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오늘은 윤석열 퇴진 총궐기가 있는 날이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일에 가까이 있는 주말이다. 오래전부터 이때 주말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 또는 민중대회가 있었다. 이 총궐기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던 지역 노동자가 ‘전태일 정신 계승’이 빠졌다고 허전한 느낌이 든다고 했었다. 그런데 민중단체, 시민단체, 일반 시민들을 모두 참여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2시 사전집회인 노동자대회의 명칭에는 ‘전태일 열사 정신 계승’이 있었다.

사전집회는 각 부문별로 2시에 했다. 노동자, 농민, 빈민을 비롯해서 장애인대회가 있었고, 범시민대회도 있었다. 또 서울시청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여성들도 총궐기에 합류하였다. 사전대회인 노동자대회는 총궐기 본행사가 열리는 서대문 사거리에서 열렸고, 농민대회는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열렸다. 서대문역 경찰청 앞에서는 빈민대회가 열렸고, 장애인대회는 서대문역 쌀박물관 인근에서 열렸다.

한국노총은 여의도에서 집회를 하였다. 총궐기에 공식적으로 합류하지는 않았지만, 금속노련이 퇴진운동본부와 함께 하기 때문에 조합원 상당수가 집회 뒤에 총궐기에 합류할 거라고 예상했다. 여의도 집회가 오후 1시에 열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각 산별들도 2시 노동자대회 이전에 집회를 여는데 그렇게 되면 3중 집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 그 뒤에 5시에 하는 촛불대행진까지 참여하면 그야말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떨어야 되는 셈이었다.

날이 꽤 추워졌다. 신돌석씨는 평소 입은 옷에 추리닝을 속에 더 껴입었다. 아내가 내복 입고 나가라고 했지만, 행진할 때 불편할 것 같아서 그냥 나간다고 했다. 집에서 나올 때 꽤 춥게 느껴졌다. 그것보다 문제는 산별집회는 포기했지만 2시에 노동자대회로 가야 하느냐, 지역 단체들과 함께 범시민대회로 가야 하느냐가 고민이었다. 김민호는 고민할 것도 없이 노동자대회에 간다고 하였다. 최미숙은 시민단체 대표 중 한 사람이므로 범시민대회에 가겠단다.

신돌석씨는 여전히 금속노조 조합원이기는 하지만 은퇴한 사람으로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려면 범시민대회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럴 때 요양원에서 알바를 하니까 요양보호사노조나 알바노조로 가면 되나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아무래도 지역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해서 범시민대회로 가기로 했다. 범시민대회는 좀더 광범한 사람들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 ‘퇴진’이란 구호보다는 ‘심판’이란 구호를 쓰기로 했단다.

전철역에서 만나서 함께 이동하였다. 종각역에서 내려서 걸어가는데 보신각 앞에서 전교조가 사전집회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이렇게라도 여기저기서 합법적인 집회를 하는 것이 역사의 발전인가, 아니면 혁명을 가로막는 기만인가? 항상 생각하는 화두이다. 그 옛날 혁명을 주장했던 사람들도 피를 부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 보니 그게 맞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매우 힘든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혁명보다 개혁이 어려운 것이라는 사람들이 있다. 신돌석씨는 그런 말에 실소를 했다. 혁명을 해봤나? 그리고 우리가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들은 모두 진통이 따르고, 반동이 뒤따르고, 다시 반전이 되는 등의 시련을 겪었다. 물론 개혁이란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더 어려운가를 따져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주객관적 상태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신돌석씨가 처음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집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해고된 직후인 1985년 11월이었다. 당연히 그때는 비합법 집회였고, 그러다 보니 가두시위가 되었다. 물론 토요일에 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비밀리에 갑자기 하는 것으로 날짜가 잡혔다. 그때는 집회를 하면 주동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동을 뜬다고 하였다. 거의 틀림없이 잡혀가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해 서울지역의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집회는 공단 오거리라고 부르던 곳에서 했다. 지금은 디지털오거리라고 부르는 공단 오거리는 한때 수도권 노동자들 집회의 상징이었던 곳으로 가리봉오거리, 줄여서 가오리라고도 불렀다. 노동자대회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집회였다. 주최는 노동자였지만, 집회 참가자는 지금과 달리 다수가 동원된 학생이었다. 물론 주최도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주도하였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이때 노동자와 학생이 함께 이런 집회를 개최하는 것을 노학연대라고 불렀다. 물론 이때의 집회들은 미리 신고를 한 집회가 아니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경찰 저지선을 뚫고 몇 명이 몸부림을 치며 구호를 외치다 잡혀가고 그러고 나면 여기저기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시위를 하였다. 시위를 잘 조직한 날에는 경찰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위 주도 세력이 먼저 오거리를 장악했다.

