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랑 / 주권자전국회의 공동대표, 21세기 민족주의포럼 대표 

 

58년 개띠 노동자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노하면서도 낙심하고 두려움에 떠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신돌석씨는 이 모든 일이 우리가 진전한 데 따른 역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거대한 힘인 듯하지만 사실은 몰락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일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시작되었으나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고, 낡은 것들이 사라지지 않으려고 완강히 버티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되돌리려는 세력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쐐기를 박고,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서 나가야 합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귀한 삶이 존중받을 때 세상은 제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일을 위해 신돌석씨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 반드시 역사가 다시 제자리를 잡아가고 전진해 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통일뉴스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와 응원과 질책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3. 9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송영을 마치고 10시쯤 집에 들어갔다. 아내가 없었다. 벌써 나간 모양이다. 어디를 갔을까. 아침도 안 먹고 나간 것 같았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화가 나서 안 일어났던 거라면 지금 전화해야 안 받거나 받아도 퉁명스러울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전화할 까닭이 없다. 그래서 그냥 생각지 않기로 하고 핸폰으로 뉴스를 좀 보다가 텔레비전을 틀었다. 여기저기 채널을 돌리는데 볼 만한 것이 없어서 읽다 만 책을 보려고 펼쳤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저녁 송영을 마치고 약속에 갔다가 집에 돌아간 것이 밤 10시였다. 당연히 아내가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윤자 남편 장례식장에 또 갔나? 하루 종일 거기 가 있을 까닭이 있나 하는 생각에 약간은 화가 나기도 했다. 아내가 돌아온 것은 12시가 다 된 때였다. 손에 맥주를 두 병 들고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앉더니 맥주 병을 땄다. 그리고는 컵을 가져와서 신돌석씨에게도 권했다.

얼떨떨한 채 술잔을 받아든 신돌석씨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아내는 윤자 남편 장례식장에 갔다 왔단다. 오늘 발인을 하고 화장터까지 같이 갔다가 윤자 덕자와 지금까지 수다 떨다가 온 것이란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윤자의 일생은 ‘여자의 일생’ 그 자체란다. 엄마 세대에나 있었던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 세대까지 있는 일이란 것이 정말 화가 났단다. 갑자기 남자들이 다 꼴 보기 싫어졌단다.

신돌석씨는 이제야 오늘 아침부터 보였던 아내의 태도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그럴 까닭이 있나 하는 생각에 좀 황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아내가 미안하단다. 모든 남자를 미워할 까닭도 없고, 더욱이 당신 같은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는 생각한단다. 하지만 남자들이 정말 깊이 생각하고 태도 변화를 해야 할 일이고, 여자들 또한 정말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단다.

‘여자의 일생’을 말하자 아내가 이따금 부르던 이미자의 노래가 떠올랐다.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노래방에 간 적이 있었는데 애창곡이라고 벽에 붙어 있던 노래들 중에 이 곡이 있었다. 신돌석씨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이 노래가 애창곡 중에 있는가? 신돌석씨는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노래방에서 부르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애창곡 50곡 중에 들어간다니 놀라웠다.

노래방에 갔다 온 뒤 송영하러 요양원에 갔을 때 요양보호사한테 슬쩍 물어봤다.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아냐고. 그랬더니 뜻밖에도 요양원에서 매일 듣는 노래가 ‘여자의 일생’이란다. 할머니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나. 특히 치매가 좀 심한 할머니 중에는 고장 난 전축에 얹어진 레코드판처럼 이 노래의 특정 부분을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사람들이 있단다. 그런 할머니들의 취향 때문에 이 노래를 요양원에서 틀어주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신돌석씨처럼 도시 변두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대중가요를 많이 듣고 자랐다. 신돌석씨가 어렸던 1960년대에는 이미자, 최희준의 전성시대였다. 특히 신돌석씨는 대중가요에 대한 감수성이 강한 편이었다. 이 사람들의 노래를 상당히 많이 안다. 언젠가 한 번 세 보니 두 사람의 노래를 각각 열 곡 이상씩 알고 있었다. ‘여자의 일생’도 그 중 하나인데 사실 남자인 신돌석씨는 크게 공감하지 않으면서 그냥 어린 시절 추억으로 흥얼거리는 정도였다.

