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2시가 조금 지나면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나온 발언자는 윤석열 정권의 행태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권력의 사유화’라고 하였다. 그것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자기 것처럼 여긴다는 것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말을 듣자 윤석열이 저지르는 잘못이 무엇인지가 확 와 닿는 것 같았다. 언젠가 어느 단체가 낸 논평에서 ‘윤석열 대통령 이 나라가 당신 것입니까?’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 이때도 윤석열이 하는 짓이 그대로 느껴졌었다.

지금까지 독재권력도 여러 번 겪었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자기 지인, 부하들, 심지어 부인의 친지까지 정부 요직에 앉히는 정권은 처음 본 것 같다. 발언자는 이들이 권력을 사유화하는 방식으로 정치검찰 지인 측근들을 정부 요직에 앉히는 것 이외에도 시행령과 거부권을 통한 국회의 입법 기능 무력화를 들었다. 무슨 짓이든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검찰권을 오남용하여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먼지털이식 수사를 하고, 자신들과 그 하수인들에게는 한없는 관용으로 일관하는 것도 그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해 쓰는 강력한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에 언론을 장악하려고 한다. 특히 비판적 기능을 얼마간 가지면서도 대중에 영향력이 큰 공영방송을 완전히 무력화하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발언자는 방송 장악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땡전 뉴스 생각나냐고 하였다. 전두환 때 일이므로 나이 든 사람들 아니면 기억할 수가 없다. 9시를 알리는 신호가 땡하고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뉴스가 시작돼서 당시 사람들이 땡전 뉴스라고 했었다. 이제 머지않아 ‘땡윤뉴스’가 나올 것 같다고 하였다 벼라별 방법을 써서 사장을 바꾸는 것을 보면 능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해임하는 데 실패하였다.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에서 보듯 그들이 권력을 사유화해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윤석열 자신과 가족, 그 일당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이었다. 윤석열 정권의 굴욕외교, 역사부정도 다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한 세기 전의 친일파와 똑같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들이 미일의 요구가 있을 때 자신들만의 탐욕을 위해 우리 민족을 전쟁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점이라고 발언자는 강조하였다.

발언자는 그들의 권력 사유화를 막는 길은 무엇이냐고 묻고, 권력의 원래 주인이 되찾아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권력의 원래 주인은 바로 국민이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권력을 맡긴 것인데, 그것을 사유화하려고 하면 그것은 원래 주인이 단연코 막아야 할 일이다. 정의구현사제단 시국미사에서 어느 신부가 주인과 세입자에 비유하면서 세입자가 주인 뜻은 묻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집을 엉망으로 만들면 나가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했었다.

이어서 ‘친일매국행위’ ‘사드기지철거요구’ ‘노조법 2, 3조 투쟁’ 등 집회에서 자주 보는 의제 이외에도 ‘전세사기문제’ ‘물가폭등’ 등 실생활과 관련되는 이슈들도 발언이 되었다. ‘윤석열 정권에 화난 사람 다 모여라’라는 제목처럼 반윤석열 정서를 최대한 끌어모으자는 취지에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참가 인원이 천 명 정도 될까 할 정도로 적었고, 깃발들을 워낙 많이 가지고 나와서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많이 참가했을지는 의문이었다.

발언들이 끝난 뒤 결의문 낭독이 있었다. 일곱 명 정도가 단상에 올라가서 낭독하였는데, 청중들이 별로 안 듣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행진을 했다. 본대회인 총궐기가 열리는 서대문역 사거리로 가는 것이었다. 범시민대회 참가자들은 경찰청 앞에 집결해서 집회를 한다고 하였다. 서소문을 지나가는 코스였다. 행진 신고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에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서울광장을 오른쪽에 두고 지나면서 광화문 쪽을 보니 성조기 집회가 한참 열리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보다는 수가 많이 줄었다. 권력을 차지해서 느슨해진 것인지, 자기들끼리 분열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나이가 많아져서 참가 인원이 줄어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준 것은 맞는 것 같았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광화문에서 시청까지는 민주진보세력이 집회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요즘은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근거지를 잡고 집회를 하는데 주말에도 수십 명 정도가 모였다. 몇 주 전에는 그곳을 지나다가 희한한 광경을 봤다. 이들이 집회하는 도중에 길 건너편에서 차량시위를 하며 이른바 빤스 목사를 비판하는 방송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목사가 알박기했다고 하는 교회 동네 사람들의 피해, 여성 신도들에 대한 추행 소문 등을 집중적으로 방송하였다.

