)은 그러한 시대의 끝자락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섬겼던 조선을 세운 주체는 신흥사대부들이다. 그들은 고려 말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윤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주자학(성리학)을 바탕으로 고려 사회의 개혁을 꿈꾸었다.

새로운 왕조를 이룩한 이들 주도 세력은 불교를 억압하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유교사회를 지향하게 된다. 더욱이 또한 조선의 국시(國是)가 된 성리학은 과거제도와 맞물리면서 조선의 굳건한 통치논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므로 조선사회에서 성리학과 대립하며 입신출세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성리학적 가치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가치지향이 본격화된 시기는 구한말 때였다. 노예의 눈을 버리고 주인의 눈으로 각성한 시기 역시 이 무렵이다. 그 변곡점을 이룬 사건이 대종교의 등장이다. 김교헌의 역사인식은 그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의 하나다.

대종교를 경험하기 이전의 김교헌 역시 중화주의 가치관에 흠뻑 젖은 유학자였다. 과거급제 이후 종2품에 이르도록 25년간의 벼슬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익힌 김교헌의 가치는 바로 소중화인으로서의 성취감이었다. 그 대표적 양태가 『자치통감강목』을 통한 역사인식의 되새김이었다.

조선조 사대부들이 그러했듯이, 김교헌 역시 소중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마음껏 향유한 것이다. 벼슬 말기 『문헌비고』 편집위원(1903년)과 『국조보감』 감인위원(監印委員, 1909년)으로의 발탁은 성리학적 유교 지식인으로서의 최고조를 의미했다.

그러나 김교헌은 유교적 가치로부터 환골탈태한다. 대종교 중광(重光)의 명분으로 외쳐진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했어도 정신은 있다)’의 충격 때문이었다. 이것은 중화주의적 가치관 속에 함몰되었던 김교헌 자신에 대한 반성이자 새로운 출발이었으며, 중화주의 역사관에서 민족주의 역사관으로 변모되는 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정신적 동력이 되었던 ‘국망도존’은, 정신의 망각으로 망한 나라를 정신의 지킴으로 되찾자는 구호였다. 이 정신은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고자 했던 항일투쟁의 총체적 동력을 만들었다. 김교헌은 대종교의 2세 교주까지 올라 이러한 동력의 중추를 담당하였다.

이후 김교헌은 단군 관련 근대 최초의 사료집(史料集)인 『단조사고(檀祖事攷)』(1911년) 편찬을 주도하는가 하면, 『신단민사(神檀民史)』(1914년)와 『신단실기(神檀實記)』(1914년), 그리고 『배달족역사』(1922년) 등을, 사료의 뒷받침을 통해 저술하였다. 역사지리에 대한 관심도 빼놓지 않았다. 사료의 고증을 통해 엮은 『배달족강역형세도비고(倍達族彊域形勢圖備考)』의 찬술이 그것이다.

역사는 독립운동의 동력

“우리 겨레의 독립운동은 최근 30년간 중단된 일이 없었고, 또 우리 역사상의 정신에서 발생하는 동력이다.”

백암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에서 일깨운 경구다. 독립운동을 ‘역사인식에서 발생하는 동력’으로 규정하였다. 독립운동은 주인된 의식에서만 가능한 행동이다. 친일에 엎어져 매국의 길을 걸어간 인물들을 기억해 보자. 노예의식의 그늘에서는 항일의 의지를 찾을 수 없다.

김교헌의 역사서술은 항일의식의 동력원이 되었다. 독립운동 현장에서 정신적 교본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독립군들 사이에 국사교과서로서 널리 읽혔다.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간도의 여러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 역할을 하며 역사인식 고양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1918년 김교헌이 주도하여 만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김동환]
1918년 김교헌이 주도하여 만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제공 – 김동환]

그뿐만이 아니다. 김교헌 스스로 독립운동의 중심부에 섰다. 1918년 재외 독립운동지도자들을 결집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한 인물이 김교헌이다. 이 선언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 선언으로, 후일 동경유학생들에 의해 발표된 「2․8독립선언서」와 국내 「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 선언서에 담긴 항일투쟁의 방략은 완전자주독립과 항일무장독립전에 있었으며, 이후 만주 무장항일투쟁의 주요 행동지침이 되었다. 또한 대종교 항일단체인 중광단·북로군정서·신민부 등의 행동지침에도 이 선언서의 이념과 사상이 그 바탕에 있었다.