그런데 아내가 그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새삼 다시 떠오르곤 했었다. 아내는 서울 근교지만 농촌 출신이라 그런지 대중가요를 많이 알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미자 최희준 등의 노래보다는 팝송이나 이른바 세시봉이라고 불리는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혹은 4월과 5월, 어니언스 등의 노래를 더 좋아했다. 언젠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공장에서 주로 그런 노래들을 들었기 때문이란다. 희한하다는 생각을 했다.

신돌석씨가 다닌 쇠공장들에서는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 기계 소리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노래방이 유행하기 전인 1980년대만 해도 술 마시고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주로 일제 강점기 혹은 50년대의 노래였다. 남인수, 김정구, 고복수, 현인 등의 노래를 불렀고, 남진이나 나훈아 노래도 많이 불렀다. 간혹 송창식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아주 드물었다. 왜 그런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여자들이 주로 일하는 봉제공장에서는 하루 종일 라디오나 테이프를 틀어 놓고 일을 한다. 신돌석씨도 가방공장에 다녀 봐서 그 분위기를 안다. 그런데 그때 공장에 다니던 여자들은 이른바 트롯트를 잘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아내에게 듣고 알았다. 왜 그랬냐고 물으니 공장 따라 다르겠지만 자기 공장 언니들은 쪽팔리게 공순이 티 내려고 그런 노래 부르냐고 했다고 한다. 그것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트로트를 잘 부르지 않는 아내가 ‘여자의 일생’은 종종 불렀다. 아니 어쩌면 아주 가끔인데 신돌석씨에게는 자주 부른 것처럼 들렸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일하다가도 그 노래를 부르면서 마지막 부분을 아주 애절하게 불렀다.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이란 가사이다. 그것을 들을 때마다 신돌석씨는 지가 무슨 그렇게 참을 일이 많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자기 마음대로 할 것 다 하고 살면서 말이다.

사실 아내는 시집살이 한 번 안 하고 살았다. 시집 왔을 때 이미 시부모는 다 돌아가셨다. 있어야 시아주버니 한 사람, 손아래 시누이 한 사람이었다. 시누이인 선옥이가 약간 까탈스럽기는 하지만 그렇게 심하게 할 형편도 아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설움’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나오고 공장생활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뒤에도 가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그게 여자이기 때문이고, 말 한마디 못했는가?

신돌석씨는 그 점에서는 인정하기 힘들었다. 여자라서 오빠나 남동생보다 교육의 기회가 덜 하긴 했지만 꼭 그것 때문에 가난했던 것은 아니고, 더욱이 아내는 말 한마디 못할 성격도 아니고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이 노래를 좋아하고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낸다고 하는 것일까? 참으려 한 적도 없고, 눈물로 보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내는 윤자를 보면서 여자로서 지니는 동류의식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모양이다.

윤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덕자로부터 들은 것은 일주일 전쯤이라고 한다. 윤자는 남편과 헤어진 지 오래라서 그냥 그런가 보다고 했단다. 그런데 윤자가 장례를 치러 주어야 한다고 했다면서 덕자에게 도움을 청한 모양이다. 그 남자는 윤자를 버렸다. 그리고 다른 여자와 살면서 애를 둘씩이나 나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여자와도 헤어지고 애들과도 연락이 끊긴 상태로 노숙인으로 살았나 보다.

사망 소식이 윤자에게 전해진 뒤 본인은 죽기 전에 자신을 행려병자로 처리해 주고, 가족에게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한다. 행려병자라는 말은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떠돌아 다니다 병을 얻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노숙자 혹은 노숙인에 대해 병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라서 요즘은 잘 안 쓰는 용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전에는 참 많이 듣던 말인데, 요즘은 뉴스에서도 행려병자라는 말을 듣기 힘들다.

