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윤자는 신돌석씨와 하던 소모임을 그만두고 직장을 옮겼는데 거기서도 노조를 만드는 소모임에 들어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직장을 옮기고 나면 이제 소모임 같은 것은 안 하리라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서는 윤자 같은 애가 눈에 안 띌 리가 없었다. 윤자에게 접근해서 노동법 공부를 같이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당시 조장이었고, 윤자의 남편이 되는 사람이었다. 윤자도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모임에 함께 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몇 군데 사업장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 소모임을 꾸려 나갔다. 1987년 6월 항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윤자는 나중에 남편이 된 조장과 함께 시위 현장에도 많이 참여했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조장 오빠가 시위하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믿음직했다. 윤자 스스로 자기가 그렇게 용감할 줄 몰랐다. 이제 과거의 움츠렸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청혼을 받았고, 그해가 끝나기 전에 결혼했다.

윤자와 남편 사이에 결정적인 상처가 난 일은 노조 결성 움직임을 할 때 있었던 일이었다. 윤자네 사업장은 학습을 하고 외부 기관에 가서 교육을 받으면서 소모임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때 파업도 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노조 결성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윤자도 그 중 하나의 소모임에 있었는데 지역 여러 곳에서 노조 결성을 주도하는 학생출신 노동자가 있었다. 윤자보다는 열 살 이상이 많았다.

그 사람이 소모임을 순회하면서 점검하고 이른바 지도를 했다. 그는 대학 출신이지만 민주화투쟁으로 구속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출신들 중 나이가 좀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았다. 일찍부터 노동현장에 들어가서 노동자를 조직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단다. 현장론자라고 했다는데, 어떤 이들은 준비론자라고 불렀다. 이 사람은 용접, 배관 등 자격증도 여럿 있었고, 20대 중반부터 현장에 들어와서 선반을 하다 손가락 두 개가 잘렸다.

어느 겨울날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이 소모임에 들어왔다. 이런저런 보고들을 듣고 문제를 지적하는데 모두들 감탄을 했다. 윤자도 그 사람의 카리스마에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느꼈다. 모임이 끝나고 근처 막걸리집에서 뒤풀이를 하고 집에 가는데 그 사람과 윤자가 같은 방향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가면서도 계속 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소신에 차 있고, 알찬 내용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책 몇 권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던 이야기를 멈추기 아쉬우니 어디 여관이라도 가서 몸 좀 녹이고 이야기를 더하자고 그가 말했다. 처음에는 좀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한테 여관에 가자고 할까? 그런데 너무 확신에 차서 하는 그의 이야기에 이상한 의심을 하는 자기가 한심한 듯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금도 다른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좀 망설이다가 따라갔다. 소주 한 병과 맥주 한 병을 그가 들고 들어갔다.

그날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면 남편도 이해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큰 오산이었다. 그 새끼 저 새끼 욕을 하면서 자기가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지역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그를 찾았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그 사람이 그런 짓을 상당히 많은 여성 노동자들한테 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확인은 못했지만 윤자 외에도 그런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윤자가 직접 듣기도 하였다.

남편은 단지 그를 찾아다니는 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회사에 노조결성 움직임이 있다고 알렸다. 결국 노조 결성은 훗날로 미루어졌다. 나아가서 구사대로 나서기도 하고, 경찰의 푸락치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도 그 지역에서 사라졌다. 아주 오래 지난 뒤에 그가 무슨 정당인가 한다고 하다가 뉴라이트인지 뭔지가 되어서 노동운동이 친북이라고 비난한다는 말을 들었다.

남편은 그렇게 미친 듯 날뛰다가 결국 집을 나갔다. 윤자도 그 지역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집을 정리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 남편이 수소문해서 어쩌다 한 번씩 찾아왔다. 와서는 자기를 들볶았다. 옛날 조장 이야기, 학생출신 노동자 이야기를 거듭했다. 어떤 때는 때리기도 했다. 진짜 죽이고 싶다는 게 뭔지 그때 처음 느꼈다. 웃기는 것은 그러고는 꼭 관계를 하고 갔다. 그럴 때는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했다. 끝나면 싸늘해졌다.

