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조선왕조에서 제주목에 많은 목사를 파견하였다. 홍순만의 『제주목사에 관한 서설』(1991)에 의하면 조선시대(1392~1910년) 528년간 제주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총 286명이다. 이 수는 미부임 자를 제외한 수이며, 평균 재임기간은 대략 1년10개월 정도이다.

제주목사 재임기간이 6개월을 넘기지 못한 경우가 28명으로 9.7%, 1년을 넘기지 못한 목사가 65명으로 22%이다. 재임중 사망한 사람이 21명으로 7%, 재임중에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하거나 파직된 경우가 68명으로 23%를 차지한다. 가장 오래 제주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이경록(李慶祿, 1543~1599)으로 6년 5개월을 재임하였다.

그리고 이종윤⸱조희순⸱백낙연⸱서병업 등이 임기를 넘겼다. 제주목사 중에 선정을 베푼 목사는 58명으로 20%, 학정을 행한 목사는 14명으로 4.8%, 실정(失政)을 한 목사가 15명으로 5%이다.

이들 제주목사로 있던 286명의 인물 가운데 특이한 인물이 몇 분 있다. 이번 ‘2023 제주고서전’에 이약동 목사의 『노촌선생실기』 5권1책 목활자본(1848년)과 이원진 목사의 유묵, 이형상(李衡祥, 1653~1733) 목사의 친필본 『영언(永言)』과 양헌수(梁憲洙, 1816~1888) 목사의 『훈민편』 1책 필사본(1864년) 등등이 출품되었는데, 이번 회에서는 이 혼탁한 한국의 현대 정치판에 이들 네 분의 옛 제주목사가 주는 교훈을 되새기고자 한다.

1. 이약동과 『노촌선생실기』

노촌 이약동(李約東, 1416~1493)은 1441년(세종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1) 증광문과시에 정과(丁科) 급제하였다. 그는 1470년(성종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중 이속(吏屬)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켰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감면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여 당시의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는 등 도민의 관점에서 선정을 베풀었다.

1473년(성종3) 8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이임할 때, 제주에서 사용하던 모든 물건을 두고 갔다. 이약동이 사용하던 말 채찍은 관덕정에 오랫동안 걸려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이약동은 성종 때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고, 78세로 장수하여 『기영록(耆英錄)』에도 올랐다. 1683년에는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 되었다.

제주목사 이약동이 제주에서 보여준 애민 정신과 청백리 정신은 현대의 공직자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이니, 육당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이약동을 우리나라의 유사(有史) 이래 최고의 청백리로 꼽았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관리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언급하며 이약동이 말의 채찍을 제주도 관물(官物)이라 하여 성루에 걸어둔 것과 받은 갑옷을 바다에 던진 투갑연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노촌선생실기(老村先生實記)』 탐라에 관한 시 부분, 이약동(李約東), 5권1책, 1848년, 목활자본. 戊申端陽華山印出.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노촌선생실기(老村先生實記)』 탐라에 관한 시 부분, 이약동(李約東), 5권1책, 1848년, 목활자본. 戊申端陽華山印出.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2023 제주고서전’에 출품된 이약동의 『노촌선생실기(老村先生實記)』 5권1책은 그가 사망한 지 355년 후인 1848년 5월 5일 자에 발행한 목활자본이지만, 그 전존인본이 매우 희소하다. 책 끝에 ‘戊申端陽華山印出’이라는 간기가 있다. 여기에서의 화산은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지역으로 판단된다.

2. 이원진의 『탐라지』를 생각한다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은 1615년(광해군7)에 생원으로서 대북의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에 풀려났다. 1630년(인조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교리⸱부수찬⸱장⸡⸡집의 등을 거쳐 1647년(인조25) 승지에 올랐다. 1651년(효종2) 7월 김수익(金壽翼)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 재임 시절, 1653년 8월에 네덜란드 사람 하멜(Hendrik, Hamel, 1630~1692)등 일행 36명이 가파도 근처에서 파선하여 표류해 오자 이들을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는 제주성의 북수문 위에 공진정(拱辰亭)을 창건하였다. 1653년(효종4) 가을, 큰 풍수해로 제주성의 남수구와 북수구, 홍문이 무너지자 수리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곧이어 10월에 이임하였다.

이원진은 군기를 수리하고 병사 훈련 장소를 마련하여 세병헌(洗兵軒)이라 하는 현판을 걸었고, 1652년(효종3) 봄에 차귀진(遮歸鎭, 한경면 고산리)을 설치하여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1653년(효종4) 봄 대정항교를 옮기는 등 많은 일을 하였으나, 그가 제주목사로 재임할 때 제주는 세계가 조선을 들여다보는 창구로 부상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쉽게도 그 창구는 조선왕조에 의하여 굳게 닫혀 있었다.