그러자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집회를 진행하는 자가 경찰을 향해 집회 방해하는 자들을 왜 저지하지 않냐고 마이크에 대고 큰소리로 항의하였다. 웃기는 자들이다. 이들이 민주진보집회마다 쫓아다니면서 확성기를 크게 틀고 방해한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자기네 집회 방해는 안 되고, 민주진보집회 방해는 괜찮은 것인가? 경찰이 달려가서 차를 세우게 하고 방송 중지를 요구한 듯하였다. 그러나 방송은 계속되었다.

성조기 부대 집회의 진행자는 기습적인 비판 방송에 당황한 듯 이번에는 저것들 빨리 끌어내리라고 누군가에게 지시하였다. 그러자 특공대 군복을 입은 이들이 달려가서 신호등 때문에 멈추어선 차를 둘러싸고 내리라고 하면서 쌍욕을 해댔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이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차는 계속 멈춰 서 있었다. 경찰이 차가 갈 수 있게 하라고 했지만, 이들을 끌어내리려는 자들도 막무가내였다. 결과적으로 벌써 안 들렸을 방송을 선 채로 하게 한 셈이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 차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비켜 주어서 소란은 멈추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차마 민주진보집회에서는 하기 어려운 말들을 노골적으로 하니까 한편으로는 시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주위에 물어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그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이거나 동네 주민이려니 생각할 뿐이었다.

성조기 부대들은 이제 온갖 방법을 써가면서 민주진보집회를 훼방 놓는 일에 집중한다. 어차피 자신들이 대중의 호응을 받아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였다. 오늘도 이들이 먼저 광화문과 시청 일대에 집회 신고를 해놓아서 부득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할 수밖에 없었고, 본대회도 서대문으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었다. 범시민대회가 시청 동편에 일찍 자리를 잡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서소문로를 향해서 횡당보도를 지나갈 때 집회 때문에 진로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의 항의가 약간 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관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광화문과 시청 일대는 이제 집회나 행진 때문에 여론이 나빠질 것은 없을 정도로 집회와 시위가 일상화되었다. 주말에 이곳을 지나다녀본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날씨가 무척 춥다고 해서 집회 지침에도 따뜻하게 입고 와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행진을 해보니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가끔씩 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따뜻한 햇살 때문인지 견딜 만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행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발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래서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이렇게 절차에 따라 집회를 하고 시위를 하는 것이 오히려 퇴보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신돌석씨는 그런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힘은 들면서도 뭔가 나아지는 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산재 사고 소식, 위장폐업에 맞서 싸우며 몇 년을 투쟁하는 작은 사업장의 소식, 비정규직들의 막막한 현실, 버젓이 법으로 보장된 완전월급제를 공공연히 무시하는 택시회사와 이에 항의하는 투쟁을 하다 폭력을 당하고 결국 분신투쟁까지 한 열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막막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버릇이 신돌석씨에게 생겼다. 1985년에 처음 전태일 열사 추모 집회를 비합법적인 가두투쟁으로 한 뒤 이듬해 11월에도 그 시위는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1984년에 이른바 자율화 조치가 시행된 이후 일정 정도의 집회가 보장되었고, 전태일 열사 추모 대회도 대학로, 국회 앞 등에서 있기는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종교단체와 연관된 노동자들에 국한된 것으로 신돌석씨는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1986년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가두투쟁으로 추모집회를 전개한 횟수가 훨씬 늘었다. 신돌석씨 자신이 1985년에는 절반 이상을 현장에서 보냈고, 노동운동이 뭔지 막 알았던 때였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해 봤는데, 객관적으로도 1986년에 훨씬 시위가 많았던 것 같다. 아마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민당이 이때부터 개헌집회라는 것을 하면서 군중집회가 상당히 보편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에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이 가세하는 일이 많았다.