행려병자로 처리 되면 가족이 없다는 것으로 장례 절차는 불을 보듯 뻔하다. 그냥 화장해서 재를 아무데나 쳐박아 두는 식으로 될 것이다. 의학 연구와 교육 목적으로 시신을 기증하는 경우도 있는데 거기에는 본인 동의서와 가족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윤자와 남편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당연히 아들에게 먼저 아버지의 죽음이 알려졌다. 아들은 장례 치르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더욱 윤자가 애가 타면서 덕자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신돌석씨는 아내에게 윤자 소식을 이번에 처음 들은 것이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니라고 하면서 덕자를 통해 가끔 들었고, 보기도 몇 차례 했다고 한다. 윤자가 형부한테는 자기를 봤다고 절대로 말하지 말아 달라고 했고, 덕자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해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윤자가 신돌석씨와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해서 사실 마음이 별로 안 좋았는데, 이래저래 이야기를 해보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본인 당부이니 그냥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내는 거기서 조금 멈칫했다. 하지만 신돌석씨로서는 왜 말하지 않았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윤자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괜히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아내가 이어서 하는 말만 기다렸다. 윤자가 결혼한 남편은 같은 공장에 다니던 조장이었다고 한다. 결혼식에는 덕자가 갔다 왔고, 아내는 전혀 몰랐단다. 그때도 윤자는 덕자에게 이전에 알던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삽화-백소(白笑)]
[삽화-백소(白笑)]

윤자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윤자의 첫사랑은 성수동 있던 시절 재단사였다. 그런데 그가 윤자를 배신했다. 윤자의 말에만 의존하는 것이므로 어느 정도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아무튼 그는 여러 여자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었고, 결국 윤자는 그 과정에서 그냥 한때 즐기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어떻게 그와 윤자의 관계를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걸로 윤자를 괴롭혔다고 한다.

첫날밤부터 처녀막이 없다는 것으로 화를 내고 쌀쌀하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도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신돌석씨 세대 정도까지는 첫경험 때는 당연히 여자의 질에서 출혈이 있는 것으로 알고, 그것이 없으면 처녀가 아니라는 식의 생각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절반 이하의 사람만이 있는 경험이고, 첫경험이 아니더라도 출혈은 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그것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첫날밤에 출혈이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신돌석씨가 알기에도 윤자는 처녀가 아니다. 연선이라는 친구가 가공의 인물이었다면 그날 했던 이야기는 윤자의 이야기였으리라. 윤자의 아픔을 그런 식으로 돌려서 말한 것 아니었을까? 물론 처녀냐 아니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남자가 총각이냐 아니냐가 의미가 없는 말이듯. 그런데 희한하게 여자만 신체적 조건으로 그런 말들을 하는 세월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내는 맥주를 한 컵 들이켜고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다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윤자에게는 처녀막이니 하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도 윤자가 신돌석씨에게 한 이야기를 들었나 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였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자신과 아주 가까웠던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윤자가 기억이 될 듯 말 듯 한 아주 오래전 어린애 시절에 윤자는 상습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엄마 아빠가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 사이에 윤자를 돌봐주는 정신지체장애인 언니가 있었다. 일 나갈 때마다 엄마 아빠는 윤자를 나무에 매어 놓았다. 그 언니가 나무에 매어 있는 윤자를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네 건달 하나가 거의 매일 그리로 왔다. 정신지체장애가 있는 언니는 그냥 속수무책으로 윤자가 보는 앞에서 강간을 당했다.

그리고 이 건달이 그 어린 윤자까지 강간을 하고 갔다. 처음에는 아프기만 하고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거의 매일 그 짓을 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이 고발을 해서 건달은 잡혀갔다. 하지만 피해자인 언니는 제대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진술할 수 없었고, 윤자도 너무 어렸기 때문에 제대로 된 진술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엄마 아빠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

그때만 해도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여자만 손해라는 의식이 팽배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 건달은 풀려났다. 아마도 불구속 입건 정도였을 것 같다. 그 건달이 다시 언니와 윤자를 찾아왔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실실 웃으며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던 그 건달의 잔인한 모습이 뇌리에 확 박혔다. 그것이 윤자의 일생에 아물지 못하는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남편에게 할 수는 없었다. 이해할 리도 없고 더욱 기승을 부릴 인간이었다. 그는 처녀막이 상했다는 것만 중요한 인간이었다. 아니 이런 자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고 윤자는 다른 이야기를 남편에게 고백했다.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것으로 남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리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을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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