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인간은 말(말씀, 言語)로 생각하고, 글(글자, 文字)로 궁리한다. 우리 민족의 말은 단군 이전부터 형성되었고, 민족의 역사를 이어 가면서 발전하였다.

우리 선조들은 한때 한자를 썼고, 지금 쓰는 우리 글자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명칭으로 1443년에 세종대왕이 창제한 후 1446년에 반포하였으니, 올해는 『훈민정음』 창제 580주년이다. 세종대왕의 공로는 우리 글자를 만든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언어를 우리 글로 정리하도록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잡아 놓은 데 있다.

조선왕조가 1910년에 망하였어도, 우리 말이 지켜진 것은 우리 글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독립시킨 힘은 우리 말과 우리 글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글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두 가지 시도를 언급하고자 한다.

1. 한글 창제를 변경하려는 시도

한글의 원류에 대하여 이런저런 여러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훈민정음』 해례본이 공개되고 과학적 철학적 원리에 의하여 세종대왕(世宗, 재위 1418~1450)이 독창적으로 창제한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각 주장은 일소되었다.

그런데도 친일 전력을 가진 한 몽상가에 의하여 이른바 ‘가림토 문자’라는 허구가 조장되었고(1979년), 2019년 일각에서는 신미(信眉)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나랏말싸미]를 만들어 세종대왕의 창제 사실을 훼손하였다.

『훈민정음』, 곧 우리 글의 창제에 관한 제1차 사료는 모두 세종대왕을 창제자로 지목하고 있다. 창제 당시 최만리(崔萬理, ?~1445) 등 『훈민정음』 반포에 대한 부정적인 신하들의 폄훼가 있었고, 심지어 정인지(鄭麟趾, 1396~1478)의 『훈민정음』이 고전(古篆)을 닮았다는 언급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개한 이후에는, 정인지마저 이해 부족으로 비평한 것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 글에 대하여 전근대적인 인식에 머물러 있다.

‘가림토 문자’와 신미 창제설에 혹(或)하는 순간 세종의 위대한 업적과 우리 글의 정체는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 글의 독창적 창제원리를 폄훼하고 창제자를 변경하거나 끌어 올리려는 시도는 민족의 정체성을 흐트러뜨리려는 시도이다.

실제로 고대에 이른바 가림토 문자가 있었고, 그 글자가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과 유사한 글자라고 해도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와있는 창제원리에 미루어 보면, 허상의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 글자에 영향을 준 것이 전혀 없다.

『훈민정음』의 글자가 허상의 가림토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황당한 주장은 ‘ㄱ’과 ‘ㅜ’가 알파벳 ‘T’의, ‘ㄴ’이 ‘L’의, ‘ㄷ’이 ‘C’의, ‘ㄹ’이 역‘S’의, ‘ㅅ’이 ‘A’의, ‘ㅇ’이 ‘O’의, ‘ㅈ’이 ‘Z’의, ‘l’가 ‘I’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주장이다. 또한 우리 문자의 ‘ㄷ’이나 ‘ㅌ’는 한자의 ‘亡(망)’, ‘ㄹ’은 한자의 ‘己(기)’, ‘ㅁ’은 ‘口(구)’가 아니다.

2. 한글 띄어쓰기의 연원을 변경하려는 시도

어느 나라의 말이든 말할 때, 호흡을 멈추고 말하지 않고, 말하면서도 호흡을 조절하며 말한다. 곧 듣는 상대가 쉬 이해하도록 숨을 쉬며 억양을 조절하며 말하는데, 그것이 찰나적으로 띄어 말하는 것이 된다.