몇 년 그런 식으로 살다가 아이를 가졌다. 지금의 아들이다. 혼자 낳아보겠다고 발버둥쳤지만 힘들었다. 남편 마음이 돌아서고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임신 소식을 듣고 남편은 처음에 당혹해 하다가 기뻐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또 다시 그 애 누구 애냐고 들볶기 시작했다. 너무 힘들어서 덕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돌석씨 아내가 윤자를 다시 본 것이 그때였다고 한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남편은 아이가 태어난 뒤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호적상으로는 부부 사이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나타났다. 며칠 조용히 지내면서 애 데리고 놀러 나가기도 했다. 그러더니 술을 마시니까 또 행패였다. 아들이 누구 새끼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들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꺼지라고 욕을 했다. 애가 보는 앞에서 실컷 두들겨 맞았다. 총기 소지가 안 되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렇게 어쩌다 한번씩 찾아와서 두드려 부수고 때리고 하는 세월을 살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만 나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들이 고등학교였을 때였다. 여자 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 자기 애니 좀 키워 달라는 것이었다. 화가 났지만 받아들였다. 애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윤자는 애들을 자기가 키우는 대신 이혼에 동의해 달라고 했다. 망설이더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는 한참 나타나지 않았다. 꼼짝없이 몇 년을 어린 여자 애들을 키우게 되었다.

아들은 그때 학교에 가고 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 이야기를 듣고는 화를 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애들을 쫓아낼 수는 없었다. 아들은 그 애들한테 말도 하지 않았고, 애들은 무서워서 떨기만 했다. 남편이 다시 왔을 때 아들이 따져 물었다. 이럴 수가 있냐고 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대거리냐고 아들의 뺨을 갈겼다. 아들도 이제 몸집으로는 어른이 다 되었다. 남편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크게 울부짖었다. 네가 사람이냐. 이 짐승아.

남편은 갑작스러운 아들의 태도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 길로 아들은 집을 나갔다. 학교도 그만두고 한참을 방황했다. 이제는 건설 현장을 다니면서 용접공 일을 한다고 들었다. 가끔씩 찾아오기는 했다. 윤자는 아들에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잘 살기만 바랄 뿐이었다. 남편이 데려온 애들은 자기 엄마가 마산인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리로 갔다.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남편도 그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서류만 보내와서 이혼 절차를 마무리했다.

다들 떠나고 혼자 홀가분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부음을 들은 것이었다. 가족관계부를 통해 아들을 확인하고 연락이 갔다. 아들은 자기는 아버지가 없다면서 장례 치르기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댁 식구 몇에게 간 모양인데 다들 외면한 모양이다. 결국 윤자에게 연락이 왔다. 윤자는 아들을 찾아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아들은 말없이 듣다가 ‘나는 아버지가 없어요. 엄마도 이젠 정신 좀 차리세요’라는 말만 남겼다.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서운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잘 안 되었다. 물론 사랑은 아니었다. 그를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연민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잘 안 되었다. 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운 정이라도 어쨌든 살 섞고 아이까지 낳은 사이이니까. 신돌석씨의 아내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정이지만 관습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미련 같은 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의 완강한 거부에 낙심한 윤자가 찾은 사람은 역시 평생의 동지 덕자였다. 그리고 덕자는 신돌석씨 아내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간단하게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했다. 윤자가 어디 납골당이나 절이라도 찾아서 유골 가루를 모시자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자신 없어 하면서 슥 꺼낸 이야기였다. 덕자가 정신 나간 년이라고 호통을 쳤다. 결국 시립승화원이란 곳에 유골 가루를 묻을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거기 묻었다. 표지는 세울 수 없는 곳이었다.

덕자는 그러고 돌아오면서 계속 울었다. 덕자는 저 인간은 저래도 싸니까 그만 울라고 했다. 윤자는 이제는 정말 못 보는 모양이네. 여기 와도 찾을 수 없는 것 아니냐.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중얼거리며 울었다. 신돌석씨 아내가 듣고 있다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서 팩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그 인간이 너와 니 아들한테 한 짓을 생각해 봐라. 아이고 그러고도 아직 그 인간을 챙기러 드냐. 그러니 여자들이 그 모양으로 사는 거다.

성평등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옛날에는 그냥 여자가 차별받는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좀 된 이야기로 프로에게는 남녀 차별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 책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다. 신돌석씨가 20대일 때만 해도 여자 판사라는 사람은 몇 명 없었고, 여자 검사는 하나도 없었다.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여자 국회의원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여자가 일찍부터 진출했던 의사도 거의 대부분 남자였다.

물론 이런 진출은 의미가 별로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대기업 CEO나 이사 비율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여자에게는 여전히 사회지도층이 되는 데는 유리천장이 있다고들 한다. 신돌석씨는 그런 세계를 잘 모르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에서 넘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잘난 여자의 사회적 진출이 쉬워지는 것이 성평등은 아닌 것 같다. 그 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는 여성에 대한 차별은 별로 나아진 것이 아닐 것이다.

