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서대문역 사거리 경찰청 앞에 도착하니 빈민대회가 아직 진행 중이었다. 길 건너편에는 노동자대회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범시민대회를 마치고 행진을 해온 사람들이 대형 엘이디 화면 앞으로 모여 들면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경찰청 앞에는 전경들이 방패를 들고 서 있었다. 잔뜩 긴장된 표정들이었다. 그 옆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짬밥 차이일까?

경찰들만 짬밥 차이가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최근에 지역의 노동단체에서 상근하게 된 젊은이가 있는데 민주노총 집회에 참여한 뒤 감동에 겨워 한참 동안 그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그렇게 절도 있게 움직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모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일체감을 보이는 것이 놀랍다고 하였다. 하지만 8-90년대부터 노조운동을 해온 5-60대 노동자들은 대체로 그런 점에서는 별로 감흥이 없기 일쑤였다.

신돌석씨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신돌석씨 역시 감흥이 새로울 때가 있었다. 1986년 지역에서 가두시위를 할 때 경찰을 몰아내고 단 10분이라도 일정 지역을 해방구를 만들었을 때 정말 감동에 벅찬 마음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때 지역에서는 경찰은 거의 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도 있었다. 지역의 경찰이 거의 차출되어 서울로 간 것이었다. 남은 경찰은 경찰서나 파출소를 지키기에 급급했었다.

이어서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 되면서 공단은 정말 해방구 같은 지역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사업장에 경찰력을 투입하다가 그것도 금세 사라졌다. 그런데 그런 역동성이 가을이 깊어가면서 시들해지고 대통령 선거로 빨려 들어가리라고는 당시만 해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이듬해 노동절 기념대회와 전태일 열사 계승 노동자대회를 하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행렬을 보면서 이제는 뭔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따지고 보면 달라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노조가 생겼고, 어느 정도 노동자의 권리도 적지 않게 법으로 보장되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하청 재하청이라는 기형적인 구조 속에 노동자들은 온갖 억압을 당하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자계급은 분열이 되고, 노동문제에 관한 한 지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중산층은 노조를 탄압하는 정권을 오히려 자기 편인 양 생각한다.

그런 상태에서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해 줄 정당은 상당히 미약하고, 그나마도 분열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이 어느 정도 의석도 확보하고 힘찬 발걸음을 보여줄 때는 어느 정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분열로 끝난 뒤에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5-60대 노동자들은 대체로 커다란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신돌석씨는 자신도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면서 아니라고 단언할 자신이 없는 스스로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친구들은 이제는 ‘노동해방’의 깃발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들은 민주노동당도 부정한다. 체제내적인 변화를 추구하다가 분열이라는 결과가 왔다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비타협적인 투쟁만이 노동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신돌석씨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뭔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과연 타협적이고 체제내적이라서 분열이 된 것일까?

그런가 하면 투쟁방식에서 문제를 삼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은 박근혜 탄핵의 시발점이 된 민중총궐기처럼 비타협적으로 싸웠더라면 저들도 폭력적 진압으로 나왔을 것이고, 그랬어야 노동해방에 가까이 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후의 평화적이고 준법적인 시위가 투쟁의 동력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게 되살아날 길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수구가 되살아나도 막을 길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런 친구들의 주장대로 한다면 오늘 같은 날은 경찰청을 공격했어야 했다. 박근혜 탄핵 때도 국회나 청와대를 공격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황교안에 의한 국회 난입,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으로 나타났다. 그런 짓을 벌여야 혁명적인 것인가? 신돌석씨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무력화시킬 대안이 사실 뚜렷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자기 주장을 현실화시키지는 못하였다.

신돌석씨는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철저하게 준법적인 방식으로 청와대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 것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다수가 결집될 수 있었고, 폭력적 진압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의 정치적 무능력이지 그 과정 자체를 문제삼아서는 안 된 다는 것이 신돌석씨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정은 여전히 불필요하다. 어쨌든 탄핵은 이루어졌지만 다시 선거에 의해서 반동이 들어선 셈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본집회가 시작될 듯하여 재빨리 서대문역으로 갔다. 소변을 보기 위해서였다. 집회를 30분 정도로 짧게 한다는데 그 뒤 행진까지 하면 두 시간 정도를 소변을 참고 있어야 했다. 전철역 화장실에 가니 역시 노동자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다른 공공장소와는 달리 여자화장실은 별로 줄이 안 서 있는데, 남자화장실은 엄청나게 긴 줄이 있었다. 누군가가 역시 민주노총은 아직 남자가 많은 모양이라고들 하였다.