글을 쓸 때는 띄어서 말하는 절차에 따라 띄어서 쓰기를 한다. 영어나 유럽어에서는 띄어쓰기가 있다. 그들의 문자는 상형문자가 아닌 알파벳이므로 띄어쓰기를 안 하면 문자 소통이 안 된다. 반면에 중국어나 일본어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그것은 중국말에는 뜻글자와 어조사가 있기 때문이고, 일본어에는 한자와 일본 글자를 혼용하여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종은 한글을 창제할 때부터 한글 전용을 생각한 것 같다. 세종27년(1445)에 편찬되어 세종29년(1447)에 간행된 악장⸱서사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우리 글을 앞세운 우리 글로 지어진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1445년에 편찬되었다면 1446년에 한글 반포하기 1년 전이다.

그러나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이후에는 우리 글은 대체로 한문(漢文)과 혼용하여 사용하여왔다. 한자보다는 1/2 크기의 우리 글로 토를 달고 있는 예도 있다. 우리 글에 띄어쓰기의 필요성이 나온 것은 한글을 창제한 직후부터이지만, 본격적인 우리 글 띄어쓰기는 우리 글 전용을 시도할 때부터이다.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조선시대의 한글 가사 및 시조를 보면 우리 문학은 4.4체나 4.5체 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구태여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도, 가독(可讀)하는 방법에 따라 어렵지 않게 읽혔다. 그러나 다양한 학문이나 문장을 빠르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띄어쓰기가 소용되었고, 또한 이름이나 직책과 같은 명사는 정확한 단어 표기가 필요하게 되어 초보적인 띄어쓰기가 이미 조선중기, 특히 18세기 말에 간헐적으로 시도되었다.

따라서 우리 글 띄어쓰기는 서양 선교사의 창안이 아니다. 호머 비 헐버트 박사는 더군다나 아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중에 현대 형식의 띄어쓰기를 한 문헌은 1877년에 영국인 존 로스(John Ross, 1841~1915) 목사가 쓴 조선어 교재인 『Corean Primer (조선어 첫걸음)』로 확인된다.

1882년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모두 『Corean Primer』를 통하여 조선어를 배웠고, 그들은 당연히 존 로스 목사의 띄어쓰기를 보았다. 그런데 존 로스 목사는 1876년에 이응찬(李應贊)에게서 우리 말을 배웠다. 즉 이 말은 존 로스 목사의 띄어쓰기가 존 로스 목사가 착안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우리 말을 가르친 이응찬에게서 우리 말을 배울 때 그렇게 배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우리 말을 가르칠 때 한 마디, 한 단어씩 띄어서 가르친다. 그것이 언어 교습의 원리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존 로스 목사에게 전달된 것이다.(말을 가르칠 때 한마디 한 단어씩 띄어서 가르친다는 점은 추록에서 언급한다)

존 로스 목사가 1877년에 저술한 조선어 교재 『Corean Primer』 이후에, 1887년 스코트가 쓴 책과 1890년 언더우드가 쓴 <한영문법>에서도 띄어쓰기가 되어 있으며, 1895년 간행된 순 한글의 <구셰교문답>은 띄어쓰기를 철저하게 사용하고 있다. 

1896년 4월 7일 창간한 『독립신문』은 띄어쓰기를 도입한 최초의 신문이다. 이 신문의 영문판 한 면의 편집 영역을 헐버트 박사가 담당하였다. 이런 사실을 두고 헐버트 박사가 『독립신문』에 간여한 것을 확대하여 마치 헐버트가 『독립신문』을 좌지우지한 것으로 재생산하여,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 고유의 우리 글 띄어쓰기를 헐버트가 창안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명백한 허구이다. 헐버트가 1889년에 저술한 『사민필지』 한글본은 1899년 초판본이든 1906년 재판본이든, 1909년 삼판본이든 띄어쓰기가 전혀 없다. 초판본에 엥길리국(영국), 합중국(미국)이라고 했던 국호를 재판본에서는 영국과 미국으로 수정했다. 이는 재판본의 조판을 새로 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도 재판본에서 띄어쓰기는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1896년 『독립신문』의 띄어쓰기가 헐버트와는 관련이 없다는 물증이다.