김교헌은 청산리전투를 이끈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조직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당시 대종교 교주로서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덕원리(德源里)에 소재한 백포(白圃) 서일(徐一)의 집에 거처하며, 서일과 더불어 북로군정서 조직에 직접 관여하였다.

경신년 일제의 만행 이후, 영안현(寧安縣)에서 도모된 북로군정서 재건 활동을 이끈 인물도 김교헌이다. 서일의 순국 이후 밀산(密山)에서 영안으로 대종교총본사를 옮겨온 김교헌은, 각지로 흩어진 북로군정서 간부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재기를 도모했다. 측근을 국내로 밀파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무기와 탄약까지 구입하며 조직적 무장투쟁의 준비를 주도하였다.

북로군정서‧신민부‧한족연합회 등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정신(鄭信, 혹은 鄭潤)이 김교헌을 추모한 아래의 글이 위의 정황을 말해 준다.

“나는 이 어른을 종교가나 문학가로만 보지 않고 군사가(軍事家)로도 보는데, 이는 우리가 북간도(北間島)에서 군사행동을 할 때에 이 어른이 미리 말한 것이 여러 차례 있는데, 그 뒤에 모두 이 어른 말한 대로 되었다.”

주인과 노예의 역사학

20세기 초 조선은 역설의 공간으로 시작된다. 을사늑약으로 조선 역시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한편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는 조선의 내정까지도 간섭했다. 일제 통치의 완성은 조선의 완전한 일본화로 연결된 반면, 우리의 가치지향은 정체성 회복을 통한 조국 광복의 완성이어야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오히려 완전한 일본화에 순응하였다. 이것이 전도된 공간에서의 대표적 역설이다. 이러한 뒤틀린 삶 속에서의 선택은, 바로 선 자와 거꾸로 선 자의 인식마저도 바꿔 놓았다. 주인이 노예가 된 공간에서, 노예된 자신을 진정한 주인인 양 행세케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역사학 분야다. 민족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진정한 광복을 도모하고자 했던 역사학이 민족주의역사학이라면, 일제의 관학을 뿌리로 하여 조선의 영구적 식민지를 획책한 역사학이 식민주의역사학이다.

그 양 진영의 인물로 무원 김교헌과 두계 이병도가 주목된다. 공교롭게도 화성 출신인 김교헌과 용인 출신인 이병도는, 같은 경기도 출신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갖는다. 또한 김교헌은 일제강점기 최고의 역사가로 추앙받던 학자다. 이병도 역시 해방 이후 한국역사계의 인맥을 주도해 온 최정점의 인물로, ‘두고계장(斗高溪長, 두계 이병도의 학문이 북두와 같이 높고 장강과 같이 길다는 뜻)’이라는 찬사까지도 그 후학들에게 받았다.

문제는 전도된 공간 속에서의 두 인물의 선택이다. 김교헌은 민족주의역사관을 토대로 여러 저술들을 남긴다. 이러한 저술들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독립군 역사인식의 기반이 되는가 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과서로도 쓰였다. 반면 이병도는 일본 유학과 함께 일본 관학자들의 영향 속에서 역사학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의 주변을 맴돌면서 일제의 『조선사』 완성에 부용(附庸)하였다.