『이원진의 자필 시』, 이원진(李元鎭, 1594~1665), 1장, 1635년, 50×28cm. 이원진의 간찰도 희소하지만, 서작(書作)으로는 이 작품이 유일한 것으로 확인된다. 표암 강세황의 구장본으로 전한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이원진의 자필 시』, 이원진(李元鎭, 1594~1665), 1장, 1635년, 50×28cm. 이원진의 간찰도 희소하지만, 서작(書作)으로는 이 작품이 유일한 것으로 확인된다. 표암 강세황의 구장본으로 전한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또한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耽羅誌)』는 『동국여지승람』이래, 최고의 제주 지리지로 평가된다. 이 『탐라지』는 제주에서 편찬 간행한 목판본으로 ‘2023 제주고서전’ 막바지에 개인 소장품이 확인되었으나, 시기적으로 출품을 접수받기가 불가능하였고, 다만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구장하였던 그의 시고 작품만이 출품되었다.

3. 이형상과 『영언(永言)』, 그리고 간찰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80년(숙종6) 별시문과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703년(숙종 29)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후 제주의 전통 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성묘(聖廟)를 수리하고 학덕이 높은 선비를 선생으로 정하여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한 고을라⸱양을라⸱부을라를 모시는 삼성사(三姓祠)를 세웠다. 제주도 남부에 있었던 한라 호국 신사인 광정당(廣靜堂)에서 지방민들이 기도하던 풍습을 근절시켰고, 신당(神堂)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단속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여 두 사찰을 불태웠다.

또한 그는 유교적 풍속 교화에 힘써 일부다처가 윤리에 벗어난 일이라 하여 금지했고, 동성동본이나 근족간의 혼인도 엄격히 금지하였다.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금하였고, 여름에 남녀가 어울려 용천수에서 함께 목욕하는 일이 풍기를 문란케 하는 행위라며 금지했다.

제주에 이형상의 선정을 기리는 4개의 비가 세워졌으나, 현재 「사상이형상기념비(使相李衡祥紀念碑)」만이 제주시 이도동 삼성혈에 남아 있다. 『정조실록』에는 이형상은 사후 63년 만인 1796년(정조20) 4월 18일 자에 “청백리로 천거”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전하는 217명의 녹선(錄選)된 조선시대 청백리 명단에는 이형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청백리에 천거되기는 하였으나 녹선되지는 않았다.

이형상의 대표적인 편저로는 제주의 자연, 풍물 등을 수록한 지리서 『남환박물지(南宦博物誌)』 1책(1704년)과 제주 관내를 한 달간 순력하고 돌아온 후 그간의 여러 상황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첩 등등 15점이 일괄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운데 『탐라순력도』는 제주도 소속의 화공 김남길이 그림을 그리고 이형상이 설명을 삽입하여 함께 제작한 것으로 18세기 초 제주도의 자연, 역사, 산물 등이 기록된 작품으로 역사적, 문화적, 회화적 가치가 높다.

『영언(永言)』, 이형상 편, 김상석 소장품, 악부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17장), 「교사가(郊祀歌)」(19장) 등 중국 역대 악부를 편찬한 이형상의 친필본이다. Ⓒ김성석 [사진 제공 – 이양재]
『영언(永言)』, 이형상 편, 김상석 소장품, 악부 「안세방중가(安世房中歌)」(17장), 「교사가(郊祀歌)」(19장) 등 중국 역대 악부를 편찬한 이형상의 친필본이다. Ⓒ김성석 [사진 제공 – 이양재]
『이형상 간찰』, 이형상(李衡祥, 1653~1733), 1점, 대구화랑 소장품. 병와 이형상의 간찰로 필치라든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이형상 간찰』, 이형상(李衡祥, 1653~1733), 1점, 대구화랑 소장품. 병와 이형상의 간찰로 필치라든가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즉, 이형상은 제주목사를 지낸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후대 제주인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을 남긴 유일무이한 목사이다. ‘2023 제주고서전’에는 이러한 유적(遺籍)을 남긴 이형상 친필본 『영언』과 대구화랑 소장의 간찰이 각기 출품되었다.