당시에 대부분의 노동단체나 학생운동세력은 그 집회를 선전 선동하기 위한 장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절정을 보여준 것이 인천에서 일어났던 5.3항쟁이었다. 신돌석씨는 당시 현장에 있었지만 뭐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시위에 참가하기만 했었다. 여기저기 분산해서 소규모 집회를 열면 경찰들이 달려들어서 해산시키고 연행해 가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시위를 하다 달아나는 것을 반복하면서 그 지역을 빠져나온 기억이 있다.

굳이 야당 집회에 가서 시위를 하지 않아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강력한 세력이 학생운동에서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집단이 제헌의회그룹이었다. 이들은 여기저기서 기습적인 시위를 벌였고, 노동운동과 합세해서 이른바 노학연대투쟁을 전개했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1986년에는 서울에 나가는 것보다 지역에서 가두투쟁을 벌이는 일이 훨씬 많았고, 그러다 연행되어서 고문까지 당한 적도 있었다.

그 다음 해인 1987년에는 박종철고문치사 사건과 은폐조작사건이 4.13호헌조치와 맞물리면서 전국이 시위로 들끓었다. 노동자들만의 투쟁은 지역에서도 눈에 잘 띄지 않던 때였다. 그러다 6월 항쟁이 일어나고 6.29로 일단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후퇴를 하면서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이 벌어졌다. 지역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노조 결성, 노조민주화투쟁, 임금투쟁 등이 일어났다. 그때는 정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 없이 뛰어 다녔다.

그렇게 노동자의 대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는 와중에 전태일 열사를 계승하는 다양한 행사가 노동단체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정작 분신과 운명이 있었던 날에 집회는 합법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완전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것은 여론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학생운동 재야운동에서도 그랬다. 그날 하루 전 날에 김대중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양김의 분열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대선에 쏠려 있었다.

1988년부터는 합법적으로 공간을 빌려 전태일 열사 추모집회를 하였는데, 그 해인지 다음 해인지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5만 명 정도가 모여서 한 집회가 인상적이었다. 거기서 1985년에 신돌석씨네 지역도 노동자가 깃발을 들고 시위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로 그 사람을 만났다. 그는 이듬해에 서울지역의 노동운동조직 사건 때문에 보안사에 연행되어 엄청난 고문을 당하고 징역을 살다가 출소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신돌석씨는 그를 보자 무척 반가웠고, 그 역시 신돌석씨를 환한 웃음으로 대하며 즐거워하였다. 그날 집회는 가두 행진으로 이어졌다. 신촌에서 공덕동 로터리를 지나 여의도로 행진하였다. 경찰과 미리 이야기가 된 것인지, 아니면 경찰도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했는지 행진은 여의도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때 행진을 하면서 마치 노동해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노동해방가 3절이 저절로 입에서 나왔다. 하늘은 그 얼마나 눈물 속에 기다렸나.

시위대가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가려고 하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거기까지 신돌석씨는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행진하였다. 그는 원래 마른 편이었는데 고문당하고 징역을 사느라 고생해서 그런지 더 말라 보였다. 신돌석씨는 그를 보면서 마치 8.15 해방 때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감한 독립운동가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그가 지역으로 와서 노동운동을 지도해 주리라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러던 그가 합법적인 진보정당을 한다고 하다가 수구정당인 신한국당에 들어가고 국회의원과 도지사까지 할 때도 신돌석씨는 그래도 그 나름대로 어느 정도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까지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신돌석씨를 아내는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아내 역시 해고자 시절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었다. 아내는 저건 변절이고 배신이지 거기서 뭘 바라냐고 딱 잘라서 말했다.

아내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그가 성조기 부대의 집회에서 발언하는 것을 보고 난 뒤였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냥 운동을 그만두고 자기 나름대로 살면 신돌석씨는 한때 노동운동을 열심히 했던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수구 중에서도 가장 수구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다니 있을 수가 있는 일인가? 아내는 할 수만 있다면 똥바가지라도 퍼부어 주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