마음 아픈 것은 해방된 공간에서의 두 인물의 위상이다. 김교헌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만주 영안현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20여년이 흘러 광복이 되었지만, 그의 학문은 ‘그 때 그 시절의 이야기’로만 전언될 뿐이다. 학문적 계보는커녕 학문적 가치로서도 무의미하게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병도의 학문 기반은 확고하다. 그가 일제관학의 아류로 처신한 경험과는 상관이 없었다. 청산되지 않은 기득권에 빌붙으며 한국사학계의 대부로 처세하였다. 회색지대로 변해버린 해방의 공간이, 학문이라는 포장을 쓰고 다시 온존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김교헌과 이병도의 사학 성향이 신교적(神敎的) 민족주의역사학과 신도적(神道的) 식민주의역사학으로 대비된다는 점이다. 물론 중량급과 경량급의 두 인물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자체가 무게의 형평성에서 어긋날 수 있으나, 김교헌 역사인식이 신교사관과 관계가 깊고 이병도의 역사인식이 일본 신도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은 신교사관의 근대적 위상을 가장 잘 정리한 인물이다. 김교헌은 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인물로, 후일 대종교 2세 교주를 역임했다. 그가 저술 혹은 감수한 책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적 원형인 신교사관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술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일 박은식이나 신채호 등등의 민족주의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반면 이병도 역사인식의 이면에는 신도사관의 냄새를 지울 수 없다. 그가 황국신민화의 첨병이었던 일제관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그렇거니와, 황국사관의 이론적 공장이었던 ‘조선사편수회’에서 적극 활동한 이력만 보아도 직감이 된다.

그의 이러한 환각은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되었다. 일본에서 신도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유명한 덴리대학교(天理大學校)를 방문하여 신도의 도복을 입고 예식에 참석한 인물이 이병도다. 돌아와 후배 교수들에게는 그러한 행태를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이병도의 가치 기반에 일본 신도의 작용이 적지 않았음을 시사해 주는 부분이다.

한편 일제는 실증사학이라는 허울을 식민주의사학 정착에 교묘히 이용하였다. 역사의 서술 주권을 장악한 일제는 과학적‧객관적‧합리적이라는 학문성을 내세우며 식민주의역사학을 체계화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우리 근대역사학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실증사학(문헌고증주의사학)은 사관(史觀) 이전에 역사학의 기초 접근방법이다. 실증이란 관념사학의 체계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도구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족주의사관이나 식민주의사관 그리고 사회경제주의사관 등, 모두 실증적 방법을 토대로 관념을 논리화하는 것이다.

문제는 실증사학의 교묘한 함정이다. 가장 큰 논리적 함정이 ‘민족주의역사학=비실증적 역사학’이라는 인식 주입이다. 그리고 일제관학에 뿌리를 둔 식민주의역사학만이 진정한 실증사학으로서의 학문성을 갖는다는 고도의 사기극까지 펼쳤다.

이러한 인식 주입은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민족주의역사학을 비실증적‧비학문적‧비과학적‧주관적이라는 곡해된 논리로 매도하였다. 또한 한국사의 개별성을 특수성 내지는 고유성으로 이해함으로써 세계사적 보편성과의 연관성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보탰다.

이러한 민족주의역사학은 한국 민족을 인류로부터 고립시키고 한국사를 세계사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나아가 결국 민족의 우열론으로 기울어져서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를 자라나게 한 것과 같은 온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가져올 가증스런 염려도 한다. 한마디로 이러한 역사학은 결코 역사학이 될 수 없다는 궤변으로 연결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해 온 상식의 눈으로 보자. 민족주의역사학은 과거 중화주의역사학으로부터의 탈피이며, 중화주의역사학의 연장이었던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자 대항이었다.

중국의 눈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 객관이고 일제 식민지의 눈으로 우리를 읽는 것이 실증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역사학은 주관과 비실증으로 낙인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역사학을 이념이자 관념으로 매도함도 그러한 인식의 연장이다.

주인의식도 경험해 본 집단이 행사하는 것이다. 노예의 삶으로 오래 길들여진 역사적 경험은, 늘 시류에 맞게 변신하는 것이 현명함으로 통했다. 우리의 역사학에 있어 실증사학의 가면 역시 이러한 변신과 무관치 않았다.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의 가면이 실증사학라면, 해방 이후 한국역사학의 가면 역시 실증사학이다. 그러한 가면 뒤에 숨어 행세한 대표적 인물이 이병도다.