우리 글 띄어쓰기는 『독립신문』 창간 이전에도 있었고, 그 필요성은 한글 창제할 때부터 인식됐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언해본 저서에서 띄어쓰기 효과가 나도록 시도한 바 있으며, 그 초보적 연원은 조선 중기, 늦어도 18세기 말로 올라간다. 우리 글 띄어쓰기의 공식화는 1933년 한글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여 띄어쓰기와 각종 문장부호를 정착한 것이다.

3. 맺음말

우리 글 창제의 공을 이른바 가림토 문자라는 허상에 띄워 놓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우리 글 『훈민정음』은 생년월일이 분명한 최초의 문자이다.

또한 우리 한글 띄어쓰기를 서양인이 창안하였다는 모 단체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친미 사대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4. 추록 ; 주시경 선생과 한글 띄어쓰기

말을 가르칠 때 띄어서 한 마디, 한 단어씩 띄어서 가르친다는 것은 상식적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 물적 증거를 제시한다. 필자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어독본』을 7종 가지고 있⸱다. 권수별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1』, 1923년 7월 10일 번각발행. 한글 전용, 띄어쓰기와 구두점을 하였으나 명사와 조사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1』, 1923년 7월 10일 번각발행. 한글 전용, 띄어쓰기와 구두점을 하였으나 명사와 조사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4』, 1924 1월 20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인용 속담이나 시조도 띄어쓰기를 안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4』, 1924 1월 20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인용 속담이나 시조도 띄어쓰기를 안 하고 있다. [사진 제공 – 이양재]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1』, 대정 12년(1923) 7월 10일 번각발행. 조선글 전용,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있다. 명사와 조사(助詞, 토씨, postposition)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2』, 대정 12년(1923) 5월 5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있다. 명사와 조사도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4』, 대정 13년(1924) 1월 20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인용 속담이나 시조도 띄어쓰기를 안 하고 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4』, 소화 9년(1934) 2월 20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인용 속담이나 시조는 띄어쓰기를 하고 있다.
- 『조선어독본 권5』, 소화 12년(1937) 1월 10일 개정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6』, 대정 13년(1924) 2월 20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 『보통학교 조선어독본 권6』, 소화 10년(1935) 3월 31일 번각발행. 조선글⸱한문혼용, 띄어쓰기가 안 되어 있으나 구두점이 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 교과서를 참조해 보면, 일제강점기의 소학교(小學校, 지금의 초등학교)에서 우리 말을 가르칠 때 띄어 말하기로 가르치며, 교재에서는 서구식 띄어서 쓰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교재가 조선글⸱한문혼용으로 바뀌면서 띄어쓰기가 사라진다.

존 로스 목사의 『Corean Primer』에서 보이는 띄어쓰기는 우리 말을 배우는 과정에서 체득하여 기록화한 것이다. 우리 글에서의 띄어쓰기는 서구와는 달리 명사에 조사를 붙여 쓰고 있다. 어순에서 한글 띄어쓰기는 알파벳 문자의 서구와는 전혀 다르듯 그 출현 및 발전 과정은 선교사와 전혀 관련이 없다.

『독립신문』이 창간될 때 필진으로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주시경 등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우리 문법을 30여 년간 연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문법서 『조선문전』(1902년 이전 저술)과 『대한문전』(1909년경)을 저술하였고, 주시경(周時經, 1876~1914) 선생은 1910년경에 ‘한글’이라는 호칭을 만든 한글학자이다.

주시경 선생은 『독립신문』 창간 이전부터 우리 문법을 연구하던 당시 유일무이한 국문 전용론자였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하자 총무 겸 교보원으로 주시경 선생을 임명하였으며, 국문(國文) 담당 조필(助筆)을 맡아 서재필의 국민 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한글 전용, 한글 띄어쓰기, 쉬운 한글 쓰기를 실천하였다. 즉 『독립신문』의 띄어쓰기는 분명 주시경 선생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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