시위주동자들은 대체로 고가도로 위나 건물에 올라갔다. 거기서 현수막을 내리고 유인물을 하늘로 날리면서 선동을 하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이 이곳저곳에서 무리를 지어 시위를 하였다. 그러기를 일, 이십 분 정도 하면 마침내 경찰이 오고 공방전이 계속됐다. 아니 일, 이십 분이면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어느 때는 미리 정보가 새서 고가도로에 오르는 곳이 모두 통제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삼 분 만에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다.

30년도 더 된 오래 전 그날에 비가 쏟아졌었다. 신돌석씨는 그날 시위에 참여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참여라기보다 동원된 것이었다. 당시에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란 조직을 중심으로 수도권의 주요 공개 노동운동조직들은 ‘삼민통일헌법쟁취’라는 주장을 내걸면서 노동자가 개헌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했었다. 그래서 가두투쟁(가투)에도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 서노련의 주장이었다. 신돌석씨의 지역에서는 회의적이었다.

당시에는 가투에 참여할 수 있는 노동자가 많지 않았다. 의식 수준도 그렇고 조건도 그랬다. 해고자 일이십 명 정도였는데, 이들도 대부분 오랜 해고 투쟁으로 지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형식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노련 측의 요구는 막무가내였다. 서노련이 다른 수도권 지역 조직들의 상부는 아니었지만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특히 지금은 수구적인 성향으로 변질된 사람이 당시 서노련의 지도급 인물이었는데, 신돌석씨 지역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웠던 노조 결성 작업에서 그의 지원 역할이 매우 컸고, 학생 출신 활동가들 상당수가 그의 명쾌한 논리와 일관된 실천력 때문에 그를 따르고 있었다. 그에게 교육을 받은 노동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가 직접 지역에 와서 설득 작업을 벌였다.

그의 주장은 노동자들이 앞에서 깃발을 들고 싸우면 대다수가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즉 노동자가 선도하는 정치투쟁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소수라도 아니 깃발을 들 서너 명이라도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신돌석씨는 그 주장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반박할 말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지역에서 활동하던 학생 출신 노동자들도 그의 주장에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했다.

결국 신돌석씨가 총대를 메게 되었다. 그리고 스물을 막 넘긴 해고자 둘이 더 참가하기로 했었다. 정말 무리한 일이었다. 이 날도 경찰이 미리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는지 고가도로 위에서 동이 뜨고 플래카드가 내려지고 노동자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한 십 분여 정도 시위를 한 뒤에나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은 도착하자마자 사과탄을 던지면서 해산 작전에 돌입했지만 이날만큼은 최루탄이 무력하였다. 빗물에 녹아서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노동자측의 화염병도 역시 무력했다. 그러다 보니 접전이 벌어졌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때 부상당한 사람들이 엄청났던 것으로 신돌석씨는 기억했다. 신돌석씨도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쫓겨서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전경들이 쫓아왔다. 커다란 쓰레기통이 있는 곳에서 전경 세 명과 격투를 벌였다. 들고 있던 깃발로 전경들을 막았다. 그러다가 힘이 달리자 깃발을 버리고 쓰레기통을 집어서 던졌다.