4. 척화론자 양헌수와 『훈민편』

경보 양헌수(梁憲洙, 1816~1888)는 화서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이다. 1848년(헌종14)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1864년(고종1) 2월 14일 제주목사에 임명되어 3월 정기원(鄭岐源)의 후임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훈민편』과 『훈민편해』,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저, 필사본, 1점(본문 8장), 1864년, 제주에서 생산된 종이에 쓰여 있다. 한문 저술을 한글로 풀어썼고, 관청의 비준을 받았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훈민편』과 『훈민편해』,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저, 필사본, 1점(본문 8장), 1864년, 제주에서 생산된 종이에 쓰여 있다. 한문 저술을 한글로 풀어썼고, 관청의 비준을 받았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그는 부임한 해 8월에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제주도민을 일깨웠고, 삼성사에 기제사를 위한 제전(祭田)을 특별히 내렸다. 전 제주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엄하게 다스려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다. 1865년(고종2) 가을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고 조정에 쌀 1천 석을 요청하여 제주민을 진휼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3) 8월에 승지에 임명되어 이임하였다.

양헌수가 이임한 후 1867년(고종4)에 세워진 「사상양헌수영세불망비(使相梁憲洙永世不忘碑)」가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에 있고, 1870년(고종7)에 세워진 「목사양공헌수제폐비(牧使梁公憲洙除弊碑)」가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455-1번지에 있다. 그리고 1911년 6월에 세워진 「사상양헌수기념비(使相梁憲洙紀念碑)」가 제주시 이도일동에 있는 제주 삼성혈에 있다.

또한 건립 연대가 알려지지 않고 있는 양헌수기념비가 두 개 더 있는데, 「사상양공헌수청덕휼민비(使相梁公憲洙淸德恤民碑)」가 제주시 일도2동에, 「사상양공헌수선정비(使相梁公憲洙善政碑)」가 제주시 외도동에 있다.

대체로 조선시대의 선정비는 이임 직전에 세우는 것이 다반사여서 선정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으나. 양헌수의 선정비는 모두 이임한 이후에 세워진 것을 보면, 그는 진정한 애민 목사였다. 양헌수는 양을나(良乙那)의 자손이라는 남원양씨(南原梁氏)이기에 제주민에 대한 애착이 컸던 것이 아닐까?

『유부모자제급채도매방금절목(有父母子弟給債盜買防禁節目)』, 원본, 1점(본문 2장), 1865년, 양헌수가 제주목사로 있던 1865년에 작성된 절목이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유부모자제급채도매방금절목(有父母子弟給債盜買防禁節目)』, 원본, 1점(본문 2장), 1865년, 양헌수가 제주목사로 있던 1865년에 작성된 절목이다. Ⓒ이양재 [사진 제공 – 이양재]

양헌수가 제주목사로 부임한 직후 저술한 『훈민편』(1864년)과 고문서 『유부모자제급채도매방금절목(有父母子弟給債盜買防禁節目)』(1865년)이 ‘2023 제주고서전’에 출품되었다. 출품된 양헌수의 『훈민편』은 한문본에 연이어 번역된 『훈민편해』가 수록되어 있다.

제주목사에서 이임한 양헌수는 어영청(御營廳)의 천총(千摠)으로 있던 1866년에 강화도에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에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프랑스군은 사고(史庫)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도서들을 대거 약탈해 갔다. 프랑스군의 정족산성 사고 약탈을 경험한 양헌수는 1888년 사망할 때까지 외세에 대한 척화론자(斥和論者)의 입장을 지켰다.

5. 네 분의 제주목사를 목민관의 본보기로 삼아

조선초기의 노촌(老村) 이약동(李約東), 조선중기의 태호(太湖) 이원진(李元鎭, 1594~1665)과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조선말기의 경보(敬甫) 양헌수(梁憲洙, 1816~1888). 이 네 분은 선정을 베푼 대표적인 제주목사이다.

현대에 이 네 분을 목민관으로서 본보기로 삼는다면, ①노촌 이약동에게서는 결벽증을 보일 정도의 청백리 정신과, ②태호 이원진에게서는 세계를 향한 조선의 창구의 역할을 제주가 능히 할 수 있었으나, 조선왕조가 이를 놓쳐버린 아쉬움을 거울 삼아 제주의 적극적인 지방외교를, 또한 ③병와 이형상에게서는 문화적 문민(文民) 정신을, ④경보 양헌수에게서는 백성과 나라를 지키는 참된 자주정신을 지적할 수가 있다.

즉 현대의 제주에서는 ①청백리 이약동과 같은 목민관이 출현하여, ②이원진이 놓친 세계로 눈을 돌리는 지방외교를 추진하고, ③양헌수처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제주민을 평화와 화합의 길로 훈민(訓民)하며, ④이형상의 문화 정신에 따라 제주가 문화제주로서 거듭나는 시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민생을 위한 기풍이 제주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하여 한반도에 가득 차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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