한국의 여성 지위가 상당히 상승된 듯하지만 착시현상도 많다. 수치상으로만 보아도 OECD 평균 남녀 임금격차가 11.9%인데 한국은 31.1%이다. 38개 회원국 중 가장 크다. 1996년 이후 줄곧 1위라고 한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고용률은 34세 정도까지는 68.7%이다가 30대 후반에 들어서면 57.5%로 급격히 하락한다. 경력 단절이 되는 것이다. 그 뒤 60대가 되면서 늘어나는데 돌봄 청소 등 상대적으로 열악하게 평가되는 직종에 여자가 투입되기 때문이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노동운동을 하면서 잉여생산물과 함께 잉여노동의 착취라는 개념을 배웠다. 남녀 불평등의 문제는 사실 가족공동체에 주어진 필요노동에 대해 누가 그것을 감당하느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일상생활을 돌아보니 역시 여자들이 필요노동의 상당 부분을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해야 했다. 그런 관습은 사회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심지어 진보적이라고 하는 운동단체에서도 차를 마시고 나서 컵을 씻는 일은 거의 여자들이 했다.

그런 것 때문에 문제 제기를 하고 행동으로 그것을 바꾸려고 하는 여자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다수인 남자들에 의해서 성격 이상자 취급을 당하고, 그러다 보면 지쳐서 그만두기 일쑤였다. 심지어 여자들도 그런 여자들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았다. 괜히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지금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많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생활화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성평등 문제에서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남자들은 여전히 불편한 문제 정도로 취급을 한다. 진보적인 사람들도 거의 예외가 없다. 언젠가 신돌석씨는 역사 강의를 들으면서 ‘환향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환향녀라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때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커다란 욕이 되었다. 그래서 생긴 말이 화냥년이라고 한다.

요즘은 화냥년이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신돌석씨는 어렸을 때 아주 많이 들어본 말이다. 화냥년이라는 말은 바람기가 있거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자 혹은 몸 파는 여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동네에서 여자들이 싸울 때 쓰는 욕이 꼭 화냥년이라는 것이었다. 야 이 화냥년아 라고 하면 네가 나 화냥질 하는 것 봤어 이 년아. 이런 식으로 욕을 하면서 싸우곤 하였다.

그런데 환향녀를 화냥년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수백 년이 지난 뒤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간 분들이 돌아와서도 자신이 바로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 때문에 일본 정부는 위안부는 없었다는 등 망언을 계속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엉뚱한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것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하니 한심한 일이다.

강제로 당한 추행, 강간 등을 마치 여자에게도 잘못이 있었고, 그것이 여자의 몸을 더렵혔다는 등으로 인식한 것은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온 왜곡된 인식이다. 하지만 그런 인식도 변해가고 있다. 무려 60년 전에 강간범의 혀를 깨물어서 저항을 했는데 오히려 상해죄로 가해자가 되어 감옥에 갔던 여인이 있다. 이제 재심을 청구하고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려 하고 있다. 정말로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몇 년 전에 섬에서 근무하던 초등학교 여교사가 주민들에게 강간당한 뒤에 남자 친구에게 연락하고 가해자들을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이전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용기 있는 일이다. 윤자와 남편의 경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성고문 당하고 그것을 폭로한 권인숙씨의 경우는 40년이 다 된 일이지만 용기 있는 행위 중에서 가히 으뜸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러한 용기 있는 행동과 남자들의 처절한 반성과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다.

환향녀와 관련된 인식도 이제 변화가 오는 듯하다. 물론 이론상으로야 오래 전부터 그랬지만 얼마 전 드라마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을 보고 사실 신돌석씨는 내심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청나라에 끌려가고 인신매매범들에게 팔려서 험한 꼴을 당한 양반집 여인네가 그 남편이 이혼을 거론하자 험한 꼴 당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하고,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어서 이혼을 한다고 말했다. 매우 당당한 태도였다.

그런데 요즘은 성평등 문제가 이상하게 번지고 있다. 오늘 저녁에 김민호와 최미숙을 만나서 지역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가 여성운동 이야기가 나왔다. 김민호는 평소 지론이 그렇듯 여성운동이 너무 부르주아식으로 되어서 운동에 해를 끼친다고 했다. 최미숙은 동의하지는 않지만 여성운동에 세대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젊은 여성들의 여성운동이 계급 문제를 도외시한다는 점을 거론했다.

신돌석씨는 현재의 운동이 분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분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평소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여성운동, 환경운동, 교육운동 등 의제별 운동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려면 분화의 현실을 인식해야 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 다른 분야의 운동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견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만 하면 운동이 점점 파편화되고 분열로 간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었다.

신돌석씨가 여러 번 해온 말이라 그런지 두 사람 다 틀렸다고 하지는 않고, 그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운동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면서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피곤한지 맥주를 마시다 말고 졸았다. 신돌석씨는 윤자를 만나고 싶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나서 말하고 싶었다. 시작은 네 잘못이 아니지만, 이후에는 네 잘못이기도 하다. 이제는 깨어라. 일어나서 앞으로 당당히 나가라.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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