김교헌은 관념적 역사가가 아니다. 『문헌비고』와 『국조보감』 참여를 통해 경험한 실증적 사료 분석과 집성(集成)에 누구보다 훈련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자료집, 통사, 지리지 등의 저술들 모두가 사료의 고증과 정리를 통해 만들어낸 노작(勞作)이었다.

오히려 실증의 가면을 쓴 이병도의 역사학이 극히 비실증적이다. 진즉부터 이병도 역사 연구에 있어 비실증성 문제는 제기되어 왔지만, 근자에 들어 이병도의 사학에 실증이 없다는 글들이 본격적으로 대두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사이비 실증사학의 종말을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김교헌과 이병도가 살다 간 행적도 대조적이다. 김교헌은 부귀영화를 스스로 버리고 대의명분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은 나라사랑의 길로 독립운동의 험로였다. 그 수단의 하나로 택한 것이 실증적 민족주의역사역학으로, 일제 식민주의역사학에 대항하는 우리의 정체성이었다.

이병도는 중국 경극에 나오는 변검(變臉)의 달인처럼, 시류의 변화에 너무 잘 적응했다. 일제관학자들에게 감명 받아 역사학도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러한 인연을 토대로 식민의 그늘에서도 늘 양지에 발을 딛고 산 인물이다. 실증사학‧순수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조선사편수회에 부용하며 식민주의역사학 확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한편에서는 청구학회‧진단학회라는 허울을 쓰고 어쭙잖게도 민족사학의 맥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다시 변신하여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 일제 관념(식민)사학의 아류인 그가, 한국 실증사학의 태두로도 자리 잡았다. 그에게는 나라사랑은커녕 명분도 염치도 없었다. 오직 변신을 통해 온존해 온 지식인일 뿐이었다. 그가 바로 이병도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

김교헌의 역사학을 돌아보며, 문득 청나라 말기 학자인 정함(定盦) 공자진(龔自珍)의 다음 경구를 되새기게 된다.

“그 나라를 멸망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문지방을 허물고 강기(綱紀)를 파괴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인재를 끊어버리고 그 가르침[敎]을 근절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그 조상을 쓸어버리려면 반드시 먼저 그 역사를 제거하라.”

강자의 역사가 약자의 역사를 지배해야 한다는 당위적 논리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구절이다. 역사학이 학문 이전에 지배와 피지배, 제국과 식민의 길항작용을 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역사가 살아남은 자의 기록임을 직설하고 있다.

일제가 한반도를 병탄하자마자 우리의 역사를 식민지화하려 한 의도가 무엇일까. 반면 그에 맞서 모든 것을 잃어가며 우리 역사를 지키려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쓰러지는 나(정체성)를 지탱하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가의 가치와 직결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다. 따라서 역사가의 눈은 ‘주인으로 보는 눈[主視眼]’과 ‘슬기로 보는 눈[慧視眼]’, 그리고 ‘바로 보는 눈[正視眼]’이 요구된다.

주인 됨을 버리면 기준과 척도를 잴 수 없다. 슬기를 잃어버리면 구차함과 억측이 진실을 가리게 된다. 바로 봄을 망각케 되면 가식과 협잡으로 인해 정관(正觀)할 수가 없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이러한 눈을 잃어버렸다. 다시금 사관을 시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옛말이 있다. 이 속담은 ‘돼지의 눈으로 보면 돼지가 보이고, 부처의 눈으로 보면 부처가 보인다’는 무학대사의 가르침과도 동일한 의미다. 따라서 노예의 눈으로는 주인의 역사를 만들 수 없고, 주인의 눈에서는 결코 노예의 역사가 나올 수 없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에 기록된 「한상국(韓相國)의 농사」를 떠올려 보자. 상국(相國) 한응인(韓應寅)이라는 농사의 반푼이가 벼[稻]와 강아지풀[稂莠]를 구별 못해 벼를 다 뽑아버리고 진정한 농사꾼인 양 우쭐해 하는 이야기다.

혹여 ‘슬기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학이 이런 것은 아닐까. 역사의 ‘어설픈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답시고 남의 다리를 긁어준 것은 아닌지 궁금키도 하다. 다시 우리의 얼굴과 혹도 구별 못하는 사가들을 비판한 신채호의 다음 주장을 보자.