소변을 보고 제자리로 돌아오니 집회가 막 시작되었다. 100인 대표가 무대 위에 올라 있었다. 최미숙을 언뜻 보았다. 노농빈 대표가 한 사람씩 있고, 전국비상시국회의, 전국민중행동이 각각 한 사람씩 서 있었다. 이들이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엘이디 화면의 음향이 꺼지면서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수선해졌다. 건너편에 노동자 대열이 보였는데 그곳은 확실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이어서 엘이디 화면에 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헌신해 온 신부님이 나와서 격려사를 했다. 이때부터는 소리가 들렸다. 신부님의 격려사는 1-2분 정도에 끝났다. 우리가 힘을 합쳐서 어떻게 해서든지 윤석열을 끌어내자고 강조하였다. 검찰독재를 끌어내리고 탄핵하고 아름다운 민주정권을 이룩했으면 참 좋겠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와 평화,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꿈을 이룩하기바란다고 강조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이 뜨거운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권영길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겸 지도위원이 나왔다. 권 위원장은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을 선포한다고 하고, 지금이 바로 민중의 삶을 진정으로 나아지게 만들 투쟁을 할 때라고 강조하였다. 오늘은 두 분만 동영상으로 하고, 그 이외의 발언은 없다고 들었다. 이제 집회참가자들이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듣기 싫어해서 될 수 있는 대로 짧게 하기 위해 동영상으로만 딱 두 분만 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오늘 연단에 올라간 100명이 모자라다고 하면서 신돌석씨더러도 올라가자고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였다. 격려사가 끝난 뒤 합창이 되었다. 다시 들렸다 안 들렸다 하였다. 왠지 집회가 어수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회 뒤에 행진이 시작되었다. 대표단들이 앞장서고 민중진영에서 그 뒤를 이었기 때문에 범시민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한참 뒤에서 따라가게 되었다. 방송차량을 그렇게 대형트럭으로 해야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행진차에서 진행자가 짤막한 연설을 하면서 구호를 외쳤다. 이런 행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민중의 노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나오고, ‘촛불의 행진’도 나왔다. ‘단결투쟁가’와 ‘파업가’도 나왔다. 모두 오래 된 노래들이다. 이럴 때마다 신돌석씨는 운동가요는 군가처럼 오래된 노래가 잘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가 ‘노동해방가’가 나오면서 더 오래 된 노래인데 조금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강제와 감시 속에 우울하고 고통에 찬 죽음의 고역 같은 노동에서 해방되어...’ 이렇게 시작되는데 누가 작사 작곡했는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불리던 노래이다. ‘강제와 감시’라는 것은 지금 노동현장에서는 그다지 실감이 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신돌석씨가 처음 공장에 들어갔던 1970년대에는 공장은 그야말로 ‘강제와 감시’ 속에 노동을 해야 했던 곳이 많았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신돌석씨가 처음 들어간 공장은 가방공장이었다. 노동자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10대도 몇 명 있었는데 이들은 걸핏하면 구타를 당했다. 다음으로 들어간 곳이 프레스 공장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기숙사가 있었고, 외출이 통제되었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위로나 보상보다는 욕을 얻어먹고, 심지어 얻어맞기까지 하였다. 물론 그만둘 자유는 있었다. 하지만 시골에서 올라온 이들이 당장 기숙사를 뛰쳐나가서는 갈 곳이 없었다.

2절은 ‘짓누르는 억압의 사슬을 끊으려다 스러져간 동지의 거룩한 뜻 죽지 않았다’로 시작된다. 신돌석씨처럼 변방에서 노동운동을 좇아다니기만 한 사람이 알기에도 ‘짓누르는 억압의 사슬을 끊으려다 스러져간 동지’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당장 전태일 열사만 해도 그렇지만, 그 이전으로 가면 일제 강점기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 그런데 그 거룩한 뜻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다.

사실 인간은 선대로부터 경험과 뜻을 이어받고, 후대에 그것을 물려줄 줄 아는 존재이다. 이러한 특성이 있는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하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냉소적이거나 허무주의로 보는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신돌석씨가 보기에는 확실히 전진하는 역사였다. 다만 그것이 개개인에게는 너무 고통스러운 과정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뜻이 이어진다는 데 중요한 뜻이 있으리라.

행진 대열이 서울역을 지나서 남영동으로 향했다. 선두는 벌써 목적지인 용산에 이르렀을 것 같기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대열이 남영역 부근에서부터 지체되기 시작했다. ‘노동해방가’는 이미 끝나고, 진행자의 연설과 구호 제창 등이 이어졌다. 앞에서는 나아가지 않고, 뒤에서는 계속 오니까 조금씩 압박감이 느껴졌다. 옆으로 빠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신돌석씨는 노동해방가를 부를 때면 3절을 제일 좋아한다. ‘수천 년에 굴욕에 찬 어둠을 불사르고 새 역사에 지평에 떠오르는 찬란한 빛’으로 시작하는데, 그 뒤를 더 좋아한다. ‘하늘은 그 얼마나 눈물 속에 기다렸나’로 이어진다. 이 가사를 냉소적으로 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늘이 어디 있고, 무슨 눈물 속에 기다리냐는 것이었다. 유물론에 어긋나는 관념론자들이 잠꼬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하늘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 아니겠는가? 모든 이들의 뜻이 모인 것을 하늘의 뜻으로 말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오래된 전통 아닌가? 그것이 이루어지는 날을 기다린다는 것을 꼭 그렇게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대체로 그런 말을 하는 친구들은 학생 출신이고 논쟁에서 신돌석씨가 밀린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노동운동을 막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선배들이 노동자가 정치투쟁에 앞장서면 그것이 곧 노동해방이 임박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날이 바로 하늘이 눈물 속에 기다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런 날은 지금 왔다. 윤석열 퇴진 투쟁에 가장 선봉에는 민주노총이 있다. 하지만 지금이 그런 날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신돌석씨는 안타깝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고 여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행진차에서 선두가 이미 용산 대통령실 근처에 도착했고, 마무리집회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행진을 할 수 없다는 방송이 나왔다. 마무리집회에 함께 하지 못하는 점이 참으로 아쉬웠다. 100인 대표로 무대에 올랐다 내려와서 지역 사람들과 행진을 함께 하는 데로 온 김민호, 최미숙 등과 뒤풀이를 부근에서 하기로 하였다. 신돌석씨는 언제나 ‘하늘은 그 얼마나 눈물 속에 기다렸나’를 마음껏 부를 수 있을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