전경들이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타서 뒤로 돌아 뛰어가려고 하는데 몇 걸음 못 가서 멈춰야 했다. 반대편에서 전경들이 몰려 왔던 것이다. 끝내 전경들한테 포위되어 집단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는 비가 쏟아붓는 진창에서 그야말로 개처럼 질질 끌려가는 중이었는데 지휘관인 듯한 자가 ‘됐다, 그냥 놔 줘라.’하는 말이 들렸다. 그 상황에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헬멧 아래 무뚝뚝한 표정의 사나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중학교 동창이었다. 김무원. 중학교 때 함께 놀았다면 놀았다고도 할 수 있는 친구였다. 경찰이 되었구나. 그때 신돌석씨가 군대를 제대한 지 3년쯤 되었을 때였다. 김무원이는 전경에 갔다가 그대로 말뚝을 박은 것일까? 아니면 제대를 한 뒤 다시 순경 시험을 봐서 경찰에 들어간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김무원이가 경찰 간부로 들어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신돌석씨는 두들겨 맞아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빗속을 걸어가면서도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그 날 가투에 신돌석씨 지역이 동원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설득하는 사람의 확신에 찬 말에 찜찜하면서도 반박을 못하던 당시 얼굴들을 떠올리면 쓴웃음이 났다. 왜 지금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일까? 신돌석씨와 함께 가투에 가기로 뽑힌 사람은 최윤호였다. 또 한 사람은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가투 현장에 오지 않았다. 최윤호는 야간 고등학교를 늦깎이로 다니면서 공장을 다니다가 해고된 사람이었다.

그가 해고된 것은 당시로서도 좀 의아한 것이었다. 그가 다니던 공장에서는 파업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노조가 결성되지도 않았다. 그때는 추석 하루만 공휴일이었다. 다만 공장들은 관례상 사흘 이상을 놀았다. 그런데 그 회사는 이틀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 그 회사도 매년 사흘씩 휴가를 주어 왔었는데, 이 해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이틀밖에 휴가를 주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일상투쟁이 벌어졌다.

그가 해고된 계기가 된 일상투쟁은 지금은 있을 수도 없는 아주 초보적인 것이었는데, 단체로 결근을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추석 연휴 뒤에 이틀을 더 쉬었던 것이었다. 이틀을 무단결근한다고 해도 당시 근로기준법이나 취업 규칙상 문제될 게 없었다. 문제는 단체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자기가 그냥 결근한 것이라고 발뺌을 한다면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하나씩 불려가면서 협박을 당하면 단체 행동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두들 단체 행동이었음을 시인하게 되었고, 결국 주동을 했던 두 사람이 해고되게 되었다. 그런데 최윤호는 끝까지 자기 혼자 한 일이라고 우겼다. 우직하게 원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그를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자기들은 그에게 야간학교 다니는 것을 보장해 줄 정도로 배려를 해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배신이었다. 결국 그는 해고되었다.

그런 뒤 그는 해고자들과 만나면서 급격하게 생각이 변해 갔다. 그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좀 우려스러울 정도로 빠른 변화를 보였다. 그 날 신돌석씨는 깃발을 가방에 넣어서 들고 갔었고, 최윤호는 유인물을 몸속에 지니고 갔었다. 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이 사전 정보를 입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신돌석씨를 흥분하게 하였다. 신돌석씨는 종횡무진 현장에서 활약을 하였다. 그러다가 전경들한테 붙잡혀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연행될 뻔하였다.

그때까지 그는 최윤호가 어디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풀려나서 혼자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면서 빗속을 걸어가다가 그때서야 최윤호 생각이 났다. 유인물을 몸에 지닌 채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이내 그 생각은 빗물에 녹아내리는 최루가스처럼 사라져 갔다. 알아서 잘 갔겠지 생각한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 일주일쯤 뒤에 최윤호를 만났다. 왠지 초췌해 보이기는 했지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처럼 뛰어 보지도 못하고 초장에 잡혔어요. 그리고는 몸수색을 당해서 유인물이 발각됐죠. 죄송해요. 정말 난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어요. 검문하는 전경을 한 대 패고 튈 수도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조사 받으면서 많이 맞았다고 들었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견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 오랜 시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그가 없어진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가투에 단순히 참가한 사람이 아니라 유인물을 뭉텅이로 몸에 지닌 사람이 어떻게 며칠 만에 나올 수 있었을까. 그런 의심을 가져볼 만도 하건만 그 당시에는 그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다. 왜 그랬을까?

신돌석씨는 그때 오히려 이런 의심을 하는 학생 출신들을 싫어했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면 그런 의심을 할 수 있을까? 신돌석씨는 그 점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그것이 신돌석씨의 인간미라고 누구는 말하기도 하고, 한계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신돌석씨가 맞이한 첫 번째 전태일 정신 계승 노동자대회는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기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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