“조선사를 지은 기왕(旣往)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眼鏡)이 너무 철면(凸面)인 고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무수한 ‘혹’을 가져다가 붙이었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대통(大通)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참괴한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 있도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올바른 조선사가 아니었다.”

유몽인이 벼와 강아지풀을 구별 못한 한응인을 비웃은 것이나, 신채호가 우리 얼굴과 혹을 구별 못한 역사가들을 힐소(詰笑)한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다. ‘혜시안(慧視眼)’을 잃어버린 우리 역사가들의 현실을 한탄한 것이다.

이것은 본질을 놓치고 현상에 기울어진 이치를 비판하는 것이며, 거짓을 가지고 진실이라 호도하려는 부류에 대한 공박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강아지풀 속에서 벼를 찾아 환호했던 모습도 보인다. 숙종조 인물인 북애자(北崖子)의 다음과 같은 경험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언제부턴가 우리의 역사는 소외와 위축의 역사로 진행되어 왔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서의 수난과 더불어 흔들린 신교의 쇠퇴와 맞물린다. 탄압 속에 사라진 서적도 대부분이 신교서적이다. 남아서 천대받는 서적도 하나같이 신교사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뒤집혀진 세상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정사(正邪)가 전도(顚倒)되고 주객(主客)이 역전된 삶이 우리의 역사적 삶이다. 혹과 강아지풀인 외래사관에 의해 얼굴과 벼인 신교사관이 압살당해 온 것이다.

한편 역사는 나와 우리를 위한 변명이라는 측면에서, ‘정시안(正視眼)’이 요구된다. 우리는 과학성이니 합리성이니 보편성이니 하는 허울 속에, 그 ‘바로 보는 눈’을 잃어버린 지 꽤나 오래되었다.

전통사회에서는 중국적인 것이 과학적‧합리적‧보편적인 가치요, 근대 이후로는 제국주의적 잣대가 바로 그러한 가치였다. 우리는 늘 변두리 의식 속에서 빌붙어 사는 것에 길들여져 왔다. 바로 보아야 할 역사의 눈 역시 사팔뜨기[斜視眼]가 된 원인이다.

그러나 진정 역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과정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중략)…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前途)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라는 신채호의 외침이, 새삼 올바르게 와 닿는 지금이다.

대한민국 역사학의 우두머리

1923년 12월 25일(음력 11월 18일), 중국 길림성 영고탑에 있는 대종교총본사 수도실에서 대한민국 역사학의 우두머리 김교헌이 영면하였다. 꼭 100년전 이맘 때다. 민족사의 올바른 서술을 통하여 단군의 의미를 역사 속에 끌어들였고, 불교와 유교 중심의 역사 경험을 신교(神敎, 道家)적 사관으로 체계화시킨 거목이 쓰러졌다.

박은식이나 신채호를 비롯하여 수많은 민족사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인물이 쓰러지자, 당시 생각하는 지식인들 모두 슬퍼하여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진실로 한 단체나 개인의 덕망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전민족의 모범적 지도자요 국학상의 둘도 없는 대학자였다.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의 추모처럼 김교헌은 ‘말 없는 애국자’요 ‘참된 조선인’이었다. 우리 역사와 관련된 자료와 그 정리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 않고 열정을 쏟았던 인물이다. 대종교에 몸 바친 이유 또한 그러한 정신의 연장이었다. 안재홍은 그의 죽음이 진정한 애국자·국학자를 잃은 것으로, 대종교도를 넘어 전민족의 손실로 애도하였다.

안재홍은, 김교헌이 옥처럼 쇠처럼 단단한 인품과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기질로 20여년을 하루같이 대종교와 민족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임은, 국내외 모든 동포들이 알고 있는 바라 회억하였다. 더욱이 암담한 현실 속에서,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앞길에 지도자가 되어줌은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이 되었다는 토로다.

김교헌의 인격을 논함에도, 우리 사회의 정신적 계도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솔선수범하였음을 추앙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일이라면 극한 고통의 길이라도 기꺼이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북간도의 혹한 속에서 굶주림을 다반사로 경험하면서도 동포들을 일깨우고 지도하는 삶이 그의 전부였음을 애도하였다.

나아가 안재홍은, 김교헌의 고행역정을 석가(釋迦)의 6년 고행을 넘어서는 삶으로 회억하면서, 아래와 같이 추모의 변을 올리고 있다.

“그러면 선생은 단순히 개인의 선생이 아니며 일개 단체인 대종교의 선생이 아니라 곧 우리 전체의 선생이니, 우리 전체의 선생이 되는 동시에 차일(此日)을 당하여 선생을 잃은 우리의 경우가 얼마나 비애이며, 우리의 손실이 얼마나 거대한가. 말하고자 하여도 차마 말하지 못하겠으며, 말하지 않고자 하여도 차마 말하지 않을 수 없도다.”

이어 충혼기백으로 일관한 김교헌의 삶은 떠났을지라도, 그가 남기고 간 큰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았다고 추모했다. 오히려 “교해(敎海)는 민멸(泯滅)되지 아니할 만큼 민족에게 파종되었으며, 선생의 성력은 이미 사회에서 근대(根帶)가 기고(己固)하였은 즉….”이라는 회고와 같이, 김교헌의 가르침이 민족의 근간에 이미 굳건히 자리 잡았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추모를 아래와 같이 맺고 있다.

“선생의 육신은 비록 이 세상에 없다 하여도 선생의 정신은 영원토록 우주 간에 존재하여, 우리의 광명한 앞길을 툭 터줄 날(衝出할 一日)이 반드시 있을지라. 그럼으로 오인(吾人)은 보잘 것 없는 몇 줄의 글(荒文數行)을 장(將)하여 선생의 영(靈)을 조(吊)하려는 것보다도, 선생의 유지(遺志)를 바르게 체득하여 선생을 위로코저 하는 견지에서 이와 같이 애도의 의(意)를 표함이로다, 아 슬프고 애통하도다(悲夫痛矣)”

평소부터 깊은 우애를 맺었던 우천(藕泉) 조완구(趙琬九) 역시, 김교헌이야말로 인인(仁人)이요 군자(君子)라고 평하면서, 남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강인한 마음을 동시에 소유한 인물로 회억했다. 그리고 아래의 평가로 김교헌을 기렸다.

“선생(김교헌-인용자 주)의 깊고 넓은 학문은 모든 것을 바르고 깊게 살폈으니, 당시에는 이에 관하여 선생을 따를 이가 없었다. 더욱이 동방의 역사에 오로지 힘을 쏟아 연구를 쉬지 않아 누구든지 그 한 마디 한 글자에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우리 역사와 어문에 남다른 조예를 보인 백연(白淵) 김두봉(金枓奉)의 추모도 돋보인다. 그는 김교헌이 우리 역사에 끼친 공적을 추모함에, “사마천의 공보다 크다”고 아래와 같이 평가하였다.

“나는 이 어른(김교헌-인용자주)과 십여 년을 같이 있었는데, 나의 본 것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공부와 발견이 제일 많다. 그럼으로 광문회에서 고고(考古)의 책을 많이 발행하였으나 거기도 이 어른의 공이 많으며, 또 오늘의 우리가 이만치라도 역사에 대한 생각을 가진 것은 모두 이 어른의 공이라 할지니, 그 공의 큰 것은 중국의 사마천(司馬遷)이가 세운 공보다 더 큰 것이다.”

그렇다. 김교헌은 우리 역사계의 거대한 산맥이었다. 은계(隱溪) 백순(白純)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담긴 평가와 같이, 김교헌은 ‘대한민국 역사가의 진정한 우두머리[宗匠]’다.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195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대학에서 행정사를 전공하였고, 한신대학교 강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국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술로는 『단조사고』(편역, 2006), 『교계의 민족운동』(공저, 2008), 『한국혼』(편저, 2009), 『국학이란 무엇인가』(2011), 『실천적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2013)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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